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김소진은 다 풀린 다리로 비틀거리며, 8년을 살아온 그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문을 여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백미나가 흐느적거리듯 박인강 품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엔 분명 눈물 자국까지.
박인강은 환자를 달래는 의사 특유의 목소리로 조용히 그녀를 어르고 있었다.
"됐어, 감정 안정이 회복에 제일 중요해."
백미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가 최고예요! 세상 어떤 의사보다 더 최고!"
김소진은 사랑했던 남편과 '스승의 딸'이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는 장면을 바라보며, 죽음보다 더한 공허가 가슴을 휩쓸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박인강은 그녀가 들어온 걸 뒤늦게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렸고, 목소리는 바로 '의사 박인강'의 프로페셔널한 톤으로 되돌아갔다.
"김소진, 돌아왔어? 장인어른 상태는 어때?"
참 우습기도 했다.
아버지의 연명 장비를 끊으라고 지시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그 입으로 상황을 묻는다니.
그녀는 싸늘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덕분에, 아직 죽진 않았어."
박인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목소리에 약간의 꾸짖음이 섞였다.
"김소진, 말투 조심해. 의료진 가족이라면 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해야지."
누구한테?
당신 같은 내 아버지의 살인자한테?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었다.
그때 백미나가 눈치 보듯 그의 소매를 잡고 작게 속삭였다.
"박, 박 선생님… 저 때문에 언니가 화난 건가요…?"
김소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박. 선. 생. 님?
둘만의 호칭이었고, 둘만 알고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지금 그 이름을 부르는 여자는… 백미나였다.
조롱 같았다.
잔혹한 풍자 같았다.
하지만 박인강은 그녀의 감정 따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니면 의사의 이성을 핑계로 일부러 무시한 건지, 백미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네 컨디션이 먼저야."
백미나는 눈을 끔뻑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선배가 제 옆에서 입원 도와줄 수 있어요? 간호사들은 선배님만큼 전문적이지 않단 말이에요."
입원?
김소진은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발적 골수 양도서류를 받아낸 뒤, 박인강은 이제 한시라도 빨리 백미나 이식 준비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때, 계단을 오르려던 그녀를 박인강이 불렀다.
"김소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오며, 언제나처럼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협조해야 하는 일이 있어."
김소진은 이미 한 발을 계단에 올린 채 멈춰 서 있었다.
고개는 돌리지도 않은 채, 지친 숨을 내쉬듯 말했다.
"말해. 이번엔 또 무슨 서류에 사인하라는 거야? 이혼 서류? 아니면 내 몸에서 필요한 장기라도 적출해서 네 환자에게 넘기라는 거야?"
박인강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고, 눈빛엔 의사 특유의 '엄중함' 같은 것이 스쳤다.
"김소진, 말조심해. 정상적인 의료 절차일 뿐이야."
그녀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쓴맛을 억지로 삼켰다.
"우리 아빠는 겨우 심폐소생 받고 살아났어.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이길 바라는데?"
"나 하루종일, 하루 내내 한숨도 못 잤어. 그냥 올라가서 잠 좀 잘게."
그가 그녀 팔을 어루만지듯 스쳤다. 달래는 어투였다.
"여긴 네 집이야. 언제든 자면 돼. 다만—"
그는 옆에서 천진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이는 백미나를 가리켰다.
"미나는 입원해서 집중 관리가 필요해. 너는 혈액병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지. 의학적으로 보면 네가 돌보는 게 가장 적합해."
김소진은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박인강, 네 이성은 이제 사람을 무서워하게 만들 수준이야. 우리 아빠 병원에 누워 있는데, 내가 백미나를 돌보면 그럼 우리 아빠는 누가 돌봐?"
그는 손끝에 조금 힘을 주며, 여전히 변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소진. 의료 자원 배분으로 보면 그게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야."
그의 완전히 식어버린 눈을 보고 있자니, 더 말할 힘이 나지 않았다.
김소진은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래. 내가 돌볼게."
그제야 그의 손이 느슨해졌고, 어조도 약간 부드러워졌다.
"협조해줘서 고마워."
아내를 불러다가 새애인 곁을 지키게 한다?
이 세상에서 그럴 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김소진은 이제 그런 비웃음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백미나가 입원한 첫날, 김소진은 왜 이 병실에 간호사가 붙지 않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병실이 심심하다고 인테리어 팀을 불러 분홍색 테마로 싹 갈아엎고, 병상이 좁다고 3미터짜리 대형 원형 침대를 들여오라 하고,
"이 물은 뭐야? 난 에비앙만 마셔!"
"이런 밥은 못 먹어! 나 일식 먹을래!"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혀를 찼다.
"여기 요양원이야? 리조트야?"
헤프게 보였지만, 뒷배가 병원 주치의 겸 핵심 권력자인 박인강이니 누구도 대놓고 뭐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간호사가 드레싱을 하다 손이 조금 거칠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뺨을 후려친 적도 있었다.
김소진이 힘겹게 몇 마디 타일러 보면, 금세 눈물 그렁그렁하게 만들어 박인강에게 전화로 일러바쳤다.
"나 돌봐준다더니 다 거짓말이야! 나한테 이렇게 함부로 해!"
그러면 곧장 김소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인강의 목소리는 또다시 환자를 달래는 의사 톤이었다.
"미나는 환자야. 의학적으로 보면 그 아이의 감정 기복을 네가 더 이해해줘야 해."
환자?
그 말에 김소진은 실소가 터질 뻔했다.
이토록 성하고 팔팔해서 병원 전체를 뒤집어놓고 있는 사람이 그의 입에서 위중하다고 불리던 그 환자라는 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