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최도경은 오늘 밤 최씨 본가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 기분이 더러워 도중에 차에서 내려 개를 데리고 산책이나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꽤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마주쳤다.
아름답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가시 돋친 장미가, 눈치 없는 미친 개떼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그렇게 연약하고 고귀해 보이는 주제에, 돌아섰을 때의 그 독기 서린 눈빛은 그가 열 살 때 산속에서 조난당해 한 달 가까이 동거했던 어미 잃은 새끼 늑대를 떠올리게 했다.
허세를 부리며 하악질을 해대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모습.
위태롭지만 생명력만큼은 질겼고, 나중에 그 늑대는 결국 그의 손에 죽었다.
눈앞의 이 가시 돋친 장미 역시 그 발버둥 치던 새끼 늑대처럼,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있었다.
차가운 얼굴로 놈들의 팔을 우지끈 꺾어버릴 때는 감정이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최도경은 귀신에 홀린 듯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소녀는 한 번 보면 뇌리에 박힐 만큼 압도적인 미인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 맑은 눈동자가 묘하게 심장을 긁었다.
놀라서 쳐다볼 때는 마치 은하수를 쏟아부은 듯 반짝였다.
최도경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저 까만 눈동자를 손바닥으로 덮어버리고 싶은, 가학적인 충동이 일었다.
'끝까지 어울려 주지, 뭐.'
마침 그도 화풀이할 샌드백이 필요했으니까.
"아아악!"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아까는 아파서 뒹구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양아치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원래는 돈 받고 겁만 주려고 했고, 의뢰인은 "절대 눈에 띄는 상처는 내지 마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런데 여자가 너무 끝내주게 예뻐서 부하 몇 놈이 눈이 돌아가 덤벼든 것이다. 진짜 무슨 짓을 할 배짱은 없었지만, 이참에 콩고물이라도 좀 주워 먹으려 했다.
미인은 연약해 보였는데 주먹이 매서웠고, 갑자기 튀어나온 이 남자는 진짜 저승사자였다. 살인이 합법이라면 진작 목이 360도 꺾였을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했다.
'X발, 일이 너무 커졌어!'
우두머리는 오줌을 지릴 뻔했다.
한편, 남자는 널브러진 신지아의 곁으로 다시 돌아와 짓궂게 평했다.
"손은 빠른데 마음이 물러. 뿌리를 안 뽑으니까 잡초가 다시 자라지. 꼬맹아, 오늘 밤 은혜는 뭘로 갚을래?"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억지로 빚을 지게 된 신지아는 어이가 없었다.
소녀는 흙과 피투성이였지만, 어둠 속에서도 기이할 만큼 요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최도경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꼬질꼬질하네.
그는 손을 뻗어 말 한마디 없는 장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갑자기 맹렬하게 몸을 일으켜 부딪쳐오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쿵.
단단한 몸이 부드러운 감촉 위로 떨어졌다. 하필이면 신지아의 다친 팔을 눌렀고, 왼손은 더욱 위험하고 말랑한 곳에 안착했다.
너무나 낯설고 자극적인 감촉에 최도경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순간, 밑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장미같은 꼬맹이와 멍하니 눈이 마주쳤다.
이 사태의 주범이자 주인을 따라 산책 나왔다가 잊혔던 셰퍼드 '다롱이'는, 사고를 치고 나니 얌전하게 옆에 앉아 꼬리를 살랑거리며 주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신을 깔아뭉개고 있는 남자가 손까지 꼼지락거리자, 아픔과 수치심에 신지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무리 천하의 미남이라도 초면에 가슴을 만지는 변태 짓이 용서될 리 없었다. 신지아의 평온했던 표정이 점차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그래서 최도경은 꼬맹이가 오늘 밤 그에게 하는 첫마디를 듣게 되었다.
"가정교육 독학했어요?"
"뭐?"
"길가에서 쌈 구경하는 거 아니라고 안 배웠냐고."
말이 끝나자마자 신지아의 가느다란 팔이 최도경의 목을 휘감아 아래로 확 당겼고, 이어서 그녀의 이마가 그의 이마를 강타했다.
퍽!
"경찰 아저씨! 여기요! 살려주세요!"
소녀의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밤하늘을 찢었고,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한 방 먹은 최도경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 생명의 은인한테 이러기야?"
그는 신지아가 누워 있던 자리에 대자로 뻗어 킬킬거렸다.
신지아는 벌떡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이 싸늘하게 비웃고 있었다.
"네, 전 은혜를 원수로 갚는 미친 년이거든요."
...
수도 정계를 주름잡는 최성 그룹의 황태자가 한밤중에 경찰서 정모에 참석했다.
비서 주민석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허겁지겁 달려왔을 때는, 만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최도경의 선심을 이끌어내고도 그를 성추행범으로 몰아넣은 용사를 훔쳐보느라 바빴다.
확실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미인이었지만,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닌 이상 저럴 순 없었다.
건달들을 처리하고 난 뒤, 주 비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최도경이 "저 여자 묻어버려"라고 명령하기만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예상외로 돌아온 것은 엉뚱한 지시였다.
"저 여자, 신상 털어봐."
"누구요?"
주 비서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년간 여자를 돌보기를 짱돌같이 하던 최도경이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이건 지구가 네모나다는 소리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지시한 사람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힐끗 쳐다보았다.
주 비서는 등골이 오싹해져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외쳤다.
"넵! 알겠습니다!"
미련 없이 떠나면서 마지막까지 최도경을 '벌레 보듯' 노려보고 가는 저 여자를 보며 주 비서는 애도했다.
'아이고, 뒷조사해서 3대를 멸하려는구나.'
...
오늘 밤 자신이 누구의 털을 뽑았는지 알지 못하는 신지아는 동이 트려 할 무렵, 빗발치는 독촉 전화를 받고 신씨 본가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녀를 맞이한 것은 아버지 신동철이 후려갈기는 풀스윙 뺨때리기였다.
짝—!!
"내가 어떻게 너 같은 호로자식을 낳았을까!"
피할 새도 없이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이 뺨 소리에 집 안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강민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빛에 안타까움을 스쳤지만, 꾹 참고 그녀에게 다가지 않았다.
이번엔 확실히 지아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나중에 얼마나 더 큰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님, 손이 너무 매우신데.' 강민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머니 윤정희, 큰오빠 신재원, 남동생 신재민의 얼굴에는 똑같이 경멸과 분노가 서려 있었고,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윤세라의 눈에는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원래 어젯밤 그 양아치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하고 경찰서까지 간 것에 화가 났었지만, 다행히 입막음을 잘해서 놈들은 끝까지 "밤중에 미녀를 보고 흑심을 품었을 뿐"이라고 잡아뗐다. 신지아가 의심한들 물증이 없었다.
오늘 퇴원하면서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전했고, 예상대로 가족들은 덥석 미끼를 물었다.
실패한 프러포즈 이후 밤새 실종되었는데, 아무도 그녀가 어디서 뭘 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묻지 않았다. 오자마자 뺨부터 갈기는 것, 이것이 그녀의 가족이었다.
신지아는 변명 따위 하지 않았다.
그저 성큼성큼 걸어가 얌전히 앉아 구경하던 윤세라 앞에 섰고, 온 체중을 실어 손바닥을 휘둘렀다.
아빠를 칠 순 없지만, 그들의 금지옥엽은 칠 수 있지 않은가?
그녀의 행동이 너무 전광석화 같아서 집 안 사람들은 모두 벙쪄서 말릴 틈도 없었다.
방금 신지아가 맞은 것에 아주 잠깐 마음 아파하던 윤정희도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신지아! 너 미쳤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찰진 타격음이 거실을 울렸다.
짜악—!!
윤세라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이제야 좌우 대칭이 좀 맞는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