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그에게 손을 벌려 돈을 구걸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윤가을을 발견한 남한강의 눈이 싸늘하게 가늘어졌다. "왜 문 안 열어?"
'힘이 없었으니까.'
윤가을은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하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어떤 변명이든 핑계로 들릴 게 뻔했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면 숨 쉬는 것조차 죄가 되는 법이니까.
윤가을은 몸을 가누기 힘든 와중에도 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날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이 왜.
"흥, 내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남한강은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할머니가 너 비행기 태워 보내라고 해서 온 거니까!"
아, 그런 거였구나.
윤가을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애초에 뭘 기대했던 걸까.
"짐은? 위층에 있나?"
남한강은 짜증이 치밀었다. 이곳에 1초라도 더 머무는 것도, 윤가을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는 것조차 끔찍한 고문이었다.
윤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저었다. "위층에 있는데, 아직 다 못 쌌어요..."
어젯밤 돌아와서 마저 싸려 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 그대로 잠들어 버린 탓이었다.
"뭐?"
그 말에 남한강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하루 종일 하는 일도 없으면서 짐 하나 못 싸?"
멍하니 서 있는 윤가을을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버티고 안 가려는 속셈인가.
"멍하니 뭐 해? 당장 가서 안 싸?!" 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재촉했다.
"아, 네."
윤가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허둥지둥 위층으로 올라갔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상한 낌새에 이마를 짚어 보니, 손끝이 불덩이 같았다.
내뱉는 숨결마저 뜨거웠다.
열이 나고 있었다.
어제 비를 맞은 탓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감기약을 찾는 것이었다. 약을 입에 넣으려던 순간, 그녀는 멈칫했다.
임신했다! 이 약은 절대 먹으면 안 됐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단 하루라도 뱃속에 있는 이상 소중히 여겨야 했다.
"우웩..."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윤가을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한참을 게워냈다. 구토가 멈췄을 땐 거의 탈진 상태였다.
수돗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불타는 듯한 몸을 식히려 애썼다.
"윤가을!"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에는 참을성 없는 짜증이 가득했다.
기다리다 지친 남한강이 직접 재촉하러 올라온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와 보니, 그녀는 아직도 짐을 다 싸지 않은 상태였다.
"윤가을, 어디 있어? 나와!"
"나왔어요." 윤가을은 얼굴을 닦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창백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남한강 씨."
예전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는 그의 성을 붙여 불렀다. "저... 하루만 늦게 가면 안 될까요?"
지금 몸 상태로는 비행기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하늘을 보고 울부짖어도, 땅을 치고 통곡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무슨 꿍꿍이야?"
남한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어제 병원에서 나래한테 빌려다가 나한테 막히니까, 다른 방법을 쓰려는 건가?"
그의 눈에 자신은 그렇게까지 비열한 존재였을까.
"아, 아니에요..."
윤가을은 동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울음을 참으려 애썼다.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보고 싶어서요..."
"됐어!"
남한강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칠게 끊었다.
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꾀병 부리는 거야? 또 그 수법이야? 내가 속을 줄 알고?"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설령 진짜 아프다고 해도 얼마나 아프겠어? 나래는 아이를 잃고 병원에 누워 있는데, 넌 멀쩡히 서 있잖아! 참아. 안 죽어."
"!"
윤가을은 온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저는..."
남한강은 그녀를 무시하고 곧장 옷방으로 들어가 이미 싸 둔 캐리어를 꺼냈다.
"못 싼 건 그냥 둬. 어차피 남 씨 집안 돈인데, 외국 가서 새로 사면 될 거 아냐! 너랑 여기서 시간 낭비할 시간 따위 없다고!"
말을 마친 그는 캐리어를 끌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윤가을은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 아팠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손등으로 마구 닦아냈다.
가자.
여기에 남는 것과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어차피 이제 혼자였다. 그녀의 억울함도, 그녀의 생사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했지만, 남한강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비서인 윤정우가 수속을 돕고 보안 검색대까지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사모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윤정우가 여권과 항공권을 건네며 말했다. "도착하시면 할머니께 전화 한 통 드리세요. 생활비는 매달 보내드릴 겁니다."
윤가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발걸음을 옮겨 탑승구로 들어섰다.
...
한 달 후.
휘성시, 도심의 한 아파트.
밤은 깊었다.
하지만 윤가을은 불도 켜지 못한 채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쾅! 쾅! 쾅!
문이 요란하게 울렸고, 문밖에서 뚱뚱한 중년 집주인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동양 아가씨! 안에 있나? 집세 내야지!"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대답 좀 해봐!"
윤가을은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냥 돌아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자 집주인도 포기한 듯했다. "이런다고 돈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아? 아가씨, 순진하긴!"
"정말 없나?" 집주인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늦었는데, 오 마이 갓."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멎고 발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집주인이 돌아간 것이다.
윤가을은 그제야 손을 내리고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하루를 넘겼다. 그럼 내일은? 내일은 또 어떡해야 할까?
그녀는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내 남명주의 번호를 찾았다.
휘성시에 온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생활비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이틀 내내 남명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또 이거였다.
남명주와 연락이 닿지 않으니, 기댈 곳은 남한강뿐이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윤가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살짝 잠긴, 남한강의 목소리였다.
윤가을은 긴장으로 입술이 바싹 말랐다. "저... 저예요."
그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짜증이 묻어났다. "무슨 일이야?"
윤가을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깨물었다. "저기... 할머니를 찾으려고 했는데, 전화를 거니까 없는 번호라고 나와서요."
"흥." 남한강이 차갑게 비웃었다. "할머니는 왜? 나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할머니한테 매달려서 마음 약해지게 만들고, 다시 데려오라고 조를 셈이야?"
"아..." 윤가을은 서둘러 부정했다. "아니에요..."
남한강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 "다시는 할머니께 전화하지 마. 네가 귀찮게 할까 봐 내가 번호 바꿔드렸으니까."
"......" 윤가을은 입을 벌린 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알지만, 이미 이렇게 멀리 쫓겨났는데도 부족한 걸까.
할머니와의 연락마저 끊어버려야 했을까.
가족 하나 없는 그녀에게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나눠준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할 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남한강은 인내심을 잃었다. "널 외국으로 보낸 건 그 더러운 성질머리 좀 고치라는 거야. 어린애도 아니니 이제 자립하는 법도 배우고. 기생충처럼 남 씨 집안에 빌붙어 살 생각하지 마! 끊는다!"
"잠깐만요, 할 말 있어요!" 윤가을은 다급히 그를 붙잡고는 염치를 무릅쓰고 말했다. "저, 생활비가... 아직 안 들어와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