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가슴속에 눌러두었던 고통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 자존심을 붙들고 선언했다.
"좋아. 그 애는 남아. 대신 내가 나갈게."
강재현은 한참 전부터 나에게 쓰던 그 다정한 달램을 권세연에게 하고 있었다.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낮고 부드럽게 달래는 그 손짓… 한때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뒤돌아서 계단을 올라갔다.
옷장에는 긴 바지와 긴팔 셔츠들만 가득했지만, 그 사이에서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등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꺼냈다. 그리고 샤넬 가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서, 정성껏 묶어 올렸던 머리핀을 빼고 긴 머리를 어깨로 흘러내리게 했다.
파운데이션을 가볍게 바르고, 선명하고 과감한 립스틱까지 입술에 채웠다.
거울 속에는 누구에게도 맞추지 않던,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임서라'가 되살아나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강재현은 내 변신을 보고 비웃었다.
그런데도 권세연은 나와 화해하라며 강재현을 설득하는 척했다.
강재현은 일부러 내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가게 둬. 저렇게 술집 여자같이 차려입고 나가서 무슨 꼴을 당하든 나한테 울며 오지 않기나 했으면 좋겠네."
나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고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나서며 서주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 시절, 같은 프로젝트 팀에서 밤새며 피자 조각을 아침으로 나눠 먹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전화가 받자마자 서주연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서라야? 세상에, 너 맞아?"
"나랑 술 한잔하자."
그 말에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바는 어둑했고 공기는 술 냄새로 눅눅했지만, 서주연이 나를 꽉 안아주는 순간,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던 감정들이 단숨에 무너졌다.
그곳에는 서주연의 남자친구 최태완, 그리고 박현규도 있었다.
박현규가 내게 잔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임서라, 또 만나네."
박현규와 나는 대학 연구팀에서 3년을 함께 버틴 형제 같은 사이였다.
다정하고 매너 있는 성격 덕분에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나 역시 오랜만에 그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바 자리에서 가식 없이 마주 앉았다.
나는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강재현의 의붓여동생이 '미망인'이라는 명목으로 어떻게 조금씩 내 결혼생활 속에 뿌리내렸는지, 임신이라는 무기를 어떻게 이용해 강재현의 온갖 보호와 편애를 독차지했는지까지.
서주연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 여자 완전 강재현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 있네. 앙증맞은 척, 여린 척하는 건 진짜 뻔한 수작인데… 자존심 상하게도 재현이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네."
나는 잔을 흔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강재현은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그 애 말만 믿어."
그때 박현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아이 때문일 수도 있어."
우리는 동시에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아이, 정말 그 여자 남편의 아이가 맞아?"
그 말은 폭탄처럼 우리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던 지점이었지만, 그의 말은 우리가 피하고 있던 침묵을 단번에 찢어버렸다.
믿고 싶지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강재현의 과한 옹호,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 그리고 그 아이에게 쏟는 집착 같은 관심…
그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추측을 오히려 그럴싸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지우려는 듯 잔을 비웠다.
그때 바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들자, 거기 강재현이 서 있었다. 얼굴은 잿빛이었고, 눈은 차갑게 박현규에게 고정돼 있었다.
박현규는 잔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한 잔 할래?"
강재현이 비웃었다.
"내 아내의 내연남하고 건배나 할 만큼 취향이 너그럽진 않아서."
서주연이 가장 먼저 반박했다.
바 테이블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내연남? 웃기지도 않네. 의붓여동생이랑 정분 나서 아내 무시하는 남자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바람을 운운해? 동창회에서 창피한 줄 알아야지!"
강재현은 서주연을 무시했다.
대신 박현규를 향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 아내한테 얼씬도 하지 마."
그리고는 내 팔을 거칠게 잡아끌어 바 밖으로 끌고 나갔다.
취기가 온몸을 휘감아 다리가 휘청거렸고, 피로와 억울함, 술기운까지 겹쳐 의식이 천천히 침잠했다.
다음 날 아침, 끔찍한 두통에 눈을 떴다.
어제 옷 그대로였고, 립스틱은 번져 얼굴에 얼룩처럼 번졌으며, 아이섀도는 시커먼 그림자처럼 번들거렸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씻고 내려가자 하품이 절로 나왔다.
부엌에서는 권세연이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애는 돌아서며 노골적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고는 말을 던졌다.
"다음엔 다른 남자들이랑 술 마실 생각하면, 재현 오빠가 어젯밤 얼마나 화났는지나 생각해요. 이런 식이면 이혼도 고려한댔어요."
나는 냉소하며 말했다.
"그 사람이 나랑 이혼하고 싶다는데, 네가 더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권세연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 애 앞에 서서 고요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기억해둬. 내가 강재현의 아내인 동안, 넌 그저 의붓오빠의 결혼에 끼어든 방해꾼이고, 기생충이고, 천박한 위선자일 뿐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웃듯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말이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널 이 집에서 쫓아내는 건 순식간이야."
권세연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임서라, 그 웃음 오래 못 갈 줄 알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