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눈부시게 선혈이 하얀 팔을 타고 굽이치며 흘러내렸다.
연은지는 창백해진 얼굴로,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고귀하고 냉혹한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규칙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예전의 그는 이렇지 않았다.
한때 그가 그녀를 가장 아끼던 시절에는, 그녀가 거리낌 없이 서재로 들어와도 그는 한 번도 이렇게 분노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커다란 책상 위에서 서로 얽힌 적도 있었다.
정신이 흐트러졌던 어느 순간,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이런 모습이 자기 마음에 든다고 낮게 속삭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차갑게 규칙을 지키라 말했고, 심지어 꽃병을 던져 그녀의 팔에 상처를 냈다.
심장이 조여 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고, 연은지의 얼굴은 더 희어졌다.
"나가."
김한샘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특히 팔에 흐르는 피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가슴이 답답하게 아파왔지만, 동시에 그에게는 더 또렷하게 각인됐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악독한 여자를 사랑해 왔는지 말이다.
심장병까지 앓고 있던 김새미조차 용서하지 않았던 여자였다.
연은지는 입술을 깨물었고, 피 맛이 느껴질 때서야 겨우 힘을 풀었다.
그녀는 벽을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밖으로 몸을 옮겼다. 문밖에 서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한샘 씨, 나..."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고, 억지로 버티고 있던 힘이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은지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이마에는 잔뜩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맑고 예쁜 눈동자에는 텅 빈 혼란만이 서려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녀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분명 김새미가 스스로 뛰어내렸는데, 왜 그 모든 죄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우는 걸까?
서재 문은 열릴 기미가 없었고, 그녀는 감히 다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를 자극했다가 더 끔찍한 일을 겪게 될까 봐 두려웠다.
정말… 너무 아팠다.
몸은 오한과 열기를 번갈아 느끼며 떨렸고, 연은지는 벽 한쪽에 웅크린 채 앉아 눈앞에서 끊임없이 스치는 장면들을 바라봤다.
비 내리던 밤, 어찌할 바를 몰라 서 있던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우산 하나가 드리워졌고, 고개를 들자 김한샘의 잘생기고도 고귀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고도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여자가 돼. 그러면 내가 도와줄게."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고, 그렇게 3년을 함께했다.
그는 냉정하고 무심한 사람이었지만, 그녀 앞에서는 끝없는 열기와 욕망을 쏟아냈다. 그녀 역시 철저히 선을 넘지 않는 애인으로 그의 곁에 있었다.
언젠가 그가 끝내자고 말하는 날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돌아온 건 이런 대우였다.
채찍이 몸을 후려치던 고통이 다시 살아난 듯했고, 팔의 상처도 더 욱신거렸다.
연은지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렸다.
"한샘 씨… 너무 아파..."
예전 같았으면, 피부가 조금만 긁혀도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부주의하다고 나무랐고,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다정하게 상처를 치료해 줬다.
하지만 지금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연은지는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는 하인이 서 있었고, 그녀의 팔 위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도 상처가 있던 손이었는데 그렇게 밟히자 피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잠이나 자고 있을 처지야? 당장 일어나서 일해!"
하인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자, 더 힘을 줘 상처 위를 짓밟으며 비웃듯 말했다.
"기껏해야 애인 주제에, 진짜 김씨 집안 안주인인 줄 알았나 봐? 게다가 감히 아가씨를 죽게 만들다니. 내가 보기엔 너 정말 오래 살 생각이 없는 것 같네."
"난 안 그랬어."
연은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서재를 한 번 바라본 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김한샘, 내가 아니야. 난 김새미를 밀지 않았어. 정말로 걔가 스스로 뛰어내린 거야. 걔가 나한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단 말이야. 난 밀지 않았어..."
연은지의 눈에는 고집스러운 집념이 가득했다.
하지도 않은 일을, 왜 그녀가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 순간, 머리채가 거칠게 잡아당겨졌다. 두피에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