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김소진의 아버지, 김영호가 희귀 혈액병을 앓기 시작한 지 5년 만에, 마침내 적합한 골수가 나타났다. 그 이식 전날 밤, 결혼한 지 5년 된 남편 박인강이 그녀에게 자기 스승의 딸, 백미나에게 그 골수를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늘 그렇듯 곧은 자세로, 하얀 가운을 걸친 채 서 있었고, 표정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이성적이어서 마치 평범한 의학 케이스를 설명하는 듯했다. "김소진." 그가 입을 열었다.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백미나 상태가 바뀌었어." 그 한마디에 김소진의 가슴이 쿡,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반 걸음 물러났고, 좋지 않은 예감이 온몸을 스쳤다. "골수 이식이 필요해." 박인강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의사 특유의 이성만 남은 눈빛이었다. "의학적으로 보면 그게 최선이야." 말 한 글자 한 글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날아와 이제 막 피어오른 희망을 정확히 베어냈다.
제1화
김소진의 아버지, 김영호가 희귀 혈액병을 앓기 시작한 지 5년 만에, 마침내 적합한 골수가 나타났다.
그 이식 전날 밤, 결혼한 지 5년 된 남편 박인강이 그녀에게 자기 스승의 딸, 백미나에게 그 골수를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늘 그렇듯 곧은 자세로, 하얀 가운을 걸친 채 서 있었고, 표정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이성적이어서 마치 평범한 의학 케이스를 설명하는 듯했다.
"김소진."
그가 입을 열었다.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백미나 상태가 바뀌었어."
그 한마디에 김소진의 가슴이 쿡,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반 걸음 물러났고, 좋지 않은 예감이 온몸을 스쳤다.
"골수 이식이 필요해."
박인강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의사 특유의 이성만 남은 눈빛이었다. "의학적으로 보면 그게 최선이야."
말 한 글자 한 글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날아와 이제 막 피어오른 희망을 정확히 베어냈다.
김소진의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박인강…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우리 아빠… 우리 아빠는 그 골수를 5년을 기다렸어!"
"기다렸잖아. 드디어 찾은 거고."
박인강은 여전히 담담했다. 있는 사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처럼.
"알아. 하지만 스승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백미나를 부탁하고 가셨어. 그건 내가 져야 할 책임이야."
"나이, 신체 조건, 회복 전망을 고려하면 미나가 이식 성공률이 더 높아.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 골수를 그녀에게 쓰는 게 더 큰 가치를 만드는 거야."
김소진의 목소리가 확 튀어 올랐다.
"의학적 관점? 가치?"
"박인강! 그건 우리 아빠 목숨이야! 기계에 의지해서 지금도 그 골수만 기다리고 있다고! 게다가… 백미나는 이틀 전에 종합검진했잖아! 경미한 빈혈! 이식이 필요한 상태도 아니야!"
김소진은 구겨져 있던 종이를 꺼내 힘껏 그의 가슴팍으로 내던졌다.
"직접 봐!"
"네 마음속 여자가 조금만 아파도 중병처럼 몰아가니까 그렇지! 위중을 초래할 수 있는 상태? 박인강, 네 의사로서의 양심은 어디 갔어?"
박인강은 내려다보며 얇은 진단서를 스쳐 보았고,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소진아, 넌 의학을 몰라. 가벼운 빈혈도 혈액 질환의 신호일 수 있어. 난 의사로서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어."
그 말에 김소진의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결론까지 내려놓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그는 흰 가운 안주머니에서 칼같이 접힌 A4 용지 몇 장을 꺼냈다. 평소 병동에서 차트를 다루듯 정확한 동작이었다.
"여기에 사인해."
"자발적 장기 양도 동의서야. 골수 우선 사용권을 백미나에게 넘기는 서류."
눈앞이 빙그르 돌았고, 김소진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차가운 벽을 붙잡았다.
"너… 꿈도 꾸지 마."
김소진은 이를 악물어 겨우 몇 마디를 쥐어짜냈다. 말 끝마다 떨림이 실렸다.
박인강의 눈빛은 여전히 평온했다. 마치 환자에게 수술 방침을 설명하는 의사처럼 담담했다.
"김소진, 이성적으로 생각해. 네 아버지는 지금 뭐로 생명 연장하고 있지? ICU의 정밀 장비들이야."
"사인만 하면 골수는 백미나에게 들어가고, 그동안 나는 장비가 계속 가동되도록 보장할게. 아버님께 다음 적합 골수가 나올 때까지. 그게 가장 합리적이야."
그는 잠시 멈췄다. 그러나 목소리의 차가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면, 네가 거부할 수도 있어. 그 경우 내가 주치의 권한으로 10분 뒤 아버님의 모든 연명 치료를 중단할 거야. 의학적으로 희망이 없으니까."
쾅—.
몸속 마지막 힘까지 쏙 빠져나간 듯, 김소진은 차가운 벽을 타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릎이 바닥에 닿기 직전, 박인강이 손을 뻗어와 그녀에게 펜을 건넸다. 마치 수술실에서 기구를 넘기듯 정확하고 딱딱한 동작이었다.
그건 그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손길이 아니었다. 거절하지 못하도록, 차갑게 굳은 그녀의 손바닥에 억지로 펜을 쥐여 넣는 동작이었다.
5년 전, 아버지가 혈액병 진단을 받던 날.
그는 스무 해 넘게 품고 다닌 자신의 가장 소중한 만년필을 그녀의 손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며칠 뒤, 그녀가 박인강과 연인이 되던 날.
그 만년필을 정성스럽게 닦아선, 기념이라며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건넸었다.
그녀는 그의 깊고 다정한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아빠한테 제일 소중한 건데… 이제 이걸 당신한테 줄게."
그러자 그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소진아, 평생 너와 아버님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게."
그런데 지금, 한때 그녀의 사랑을 감싸준 그 만년필이 그 남자의 손에서 칼날처럼 변해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친부의 목숨을 파는 서류에 사인하라고,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김소진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나오는 말마다 금이 간 듯 아프게 갈라졌다.
"내가… 거부하면? 정말… 그렇게 할 거야?"
박인강의 표정은 마치 ICU에서 사망 선고를 할 때와 똑같은 차가운 평정이었다.
"김소진, 난 지금 협의하는 게 아니야. 의사로서의 의무, 그리고 스승님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중이야."
"이해해야 해. 의사는 때때로 가장 잔인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어."
김소진은 손에 쥔 펜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경련을 일으켰다.
"박인강… 우리 결혼한 지 5년이야, 최소한…"
그러나 그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갔다.
마치 병실에서 위독 환자의 상태를 읽어내려가는 것처럼 건조한 목소리였다.
"김소진, 기억해둬. 네가 감정적으로 굴면 아버님은 죽어. 가족이라면 최선의 치료를 선택해야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전화를 들었다.
의사의 냉정한 톤으로 명령을 내렸다.
"17번 병상, 연명 장비 전부 중단하세요. 보호자가 치료를 거부합니다."
"당신들 뭐예요? 그러면 안 돼요!"
간호사의 비명 섞인 외침이 병실을 찢어냈다.
그 한순간, 김소진의 마지막 희망도 무너져내렸다.
박인강은… 정말로 실행한 것이다.
"아니야! 내가… 내가 쓸게!"
김소진은 자발적 장기 양도 동의서를 낚아챘지만 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 펜이 계속 손바닥에서 미끄러졌다.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흘렀고, 그녀는 억지로 몇 번씩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했다.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꽉 움켜쥔 채, 비틀리고 삐뚤어진 글씨로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박인강! 끝났어! 빨리 장비 다시 켜게 해!"
박인강은 손목의 시계를 슬쩍 확인하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3분 남았어."
"뭐라고?"
"의학적 관찰 시간. 보호자의 결정이 확고한지 확인해야 해."
ICU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가늘고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벽을 뚫고 귀에 꽂히는 듯했다.
거대한 공포가 몰려와 그녀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박인강… 미친 거 아니야?!"
그녀가 몸을 일으켜 ICU로 뛰어가려는 순간, 그는 단번에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힘은 세지 않았지만, 마치 환자의 불안을 제지하듯 이상하게 벗어날 수 없었다.
"김소진, 진정해. 3분 후면 전부 정상으로 돌아갈 거야."
그 다음의 시간 동안, 김소진이 울부짖고, 매달리고, 욕설까지 퍼부어도 그는 손목의 시계만 차분히 바라볼 뿐, 단 하나의 동정적인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띵.
박인강이 의용 시계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관찰 종료."
ICU 안에서 다시 "삐… 삐…" 장비 작동음이 살아났다.
그 소리는 김소진에게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다.
그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무너져 무릎을 세게 부딪혔지만, 아픈지도 느끼지 못했다.
벽을 짚으며 비틀거리며 일어난 뒤, 한 발 한 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그녀 쪽으로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전속력으로 뛰어 들어왔다.
"심정지! 빨리!"
김소진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ICU 문이 튀어 열렸고, 그 순간 그녀의 시선과 아버지의 눈길이 서로 닿았다.
입술이 시퍼렇게 질린 채, 아버지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소진의 눈물이 주르르 흐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박인강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병원 특유의 온화한 억양이었다.
"김소진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은 이미 결정됐어요."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정당한 의료 자원 배분이에요. 지금은 당신이 가장 시급합니다."
그는 여전히 침착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바로 갈게요."
김소진은 울다가…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사람이었다.
사랑 고백할 때는 "너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고, 결혼식에서는 "평생 너를 지키겠다"고 했던 그 남자.
아버지의 심폐소생은 무려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김소진은 초췌한 얼굴로 응급실 앞에 서서, 그동안 한 번도 눌러보지 못한 번호를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저희 아버지, 인공 조혈줄기 세포 이식으로 변경 신청하고 싶어요."
"이주 절차에 일주일 걸린다고요? 좋아요. 일주일 뒤에 출국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