제4화 죽을 자격조차 없다
"아."
남자가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결국 돈 때문이었군. 하긴, 너한테 돈 말고 뭐가 중요하겠어? 한 달도 안 됐는데 뭘 그리 재촉해? 걱정 마. 떼먹진 않을 테니 기다려. 설마 남 씨 집안이 네 밥 한 끼 굶길까 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앞으로 볼일 없으면 전화하지 마. 내가 필요하면 연락할 테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끊겼다.
윤가을은 휴대폰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자신을 이토록 혐오하고 있었다니.
"허, 허허."
윤가을은 창백한 얼굴로 방금 그에게 손을 벌려 돈을 구걸했던 자신이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어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쓸었다. 눈을 감자 눈물이 꼬리를 물고 흘러내렸다.
...
8개월 후.
휘성시, 빈민가.
침대에 누워 잠든 윤가을의 배는 이미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출산 예정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의사는 태아의 위치가 좋지 않다며 미리 입원할 것을 권했다.
윤가을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돈이 없었다.
8개월 전 남한강과 통화한 후, 그는 모진 말을 퍼부었지만 생활비는...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가진 돈을 다 써버린 윤가을은 더 이상 아파트에 살 수 없게 되자 결국 빈민가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기생충이라는 말을 또 들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빈민가에 정착한 후, 윤가을은 학교에 다니며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버는 돈은 많지 않았지만, 아껴 쓰면 겨우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단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큰일 났어요!"
"불이야!"
"빨리 도망쳐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윤가을이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자,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짙은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윤!"
같은 유학생인 이웃이 그녀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불났다고요! 빨리 피해요!"
"아! 네!"
윤가을은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배낭을 챙겼다.
그녀가 더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웃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죽고 싶어요? 어딜 더 들어가요? 빨리 안 나오고!"
"안 돼요!"
윤가을은 애타게 발을 동동 굴렀다.
아직 방 안에 돈이 있었다. 아끼고 또 아껴 뱃속의 아이를 위해 모아 둔 돈이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병원비와 기저귀, 분유 값은 모두 그 돈에 의지해야 했다.
"반드시 가져와야 해요!"
안으로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불에 탄 대들보가 천장에서 무너져 내렸다.
"악!"
윤가을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길이 막혀버렸다.
"윤! 어서 가요!"
"안 돼요!"
윤가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갈 수 없었다. 이웃의 손을 뿌리치고 무작정 안으로 뛰어들었다.
"악!"
거센 불길이 그녀를 덮쳤고, 윤가을은 급히 등을 돌렸다. 허리 뒤쪽을 스치는 뜨거운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윤!"
이웃이 서둘러 그녀를 끌어당겼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쿨럭, 쿨럭..."
그녀는 고개를 저었지만, 짙은 연기 때문에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빨리 가요!"
이웃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더 이상 들어가면 위험해요!"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야죠! 이 유독가스는 치명적이라고요! 고집부리다 둘 다 죽고 싶어요?"
"빨리 가요!"
이웃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윤가을은 마침내 화재 현장에서 벗어났다.
허리에 화상을 입고 돈도 꺼내지 못한 채, 그녀는 낡은 집이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악!"
갑자기 아랫배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고, 윤가을은 배를 움켜쥐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주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애를 낳으려나 봐!"
"빨리 구급차 불러요! 병원으로 보내야 해요!"
...
"악!"
"힘내세요!"
병원으로 옮겨진 윤가을은 분만대에 누워 십수 시간의 사투 끝에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았다.
마침내, 아이를 낳았다.
백인 간호사가 아이를 품에 안겨주자, 윤가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었다.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였다.
그녀의 가족...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윤가을은 아이를 안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인 간호사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원비를 독촉하러 왔지만, 윤가을이 낸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윤가을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뻔뻔한 건 알지만, 정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휴."
간호사는 마음이 약했다. 이 어린 동양인 아가씨가 나쁜 남자에게 버림받았을 거라 짐작했다.
"가족 없어요? 친구라도? 연락해서 도움을 청해봐요."
말을 마친 간호사는 그녀를 더는 다그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윤가을은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가족? 친구? 없었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엄마였다. 양심 없이 병원비를 떼먹을 수는 없었다.
윤가을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8개월 만에 다시 남한강의 번호를 눌렀다.
뚜- 뚜-
긴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남..."
"여보세요?"
그녀가 막 입을 떼는 순간,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나래였다.
"윤가을 씨?"
김나래는 희미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한강 씨 찾아? 지금은 통화하기 곤란한데,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도 괜찮아."
그녀가 이렇게 친절할 리가.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의 윤가을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미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그녀는 염치를 무릅쓰고, 거의 비굴하게 애원했다. "저, 그 사람에게... 돈 좀 빌릴 수 있을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차마 그에게 직접 손을 벌릴 용기가 없어, '빌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부탁이에요, 꼭 갚을게요. 돈이 생기는 대로 바로 갚겠습니다!"
"아, 그래요."
김나래는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전해줄게. 그럼 이만."
"고마..."
윤가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그녀는 휴대폰을 쥔 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남한강이 빌려주겠지? 할머니를 봐서라도, 아직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은 아내라는 걸 생각해서라도...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도, 윤가을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이틀 후, 그녀는 가방을 메고 아이를 안은 채 병원 정문에 섰다.
입원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겨울의 따스한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자,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울면 안 돼.'
윤가을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자신을 다그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울어? 넌 엄마야, 지켜야 할 아이가 있잖아! 울지 마!'
하지만 그녀는 무일푼이었고, 살던 집은 불타버려 머물 곳조차 없었다.
...
2주 후.
윤가을은 아이를 품에 안고 앞만 보며 달렸다.
"도둑이야! 저 여자가 물건 훔쳤어!"
"빨리 잡아!"
등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발을 헛디딘 윤가을은 앞으로 넘어졌고, 그 순간 몸을 돌려 품 안의 아이부터 보호했다.
"잡았다!"
그녀가 채 일어서기도 전에 뒤쫓아온 점원에게 붙잡혔다.
"어딜 도망가! 뭘 훔쳤어? 당장 내놔!"
점원이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 지퍼를 열고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부었다.
"분유? 기저귀? 이런 걸 왜 훔쳐?"
"저기 봐! 애를 안고 있잖아!"
윤가을은 수치심에 눈을 감았다. 이 순간, 차라리 죽고 싶었다. 이렇게 구차하게 살다니,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품 안의 아이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녀는 죽을 자격조차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