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이 개같은 성질은 누구한테서 배운 걸까?
“시간도 늦었으니, 인제 그만 돌아가서 쉬어.”
김예지의 사과에 대해 최강원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를 용서하겠다는 말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김예지는 이를 악물며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문아영은 최 씨 저택을 떠난 뒤 택시를 타고 박정인의 집으로 갔다. 그녀가 떠날 때 이준은 여전히 그녀의 집에 있었는데, 지금쯤 떠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정인이 얼굴에 팩을 한 채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미리 와인 한 병을 따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아영은 박정인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박정인이 준비해 준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카펫 위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오늘 밤 겪은 일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박정인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얼굴의 팩을 확 벗겨내며 박수를 쳤다.
“와! 속이 다 시원하네!”
“김예지 그 불여시 년을 완전히 참교육했어!”
박정인은 문아영이 김예지에게 몰래 괴롭힘을 당했던 일을 너무 많이 봐왔기에, 이번에 김예지가 문아영 앞에서 찍소리도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아주 통쾌했다.
문아영도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진짜 속이 다 풀리는 기분이야.”
예전에 그녀가 최강원과 김예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 오늘 김예지도 그 감정을 똑같게 돌려받았을 것이다.
당시 김예지가 자신을 얼마나 차갑게 조롱하며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오늘 김예지도 그 기분을 똑똑히 느꼈을 것이다.
박정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드라마를 핑계로 최강원과 일부러 가까워져서 김예지를 더 화나게 만드는 건 어때? 그리고 최강원을 꼬신 다음 그를 매정하게 차버리는 거야. 네가 당했던 만큼 그에게 똑같이 복수하는 거지!”
“……”
그녀는 이내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 그들 둘 다 나한테 정말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최강원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뿐이야.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고. 그저 내가 그걸 깨닫지 못한 채 몇 년 동안 최강원한테 집착했던 거야. 잘못한 건 나 자신이지. 내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어서 내가 진심으로 대하면 그의 진심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어.”
문아영의 말에 박정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아영이 그와의 관계에서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문아영에게 다가가 안아주며 위로했다.
하지만 문아영은 크게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박정인과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래서 나랑 최강원은 그냥 이혼한 거, 그걸로 끝난 사이인 거야. 내가 순진했건, 어리석었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지.”
그렇게 말한 후, 문아영은 잔에 남은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한때 그녀도 최강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원망했었다. 그러나 지금 뒤돌아보면, 사실 그한텐 잘못이 없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니니까.
두 사람은 와인잔을 몇 번 기울이다가 박정인이 갑자기 문아영한테 물었다.
“그런데 최강원이 왜 오늘 갑자기 너를 불러서 대본 얘기를 하자고 한 거야?”
문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박정인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최강원이 혹시 이준의 뉴스를 본 거 아니야? 네가 이준이랑 늦은 밤 동안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둘 사이에 뭔가 감정이 생겼을까 봐 핑계를 대서 너를 불러냈을 수도?”
문아영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이준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최강원이 왜 걱정하겠어? 걘 오히려 내가 빨리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길 바랄걸?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다시 얽매지 않을 테니까.”
“최강원이 대본 얘기하자고 날 부른 건, 아마 날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랬을 거야. 그 사람은 날 싫어하는 것 같아. 내가 잘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지.”
문아영은 최강원이 분명 이런 마음일 거라고 생각하고 단정 지었다.
최강원은 예전부터 문아영한테 너무 차갑게 대했기에, 그녀는 그가 자신을 매우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비록 부부는 아니지만 여전히 자신을 싫어하고 있어서 이렇게 괴롭히려는 거라고 여겼다.
박정인은 문아영을 걱정하며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너희 드라마 이제 막 시작했잖아.”
문아영도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애초에 이 드라마를 맡지 말았어야 했던 걸지도 몰라. 그와는 조금도 엮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때 김한세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최강원과의 미팅 결과를 물었다.
문아영은 사실대로 말했다.
“김 대표님, 오늘 좀 사정이 생겨서 최 회장님과의 협상에 성공하지 못했어요.”
김한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문아영은 최강원이 그녀에게 휴지로 옷을 닦아주다 김예지에게 들켜 큰 소란이 벌어진 일을 김한세한테 말할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로 그녀의 처지는 몹시 곤란해졌다. 마치 그녀가 김예지와 최강원의 관계를 망치려는 파렴치한 내연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아영은 말을 신중히 골라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생각해 보니까… 저와 최 회장님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고려했을 때, 제가 이 대본을 맡는 게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혹시 다른 적합한 인물이 있다면, 대본에 대한 구상을 넘기고 물러나겠습니다.”
김한세는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프로젝트에서 빠지겠다는 거군요?”
“그런 셈이죠.”
문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처음에는 단지 이번 일이 피곤하게 됐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자신이 내연녀가 될 뻔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 부담감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결국, 그녀는 물러나야 할 것 같다고 결심했다.
어쨌든 최강원과 김예지의 결혼 소식은 온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녀, 즉 전 부인이 다시 최강원과 얽히는 건 부적절한 일이었다.
“알겠어요.”
김한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편, 최강원은 그때 손우석의 바에 있었다.
김예지를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여기로 왔는데, 저녁 내내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밥을 먹지 못했다.
그래서 손우석은 그를 위해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손우석은 그들의 룸으로 술을 가져오게 했지만, 그건 최강원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최강원에게는 술을 권할 생각이 없었다.
최강원은 손우석이 술을 한쪽으로 치우는 걸 보고 짜증이 났다. 술 한잔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손우석은 천천히 말했다.
“문아영이 돌아온 걸 보고 나서야 네 위가 술을 못 견딘다는 게 기억이 나더라.”
최강원의 위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손우석을 포함해 다들 알고 있었다.
문아영과 결혼한 3년 동안 그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고, 그 덕분에 위장도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사람들은 최강원이 위장이 좋지 않다는 걸 거의 잊고 있었다.
손우석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지난 1년 동안 널 데리고 술을 많이 마셨네. 미안하다.”
최강원은 이미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손우석이 갑자기 문아영 얘기를, 그것도 그녀가 자기를 챙겨줬던 내용을 언급하자 더욱 기분이 상했다.
오늘 밤에 그 난리를 쳤으니, 최강원은 본능적으로 문아영이 큰 상처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김한세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최강원이 들은 것은 김한세의 냉정한 목소리였다.
“최 회장님, 오늘 밤 당신과 문아영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프로젝트 협업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최강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죠?”
김한세는 덧붙였다.
“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려면 문아영 씨가 이 프로젝트에서 빠지거나, 아니면 당신 쪽에서 이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을 교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명백히 최강원 보고 빠져달라는 소리였다.
최강원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빠지겠다고 했나요?”
김한세는 사실대로 말했다.
“네.”
최강원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든 휴대전화를 던져버렸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바로 그만두겠다고 하는 이 개같은 성질은 누구한테서 배운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