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최강원이 타협을 했다고?
최강원이 휴대전화를 던진 그 순간, 사실상 김한세와의 협상은 끝난 셈이었다.
김한세는 이후 최강원한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손우석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한세가 문아영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네가 투자자면 김한세는 네 비위를 맞춰야 하는 거잖아. 만약에 네가 작가나 대본과 의견 충돌이 있다 하더라도 그땐 작가가 나가는 게 맞는 거지. 투자자를 바꾸는 게 어디 있어?”
손우석의 관점에서는 김한세가 최강원에게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문아영이 정말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김한세가 문아영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거나.
상사와 부하 관계가 아니라, 남자로서 문아영을 여자로 보고 보호해 주려 한 거 일수도?
최강원은 차가운 눈길로 손우석을 바라보며 조용히 술병을 집어 술을 한 잔 따랐다.
그는 이미 김한세가 문아영에 대해 남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김한세가 투자자인 자신에게까지 날을 세우며 문아영을 지키려 할 줄 몰랐다.
손우석은 최강원이 술을 계속 들이키는 것을 보고, 웨이터보고 아예 술을 치우라고 지시했다. 괜히 술을 더 마시다 그의 위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곁에서 그를 정성껏 돌봐줄 사람도 없었다.
지금 최강원 옆에 김예지가 있긴 했지만, 김예지는 스스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고고한 삶을 즐기는 여자일 뿐, 그를 제대로 돌볼 리 없었다.
겉보기엔 김예지가 반쯤 은퇴한 상태로 손수 요리를 하며 ‘현모양처’ 이미지를 쌓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가식적인 쇼일 뿐이었다.
세세한 부분만 봐도 김예지가 최강원에게 얼마나 성의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문아영이 최강원과 결혼했을 때도 처음엔 요리를 전혀 못했지만, 최강원의 위가 안 좋아지자 스스로 요리를 배워 매일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김예지는?
손우석은 그녀가 단지 겉멋으로 SNS에 사진을 올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음식이 제대로 된 맛이 날지도 그녀만 아는 노릇이고.
손우석은 최강원처럼 명민한 사람이 김예지의 이런 허세를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최강원은 그냥 김예지의 외모만 좋아하는 거였거나.
김예지의 외모와 몸매는 많은 여성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편이었다. 최강원이 단순히 그녀의 외모와 몸매에 끌린 것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의 본능이란 어쩔 수 없지.
손우석은 최강원의 불쾌한 표정을 한 번 흘긋 보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문아영이 오늘 꽤나 화려한 밤을 보냈다는 것이다. 인기 절정의 신인 배우가 찾아오고, 노련한 톱배우가 은근히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최강원은 이런 상황을 보며 아직도 문아영이 자신을 유혹하려 한다고 생각할까?
한편, 문아영은 박정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둘은 술을 꽤나 마셨지만, 아침이 되자 문아영은 멀쩡히 일어나 박정인을 위해 푸짐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박정인은 음식을 먹으며 감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최강원의 덕을 본 것도 있는 것 같아. 최강원이 널 떠난 덕분에 나도 이렇게 네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거잖아. 예전에 너의 요리는 최강원만을 위한 거였는데.”
문아영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녀 자신도 최강원한테 지극정성이었던 예전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생각되었는지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박정인은 다시 물었다.
“정말 이번 대본에서 손을 뗄 거야?”
문아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조 섞인 슬픔을 담아 말했다.
“실연과 이혼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데 1년이나 걸렸어. 그 사람들과 관련된 것들은 다 악몽 같아. 그들을 보면 과거의 비참했던 내 모습이 떠오르고,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싫어.”
“그러니까 나가는 게 맞아. 그 사람과 얽히지 않으면 내 마음도 괴롭지 않으니까.”
처음에 문아영이 최강원이 투자한 것을 알고도 각본을 맡았던 건 그한테 선을 긋고 공적으로만 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반부터 이런저런 문제가 터졌고, 그녀가 아무리 선을 그으려고 해도 김예지 쪽에서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박정인은 문아영의 손을 꼭 잡았다.
“난 네 결정을 응원해.”
아침 식사를 막 끝냈을 때, 문아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김한세의 문자였다.
“유진 엔터에서 연락이 왔어요. 대본 수정은 필요 없고, 현재 내용 그대로 진행하겠대요. 그리고 엔터 쪽 책임자도 최강원 씨의 비서 이영지 씨로 바뀌었어요. 그러니 아영 씨는 앞으로는 대본 작성에만 집중하면 될 것 같아요.”
문아영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있다가, 대본을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젯밤 김예지가 그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최강원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당연히 대본을 바꾸라고 할 줄 알았다.
게다가 유진 엔터 쪽 책임자는 왜 갑자기 바뀐 거지?
문아영이 최강원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한 건 맞지만, 누가 이렇게 꼭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날 배려해 준 걸까?
그녀는 얼른 김한세한테 전화를 걸었다.
김한세는 숨김없이 설명했다.
“아영 씨가 최강원 씨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느껴서, 어젯밤에 제가 최강원 회장님한테 직접 얘기했어요. 아영 씨가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고 다른 작가를 찾든지, 아니면 최강원 씨 쪽에서 책임자를 바꾸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문아영은 감탄했다. 김한세는 정말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직장 상사로서 김한세의 이런 배려는 그녀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김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문아영은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최강원처럼 자존심 강한 사람이 이번엔 의견을 굽히고 들어갔다는 사실에 놀랐다.
김한세는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별일 아니에요. 내가 이런 요구를 했던 건 아영 씨가 쓴 대본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최강원 씨와 관계가 틀어진다 해도 다른 투자자를 충분히 찾을 수 있거든요.”
김한세가 그녀의 대본을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하니, 문아영은 감격해서 순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이 대본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김 대표님이 나에 대한 신뢰와 감사에 보답할 수 있어.
김한세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서둘러 대본을 작성하라고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문아영은 너무 기뻐서 박정인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환호했다.
각본을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너무 좋은 일이야. 더 이상 최강원을 볼 필요도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갑자기 문아영한테 끌어안긴 박정인은 중얼거리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최강원이 그런 사람이었나? 최강원이 이번엔 이렇게 쉽게 의견을 굽혔다고? 믿을 수가 없네.”
박정인은 연예계에서 활동하면서 최강원과 접촉한 적이 적잖이 있었다.
유진 엔터는 최 씨 그룹 비즈니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약한 사업이긴 하지만, 최강원이 유진 엔터에서도 얼마나 강압적인 태도인지는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최강원이 주도하며, 다른 사람은 그저 그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최강원이 이번에는 김한세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굽혔다는 게 놀라웠다. 아니, 어쩌면 문아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강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박정인은 곧바로 촬영을 위해 외출했고, 문아영도 택시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젯밤엔 그녀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준도 자리를 떠났었다.
그의 회사가 방법을 써서 팬들을 따돌린 덕에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들었다.
문아영은 이준한테 다시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이젠 진짜 대본 작업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준은 그가 가져왔던 과자와 간식이 가득 담긴 큰 가방을 그녀의 집에 남기고 갔는데 그 안에는 상처에 바르는 연고도 들어 있었다.
문아영은 자신의 팔에 난 상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준, 나이는 어리지만, 꽤나 세심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