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낮 당직은 다른 팀이었다.
신고자가 용의자 본인이라는 말을 듣고 경찰들은 잠시 뇌 정지가 왔다. 아직 꿈을 꾸나 싶었다.
보통 제 발로 경찰서에 와서 결백을 주장하는 경우는 뒷배 빵빵한 범죄자거나, 아니면 진짜 억울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다.
저 아가씨의 담담한 얼굴을 보니 경찰들의 마음속 저울은 이미 기울었다.
후자 쪽으로.
하지만 피해자 가족들이 펄펄 뛰니 일단 수사는 해야 했다.
알고 보니 피해자와 용의자가 한 가족인데, 떠받들여지는 쪽은 양녀고, 혼자 덩그러니 서서 결백을 주장하는 쪽이 친딸이란다.
조서를 꾸미던 여경은 족보가 꼬이는 상황에 표정이 묘해졌다.
'와, 대박. 아까 그 형제들, 한 명은 냉혈한이고 한 명은 길길이 날뛰던데, 누가 봐도 저쪽이 원수지 가족이냐고.'
심문을 계속해 보니, 용의자의 범행 동기가 어릴 때부터 의붓언니를 질투했고 남자 친구를 뺏겼다고 오해해서란다.
여경은 콜록대며 창백한 척하는 여자에게 약 주고 물 주고 담요까지 덮어주며 알뜰살뜰 챙기는 어떤 남자를 슬쩍 쳐다보며 경멸의 눈빛을 쏘았다.
'저 지랄을 하는데 오해 안 하는 게 보살이지.'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껴안고 있는데, 침대에서 뒹구는 거라도 잡아야 인정할 셈인가?
묵묵히 조사에 임하는 신지아를 보며 젊은 여경의 동정심이 폭발했다.
눈이 마주치자 신지아가 피식 웃었다.
그 미소에 여경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꺄악, 언니 날 가져요!'
저렇게 예쁜 동생이 살인이라니 말도 안 되지. 저 사랑받는 여우를 보니 이건 뭐 현실판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하지만 개인 감정이 수사에 영향을 줄 순 없는 법.
여경은 신지아에게 따뜻한 차 한 잔과 아껴둔 초콜릿을 슬쩍 건넸다.
아까 집사가 아침 도시락 싸 왔을 때 신지아 것만 쏙 빼놓고 온 걸 봤기 때문이다.
차별이 아주 생활화가 됐구만.
이 사건은 피해자 부상이 경미하고 처벌 불원 의사가 확실해서 합의로 끝날 분위기였지만, 청부 살인은 중대 범죄라 경찰서 분위기는 신중했다.
사실 범인 잡는 건 간단했다. 뺑소니범을 조지면 되니까.
그는 확실히 돈을 받았다.
하지만 배후는 신지아가 아니라 뜻밖의 인물이었다.
김민지. 신지아와 윤세라의 고교 동창.
김민지와 윤세라는 같은 무용단 소속으로 경쟁 관계였다.
그녀의 진술에 따르면, 윤세라에게 가벼운 부상을 입혀 주역 자리를 뺏으려 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매 사이가 나쁜 걸 알고 있었고 고등학교 때 신지아에게 당한 적도 있어서, 이참에 일타이피로 신지아에게 뒤집어씌울 계략을 짰다는 것이다.
들통나더라도 윤세라가 신지아 봐서 일을 크게 키우지 않을 테니, 신지아가 사주했다고 덮어씌우면 끝날 줄 알았다고 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신지아가 억울한 건 죽어도 못 참는 성격일 줄은.
이 일로 김민지의 무용 인생은 끝장이 났다.
하지만 윤세라가 많이 다치지 않았고 운전기사 사정을 딱하게 여겨 합의해 주면서, 기사와 김민지 모두 큰 처벌은 면했다.
김민지는 담담했다.
무용을 못 하게 된 건 아쉽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돈 벌려고 춤춘 거였고 이번 일로 입막음 비용을 두둑이 챙겼으니 그걸로 됐다.
신지아와 스쳐 지나갈 때,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결백은 증명했을지 몰라도, 네가 진짜 이겼을까?'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윤세라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김민지는 비소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면 뭐 하나, 신지아 너나 나나 불쌍한 건 매한가지인데.
진실이 밝혀지자 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침에 뺨 때린 게 생각나서 신동철은 좀 찔렸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또 비난이었다.
"네가 평소에 친구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다녔으면, 남들이 널 이용해서 세라를 해칠 생각을 하겠냐?"
신지아는 기가 찼다.
"아, 네. 그 논리라면 쟤 머리카락 한 올 빠져도 제가 옆에서 숨 쉬어서 바람 불어 그런 거라고 하시겠네요? 그렇게 연약하면 온실에 가둬놓고 키우시지 그러세요? 매일 향 피우고 제사도 좀 지내주시고."
"이게 말이면 단 줄 알아? 또 언니한테 악담을 해!"
신동철이 손을 치켜들었다.
"어허! 경찰서에서 폭력 쓰시면 안 됩니다!"
아까 그 여경이 소리쳤다.
윤세라가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해대자 윤정희는 안쓰러워하며 남편과 자식들을 흘겨보았다.
"세라 몸도 안 좋은데 아침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야. 지아, 넌 언제 철들래?"
신재원도 인상을 썼다.
"아니면 아니라고 좋게 말하면 되지, 꼭 이렇게 경찰서까지 와서 집안 망신을 시켜야 하냐?"
신재민이 입을 삐죽거렸다.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 관심받고 싶어서 환장한 거지, 뭐."
온 가족의 비난에도 신지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미 수천 번도 더 겪은 일이었다.
그녀는 눈을 까뒤집었다.
"네네, 제가 관심종자에 악녀입니다. 그래도 전 최소한 사람 구실은 하거든요? 여기 계신 분들처럼 사람 탈 쓰고 개소리하거나, 뇌는 장식품이고 눈은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진 않아요. 사실을 앞에 두고도 마음이 시궁창이라 생각이 안드로메다로 가는 분들과는 차원이 다르죠."
"푸흡—"
경찰들이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친딸이 누명 쓰고 감방 갈 뻔했는데, 양녀 걱정만 하는 꼴이라니.
신지아의 말빨이 세긴 했지만, 여경은 더 이상 이 막장 드라마를 볼 수가 없어서 나섰다. 미소를 지으며 신지아를 보았다.
"신지아 씨, 혐의 벗으셨으니까 귀가하셔도 됩니다. 윤세라 씨는 피해자시니까 조사가 좀 더 필요하고요."
신지아도 더 이상 엮이기 싫어 고맙다고 인사한 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강민우가 따라가려는데 윤세라가 현기증이 난 듯 비틀거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윤정희가 불렀다.
"지아, 어디 가? 너랑 민우 약혼식 한 달도 안 남았어. 당분간 집에 들어와 있어."
하객이나 음식은 자기들이 정해도, 드레스는 직접 입어봐야 할 거 아닌가.
약혼식이라는 말에 강민우에게 기대 있던 윤세라가 눈을 내리깔고 주먹을 꽉 쥐었다.
신지아가 뒤를 돌아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윤 여사님, 눈 크게 뜨고 지금 강민우가 누구 안고 있는지나 보세요. 나랑 저 남자 약혼식 올리는 게 맞다고 생각하세요?"
방 안 사람들의 시선이 껴안고 있는 두 남녀에게 쏠렸다.
선남선녀라 그림은 좋았지만, 형부 될 사람과 처제 될 사람의 자세로는 영 아니었다.
하지만...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신재민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누나 몸 약해서 형이 잠깐 부축해 준 거 가지고, 넌 속 좁게 그거까지 질투하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