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3일 전, 윤세라가 신지아를 찾아왔다.
"강민우가 프러포즈 준비하는 거 알지?"
그 청순한 얼굴 뒤로 질투와 악의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냥 약혼식 올리라고 하셨다는데, 자기는 굳이 프러포즈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나? 네 입으로 '좋아'라고 말하는 걸 직접 들어야 완벽하다면서. 쳇, 정성도 지극해라."
"그래서?"
신지아는 건조하게 눈을 들어 올렸다.
윤세라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라니? 그러니까 신지아, 죄 많은 네 년이 무슨 자격으로 행복을 꿈꿔? 우리 내기할까? 내가 장담하는데, 3일 뒤에 그 프러포즈, 절대 성공 못 해."
신지아는 윤세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밖에서는 '천사표'로 소문난 윤세라가 단둘이 있을 때 이런 원독 서린 눈빛을 한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까.
그녀가 입만 뻥긋하면 취소될 수도 있는 프러포즈였지만, 그녀는 가장 잔인한 타이밍을 골랐다. 신지아를 가장 높은 곳까지 올려뒀다가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예전의 모든 순간처럼.
...
프러포즈는 엉망진창으로 끝났고, 한유진도 방금 집에서 긴급 호출을 받고 굳은 표정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한유진은 신지아를 집에 데려다주려 했다. 오늘 신지아가 강민우의 차를 타고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지아 역시 방금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기에 한유진을 먼저 보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방. 신지아는 시들어가는 꽃들을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시간은 이미 깊은 밤. 회관 밖은 인적 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당장 그 숨 막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강변을 따라 천천히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가 서늘해졌다.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는 척하며 화면을 통해 뒤를 확인했다. 남자 몇 놈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하자 그들도 노골적으로 따라붙었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단축번호 1번을 눌렀다. 1년 전 강민우가 반강제로 설정해 둔 번호였다.
그때 그녀는 여자를 희롱하던 양아치의 팔을 꺾어버려 경찰서까지 갔었고, 강민우는 그녀를 보석으로 꺼내주면서 "제발 성질 좀 죽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긴급 연락처로 설정해 두고, 앞으로 위험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알리라고, 절대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언제 어디서든 가장 먼저 달려오겠다고 약속했었다.
설마 그 약속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이런 상황일 줄이야.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 끊길 듯할 때쯤, 강민우의 피곤에 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아?"
그는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교통사고는 경미했지만, 미숙아로 태어나 연약한 윤세라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그가 곁에 있어야만 했다.
신씨 집안사람들은 병실 밖에서 대기 중이었고, 그가 겨우 윤세라를 달래 재웠는데 벨 소리 때문에 다시 깨고 말았다.
"강민우, 누가 날 미행해."
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들려온 건 한숨 섞인 짜증이었다.
"지아야, 제발... 나 오늘 밤 진짜 못 비워. 장난칠 걸 쳐."
그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자신을 윤세라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수작이라고.
마침 물을 떠 오던 신지아의 어머니 윤정희가 통화 내용을 듣고는, 온화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강민우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신지아! 언니가 사고 났는데 코빼기도 안 비치고, 뭐? 미행? 이 밤중에 밖에서 싸돌아다니면서 거짓말까지 해? 너 언제 사람 될래?! 내가 경고하는데, 오늘 밤 아무도 못 가. 여기서 네 언니 지킬 거야! 그 못된 심보 좀 고쳐먹어!"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는 가차 없이 끊어졌다. 뚝-.
병상에 누운 윤세라가 창백한 얼굴로 가련하게 입을 열었다.
"엄마, 화내지 마세요... 만약에 지아한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면 어떡해요?"
윤정희는 휴대폰을 강민우에게 돌려주며 혀를 찼다.
"쟤한테 무슨 일이 있겠니? 너 아플 때마다 사람들 빼돌린 게 한두 번이야? 거짓말도 유분수지."
신지아가 중3 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납치되었다며 가족들에게 "제발 와서 구해달라"고 전화한 적이 있었다.
하필 그날 윤세라가 발작을 일으켜 온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였는데, 갑작스러운 비보에 윤정희는 기절할 뻔했었다.
딸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요구대로 현금을 챙겨 학교 근처 공사장으로 달려갔지만, 그곳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신지아를 보았다. 납치범은커녕, 그녀 몸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오히려 집에 돌아오니 윤세라가 혼자 바닥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모든 게 신지아의 자작극이었다. 납치는 거짓말이었고, 가정부들까지 매수해 윤세라를 방치하게 만든 탓에 발작이 일어났을 때 약을 줄 사람조차 없었던 것이다.
의사는 조금만 늦었어도 가망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
격분한 아빠 신동철은 그날 밤 채찍으로 신지아를 죽도록 때렸고, 그녀는 병원에 한 달이나 입원해야 했지만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윤정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땐 그렇게 순하고 착했던 딸이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괴물이 되어버린 걸까.
강민우도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신씨 집안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신지아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입원 기간 내내 간병인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았고, 그나마 그가 몰래 매일 찾아가 밥을 챙겨주고 웃겨주며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됐어, 오늘 프러포즈 망친 것 때문에 화풀이하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투정을 받아줄 기력이 없었다. 내일 그녀의 화가 좀 가라앉으면 그때 달래주면 된다.
휴대폰을 던져두고 그는 윤세라의 이마를 짚었다.
"열 내렸네. 착하지, 한숨 더 자면 괜찮아질 거야."
윤세라는 이불 속에 파묻혀 얼굴만 반쯤 내놓은 채,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민우야, 오늘 프러포즈...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좀 더 건강했으면 너희한테 짐 안 됐을 텐데."
"무슨 소리야, 사고는 사고일 뿐이야. 그리고 넌 한 번도 짐이었던 적 없어."
"민우야..."
"자, 어서."
그녀는 눈을 감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오늘 밤은 아주 달콤한 꿈을 꿀 것 같았다.
...
뒤따라오던 놈들은 끈질기게 거리를 좁히며, 마치 쥐를 모는 고양이처럼 여유를 부렸다.
신지아는 숨이 차도록 달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소꿉친구의 냉담함, 어머니의 히스테리. 너무 많이 베이고 찔려서일까, 이제는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가슴속에 찬 바람만 휑하니 부는 것 같았다.
3월의 바람은 이미 따뜻해졌는데, 왜 이렇게 뼈가 시리도록 추운 걸까.
그들은 일부러 그녀를 가로등 없는 어두운 골목으로 몰고 있었다.
나무 밑에 멈춰 선 신지아는 무표정하게 바닥의 돌멩이를 응시하더니, 갑자기 딱 멈춰 섰다.
15분 후.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이고 머리가 터진 남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힘이 빠진 신지아는 그들과 떨어진 바닥에 대자로 누워 피 묻은 손으로 112를 누른 뒤, 멍하니 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3 때의 그 사건 이후, 그녀는 무에타이와 호신술을 미친 듯이 배웠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믿을 건 오직 나 자신의 주먹뿐이라는 것을.
그때, 옆에서 왼팔이 박살 난 놈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기습을 시도했다.
신지아가 곁눈질로 상황을 살피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그 남자는 누군가에게 발로 차여 그대로 나뒹굴었다.
조각같이 잘생긴, 하지만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얼굴이 시야에 훅 들어왔다.
남자는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어디서 굴러먹던 가엾은 꼬맹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