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그녀에게 다정했고, 말로는 나무라면서도 행동 하나하나가 극진히 보호하던 김한샘은 그저 꿈이었을 뿐이었다.
"아니."
연은지는 쉰 목소리로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최대한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척 보이려 애썼다.
하지만 김한샘의 표정은 오히려 더 험악해졌다.
그녀가 막 눈을 떴을 때, 그를 보고 순간 반짝이던 눈빛. 그리고 눈앞의 사람이 그라는 걸 확인한 뒤,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 기억이 스칠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고, 주변 공기마저 음울하게 가라앉아 살기와 냉기가 감돌았다.
나를 보고 실망했다는 건가?
그럼 대체 누구를 보고 싶었던 거지?
김한샘은 연은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해 시선을 맞췄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연은지, 그런 잔꾀는 당장 집어치워. 안 그러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놓아버리고 몸을 곧게 세운 채 냉정하게 내려다봤다.
"준비해. 나랑 연회에 갈 거야."
원래도 기운이 없던 연은지는 그 힘에 그대로 다시 침대 위로 넘어졌다.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연회?"
"넌 알 필요 없어."
김한샘은 차갑게 내뱉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잠시 뒤, 박소연이 옷을 안고 들어왔다. 연은지의 모습을 보자 노골적인 혐오와 질투가 얼굴에 스쳤다.
김한샘은 분명 이 여자를 뼛속까지 미워하면서도, 굳이 연회에까지 데려가려 했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박소연은 옷을 내려놓으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좋은 옷을 네가 입다니, 정말 아깝다."
그 말만 남기고 그대로 돌아나갔다.
연은지는 침대 끝에 가지런히 놓인 예쁜 드레스와 구두를 바라봤다. 창백한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스쳤다.
그래.
정말 다 낭비였다.
그렇다면 왜 굳이 자신을 연회에 데려가려는 걸까?
그렇게 증오하면서.
벌을 주려는 거라면, 이게 또 무슨 의미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말을 거스를 용기도 없었다. 연은지는 몸을 일으켜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으려다 안쪽에 들어 있는 유리 조각을 발견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얼굴은 더욱 새하얘졌다.
그가 일부러 넣게 한 걸까?
겉보기엔 화려하게 꾸며 놓고, 그 안에서는 여전히 벌을 받게 하려는 건가.
눈시울이 뜨겁게 타올랐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연은지는 이를 악물고 한참 동안 구두를 바라보다가 결국 신발을 신었다.
유리 조각이 발바닥을 찌르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타고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신음 한 소리 내지 않은 채 침대 머리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말만 잘 들으면, 가족만은 건드리지 않겠지.
김한샘은 소파에 앉아 차가운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시계를 본 뒤 미간을 찌푸렸다.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그는 냉담하게 하인에게 말했다.
"네."
하인은 방으로 향했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연은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샴페인 컬러의 원숄더 드레스가 그녀의 가늘고 섬세한 몸선을 드러냈고, 한쪽 어깨가 훤히 드러나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
걸음은 몹시 느렸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얼굴빛이 점점 더 하얘졌고,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 연은지 씨가 나왔습니다."
하인의 말에 김한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연은지에게 닿는 순간,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고 얼굴은 더더욱 굳어졌다.
가냘프고 연약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감출 수 없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이 어깨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흐릿한 분위기를 더했다.
김한샘은 답답하다는 듯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가슴 안에 쌓인 불쾌함이 조금이라도 사라지길 바라는 것처럼, 그는 차갑게 그녀가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연은지, 오래 안 나와서 진작에 죽은 줄 알았어."
차가운 말투였고, 말의 내용은 잔인하기까지 했다.
연은지는 긴 속눈썹을 미세하게 떨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나를 덜 미워할 거야?"
"헛소리 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