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신지아는 집에 가기 싫었지만, 신동철이 외할머니가 남긴 집 문제를 이야기하자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신지아의 길고 억압된 어린 시절, 그녀를 비춰준 유일한 빛이 있었다.
다들 그녀가 이모를 죽게 했고 윤세라에게 빚을 졌다고 했지만, 외할머니만은 유일하게 어린 지아에게 무조건적인 양보를 강요하지 않았었다.
"사고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거야. 넌 그냥 어린애잖아. 그 어린 어깨에 사람 목숨 짊어지게 하는 거 아니다."
그녀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외할머니의 작은 마당은 십여 년간 지아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도피처였다.
가족들의 죄책감이 날이 갈수록 편애로 변질되는 걸 보면서, 외할머니는 오히려 지아를 더 안쓰러워했다.
어쩌면 지아가 언젠가 폭발할 날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훗날 가족들과 연을 끊을 때를 대비해 퇴로를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걸까. 외할머니는 생전에 사람들 앞에서 그 집은 지아에게 주겠다고 공언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유언장을 남기지 못했고, 현재 집 명의는 엄마 윤정희에게 있었다.
원래는 지아가 결혼할 때 혼수 명목으로 넘겨줄 계획이었다.
"아가씨."
문을 열어주던 가정부는 신지아를 보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늦게 들어와서 일하기 시작했을 땐 신지아가 이미 성인이 되어 집을 나간 후였기에, 한동안은 부부 금슬이 좋아서 딸이 엄마 성을 따른 줄 알고 윤세라가 친딸인 줄 알았었다.
신지아가 처음 집에 왔을 때, 돈 꾸러 온 가난한 친척인 줄 알고 막 대하다가 집사한테 엄청 깨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신씨 가족들이 평소에 이 둘째 딸 얘기를 거의 안 하니, 갓 성인 된 딸이 나가사는데 걱정도 안 하고 언급도 안 하는 집이 어딨나 싶어 오해할 만도 했다.
그녀는 이 찬밥 신세 아가씨를 다시 쳐다보았다.
사실 외모만 보면 지아 아가씨가 훨씬 신씨 집안사람다웠다.
식구들 물이 다 좋긴 하지만 신지아는 부모님의 장점만 쏙 빼닮았다. 악녀라는 소문만 아니었으면 그 미모가 훨씬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오히려 윤세라 아가씨도 미인이긴 하지만 지아 아가씨 옆에 서면 바로 묻혀버렸다. 마치 반딧불이랑 보름달 같달까. 그래서인지 둘이 같이 있는 꼴을 잘 못 봤다.
하지만 지아 아가씨의 저 살벌한 기세를 보니,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늘 저녁 밥상머리도 조용히 넘어가긴 글렀구나.
...
신지아가 들어오자 윤정희가 먼저 일어났다.
"지아 왔니? 어서 와, 오늘 네가 좋아하는 등갈비찜 했다."
신지아는 식탁을 힐끗 보더니 차갑게 대꾸했다.
"착각하셨네요. 갈비찜 좋아하는 건 윤세라죠."
그녀는 매운 걸 좋아했다. 어릴 땐 고추 없으면 밥을 못 먹을 정도라, 아빠랑 오빠가 장난친다고 매운 거 먹여놓고 맵다고 헥헥거리면 웃으면서 우유 주고 하다가 엄마한테 등짝 맞고 그랬는데.
윤세라가 온 뒤로는 미숙아라 몸 약하다고 식단 관리해야 한다며, 신씨 집안 식탁은 풀밭에 밍밍한 국물 천지가 되었다.
윤정희의 표정이 찰나 굳어졌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반찬 많으니까. 입에 안 맞으면 주방에 다시 해달라고 하면 돼."
신지아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식탁 의자에 털썩 앉으며 신동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할머니 집 얘기하신다면서요. 본론만 하죠."
신동철이 인상을 썼다.
"밥 먹고 얘기해. 오자마자 빚쟁이처럼 구는 거 보기 안 좋다."
신지아는 입을 다물었다.
"어? 너 자리 잘못 앉았다."
방금 게임 끝내고 내려오던 신재민이 지적했다.
"거기 누나 자리야."
신씨네 식탁은 보통 부모님이 한쪽, 자녀 셋이 한쪽에 앉는데, 윤세라가 신재원과 신재민 사이에 앉았다. 그 자리는 원래 꼬마 지아의 지정석이었지만, 6살 이후로는 뺏긴 자리였다.
"우리 집에 언제부터 자리에 이름표 붙어 있었나? 내가 앉고 싶으면 앉는 거지."
"됐어, 자리 하나 가지고 뭘. 지아 앉으라고 해."
윤세라가 웃으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신재민은 신지아를 째려보며 뭐라 하려다, 경찰서에서 다쳤다는 얘기 들은 게 생각나서 찜찜한 듯 흥 하고 제 자리에 앉았다.
동생이 꼬리를 내리자 윤세라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들이 신지아에게 미안해하는 타이밍이라 나설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불쾌함을 억지로 눌렀다.
친동생이고 방금 오해도 했으니, 신재원도 별거 아닌 걸로 지아랑 싸우고 싶지 않았다. 윤세라가 끝자리에 앉으려 하자 그가 말했다.
"세라야, 나랑 자리 바꾸자."
"아니에요," 윤정희가 바로 가정부를 불렀다.
"아가씨 의자 내 옆으로 옮겨."
신지아를 구석에 처박아둘 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더니, 윤세라가 구석에 앉게 생기니까 무슨 대단한 핍박이라도 받는 양 온 가족이 나서서 길을 터준다.
신지아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신재민이 고소하다는 듯 쳐다볼 때,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신재원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난 여기가 좋네."
자리는 신지아-신재원-신재민 순서가 되었다.
신재민이 눈을 부라렸다.
"너 뭐 하냐?"
신지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면 몰라? 너랑 너무 가까이 앉으면 뇌 없는 거 옮을까 봐 그러지."
"야! 신지아!!!" 신재민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만해라, 다 큰 것들이 애들처럼." 윤정희가 둘을 나무랐다.
오랜만에 남매끼리 티격태격하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정겨워서, 그녀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지아, 상처는 어떠니? 많이 아파? 밥 먹고 의사 선생님 불러줄까?"
신동철도 표정을 풀었다.
"이참에 집으로 들어와. 집에 사람도 많으니까 간호받기도 편하잖아."
신재원이랑 신재민도 부모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고, 신재민은 기대하는 눈빛까지 보냈다.
눈앞의 이 사람들, 하나같이 진심 어린 표정에 정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신지아는 이 장면이 너무나 익숙했다.
항상 똑같다. 뺨 한 대 때리고 사탕 하나 물려주는 식. 그 쥐꼬리만한 온정으로 희망 고문하면서, 끊어내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음번에 윤세라랑 또 부딪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차 없이 등 돌리고 손가락질하겠지.
이 순간의 가족애가 역겨울 만큼 싸구려로 느껴졌다.
윤세라도 그녀를 보며 온화하게 웃었지만, 눈빛은 도발적이었다.
"맞아 지아, 여기가 네 집이잖아. 우린 다 가족인데, 앙금 같은 거 갖지 말자."
그녀가 '네 집'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신지아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훗."
신지아가 눈을 반달처럼 휘며 웃었다.
"앙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러분 뭐 잊으신 거 없어요?"
"뭐?" 신재민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청부 살인 누명. 그거 되게 무거운 거거든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꽂혔다.
"내가 끝까지 경찰 부른 덕에 살았지, 안 그랬으면 살인자 낙인 평생 달고 살 뻔했는데. 이거 사과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퉁치고 넘어가는 거, 그건 내 스타일 아니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