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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태자와의 계약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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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평점

개요

여섯 살 이전의 신지아는 온 집안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자라난, 신씨 가문에서 가장 눈부신 작은 공주. 하지만 여섯 살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말수는 줄었고, 웃음은 사라졌으며, 어느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죄인이라고 불렀다. "신지아, 너는 평생 윤세라에게 속죄하며 살아야 해." 어린 지아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이후로, 자신을 사랑해주던 부모도, 믿고 의지하던 오빠도, 늘 곁에 있던 동생도 더 이상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세상을 뒤덮은 비난 속에서도, 단 한 사람만은 늘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 묵묵히, 흔들림 없이 그녀를 지켜주던 그 소년. 신지아는 믿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강민우만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듣고 말았다. 윤세라를 안은 채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지아? 그냥 여동생일 뿐이야. 난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 20년을 함께 의지해 온 시간은 한순간에 허상이 되어 무너졌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라면, 차라리 모두 흩어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족도, 사랑도, 친구도. 이제 그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녀가 스스로를 사랑하면 그만이었다. 강민우는 신지아가 평생 자신의 뒤를 따를 거라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뒤돌아본 순간, 스무 해 동안 지켜온 그 소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예전처럼 밝게 웃고, 마음껏 투정을 부리며, 누구보다 눈부시게 빛나면서. 뒤늦게 그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 "지아야, 돌아와." 하지만 신지아는 이미 다른 자리에서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돌아오라고?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현대물여주인공복수각성사이다

제1화

"쾅—!"

육중한 룸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사색이 되어 안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세라 누나한테 무슨 일 생겼대요!"

이 한마디에 꽃과 리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 안, 프러포즈로 인해 따뜻하고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 반지를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파란 머리를 한 진호영이 다급하게 재촉했다.

"방금 윤 사모님이 전화하셨는데, 누나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병원에 있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의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과장이 아니라, 윤세라는 모든 사람의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 얼굴 예쁘고 마음씨 착한 데다 재능까지 넘치는데, 몸까지 약하니 보호 본능을 자극할 수밖에.

그런 여신에게 변고가 생겼다니, 결말이 뻔한 프러포즈 따위를 계속 지켜볼 한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라, 남자 주인공조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가려 하지 않는가.

"강민우."

그때, 등 뒤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서늘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프러포즈를 받던 여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급하게 나가다 건드렸는지 조명 스위치가 꺼지면서, 환하던 실내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희미한 간접 조명만이 남은 공간, 구석에 홀로 남겨진 신지아의 얼굴이 명암 속에 반쯤 드러났다. 언제 봐도 숨이 멎을 만큼 압도적인 미모였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내 대답, 안 궁금해?"

방금 전까지 강민우는 "나랑 결혼해 줄래?"라고 물었었다.

강민우는 문가에 우뚝 멈춰 섰다. 윤세라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약혼녀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못 했다는 걸 그제야 자각한 듯했다.

그는 대답 대신,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달랬다.

"지아야, 미안해. 나 먼저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넌 먼저 들어가 있어."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강민우, 너 내가 걔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 알잖아."

강민우가 난처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지아, 지금 억지 부릴 때가 아니잖아."

"내 대답,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신지아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강민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일까. 오늘의 신지아는 평소와 뭔가 달랐다.

평소 그녀의 불같은 성격이라면 윤세라 소식을 듣자마자 난리를 피우며 "왜 아직도 살아있대?"라고 악담을 퍼부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의 그녀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마치 이 마치 이 난리가 날 줄 알았다는 듯, 반대하는 목소리조차 건조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참나, 웬 청승이야?"

파란 머리의 진호영이 짜증스럽게 비아냥거렸다.

"네가 민우 형 꽁무니만 20년 동안 쫓아다닌 거 여기 모르는 사람이 어딨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서 죽고 못 살았잖아. 오늘 형이 프러포즈해서 입이 귀에 걸렸을 텐데 거절은 무슨 개뿔."

주변에서도 덩달아 거들었다.

"맞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프러포즈야 나중에 다시 하면 되지."

"어차피 두 집안끼리 혼사는 다 정해진 거고, 오늘 쇼는 그냥 형식적인 거 아니었어?"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비난에도 신지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강민우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강민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늘 그랬듯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지, 그만해. 세라가 위험할 수도 있어. 지금은 네가 이해해 줘야지."

마치 윤세라와 싸울 때마다 전후 사정도 묻지 않고 윤세라에게 먼저 사과한 뒤, 길길이 날뛰는 그녀를 붙잡고 타이르던 때와 똑같았다. 그에게 신지아는 영원히 철없는 어린애였다.

관계의 우위를 점한 사람은 상대의 분노조차 그저 귀여운 투정으로 치부해 버린다. 정작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들여다보려 하지 않은 채.

강민우에게 이 프러포즈는 그저 요식 행위일 뿐,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오, 씨발! 진짜 더는 못 참겠네!"

신지아 뒤에 서 있던 한유진이 참다못해 폭발했다. 진호영이 쳐들어왔을 때부터 부글부글 끓던 속이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야, 강민우. 네가 의사냐? 아니면 무슨 마법사라도 돼? 왜 윤세라한테 무슨 일만 생기면 널 찾냐고! 그리고 타이밍은 왜 맨날 이따위야? 저번엔 데이트, 이번엔 프러포즈! 그 년은 몇 분을 못 기다려서 뒤진대?"

신지아의 절친으로서 그녀 역시 이 이벤트를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했었다.

그런데 다 된 밥에 또 윤세라라는 재를 뿌리다니.

그리고 강민우 저 개자식! 윤세라 때문에 지아를 내팽개친 게 도대체 몇 번째란 말인가!

눈이 뒤집힌 한유진은 닥치는 대로 독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니들도 그래!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서 뭐 어쩌려고? 병문안 가는 거야, 아니면 육개장 먹으러 가냐? 윤세라 걔 병원 들락거린 횟수만 따지면 부조금만 수백 번은 냈겠다!"

"한유진!"

늘 신사적인 척하던 강민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말 조심해!"

"지랄!"

한유진은 윤세라를 감싸고도는 저 쓰레기를 보며 기가 막혀 했다.

"윤세라 욕먹는 건 그렇게 못 참으면서, 강민우 넌 네 여자 친구가 누군지 기억은 하냐?"

강민우의 표정이 더욱 살벌해지자, 신지아는 한유진의 팔을 잡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늘 밤 네가 가면, 우린 끝이야."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강민우는 미간을 좁히며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달래듯 혹은 약속하듯 말했다.

"홧김에 그런 말 하지 마, 지아야. 갔다 와서 얘기해."

말을 마친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세라가 많이 다친 건 아닐까?'

돌아오면 지아에게 더 완벽한 프러포즈로 보상해 주면 될 일이다.

물론 지아에게도 따끔하게 충고해야겠다. 성격 파탄자인 한유진이랑 어울리지 말라고. 지아가 나쁜 물이 든 게 분명하니까.

방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신지아의 억지와 한유진의 폭언이 거슬리긴 했지만, 하나는 강민우의 미래 아내고 하나는 한씨 집안 사람이니 누구도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쥐새끼처럼 빠져나갔다.

불과 몇 분 만에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은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바닥에 짓이겨진 꽃잎과 엉킨 리본, 나뒹구는 와인 병, 넘어진 의자...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남녀 주인공들.

이 흐지부지된 프러포즈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멀어지는 사람들 틈에서 눈치 없이 구경 왔던 누군가가 뒤늦게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어? 근데 사고 났다는 윤세라, 신지아네 집안 양녀 아니야? 듣기로는 둘이 이종사촌이라던데, 왜 다들 병원 가면서 쟤는 안 데려가?"

"허, 쟤를 부른다고? 세라 누나 혈압 올려서 쇼크 오게 할 일 있어?"

"엉? 뭐 있어?"

"우리 신지아 씨가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표독스러운지 얘기하려면 오늘 밤새워야 할 걸..."

악의에 찬 뒷담화와 조롱은 지난 십여 년간 그랬듯, 신지아와 윤세라의 이름이 동시에 거론될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공기 중에는 사정을 잘 모르는 구경꾼들이 '비운의 여신' 윤세라를 동정하는 소리와, '악녀' 신지아를 비난하는 소리가 웅성거렸다.

한유진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분노하며, 유난히 침묵하는 신지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남들의 헛소문은 이제 그녀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는 고통은 여전히 뼈아팠다.

신지아는 강민우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지난 세월 동안 그토록 살가웠던 소꿉친구가 어떻게 조금씩 등을 돌리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다시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유진은 물었다. 만약 오늘 사고가 없었다면 정말로 강민우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을 거냐고.

하지만 대답이 무엇이든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윤세라는 신지아가 행복해지는 꼴을 절대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강민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신지아를 위해 윤세라를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그가 등을 돌린 순간, 그는 몰랐을 것이다.

미래의 날들은 길게 남았을지 몰라도, 그를 기다려주던 여자의 시간은 오늘로 끝났다는 것을.

'강민우, 이번엔 정말로 널 놓아줄게...'

난장판이 된 테이블 위, 신지아의 휴대폰 화면이 징- 하고 울렸다.

짧은 메시지 하나. 확신과 비릿한 승리감이 담긴 세 글자였다.

[네가 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