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잠시 후, 한도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윤리안은 그가 허락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환하게 웃었다. 눈매가 꽃처럼 피어났다.
"감사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한도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정신을 다잡듯 시선을 거두었다.
강이후가 휠체어를 돌려 밖으로 향했고, 윤리안도 발걸음을 맞춰 뒤따랐다.
뒤에 남은 강이후는 윤세광 부부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조금 전 도련님은 처리하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집 딸을 데리고 나가는 상황인데... 그럼 손을 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철수해."
문밖에서 한도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강이후는 부하들을 이끌고 줄지어 빠져나갔다.
그들이 윤씨 집안 별장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홀 안의 사람들은 비로소 숨을 돌렸다. 누군가는 한숨을 내쉬고, 누군가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제도의 한도겸.
정말 숨 막히는 존재였다.
윤세광과 오영미는 서로를 부축해 겨우 일어섰다.
"결정적인 순간에 윤리안이 우리 집안을 살렸군." 누군가 감탄하듯 말했다.
윤세광은 오영미를 붙잡은 채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는 노년의 안도와 흐뭇함이 번졌다.
"리안이는 착한 아이야. 오늘 다들 놀랐겠구만. 호텔도 예약해 두었고, 좋은 술도 준비해 두었으니 다들 놀란 가슴 좀 달래고 가."
윤씨 집안은 가문이 사라질 위기를 가까스로 피했다는 안도감에 서서히 활기를 되찾았다.
30분 후.
윤리안과 한도겸은 낮고 은은하게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리무진 안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윤리안은 손에 들린 혼인신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멍해졌다.
전생에서 그렇게까지 피하려 애썼던 남자와, 결국 결혼하다니.
그렇다면 이번 생은,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 걸까?
그녀는 긴 속눈썹을 들어 한도겸을 재빨리 흘끗 보았다.
곧 세상을 떠날 운명이라는 사실만 빼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잘생기고, 유능하고, 강한 남자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인 모습만 보면, 소문처럼 냉혹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도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른,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작스러운 기쁨이 밀려왔다.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그렇게 나와 결혼하고 싶었나?"
한도겸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무심하고 담담한 음성. 그 속에 병색이 배어 있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쇠약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윤리안은 웃음을 거두었다.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원하면서 왜 대리 신부라는 사실을 굳이 밝혔지?"
"제 신분을 속이고 들어온다고 해서 한도겸 씨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들통나는 것보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그게 제 진심을 보여드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요."
윤리안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한도겸은 가볍게 웃었다. 눈빛에 묘한 탐색이 더해졌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윤리안은 잠시 곰곰이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전생까지 합쳐도 오늘이 첫 만남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그랬다.
한도겸은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왜 나와 결혼하고 싶지?"
"저를 지켜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에요."
윤리안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전… 그동안 아주 비참하게 살았어요. 그 삶에서 벗어나려면 강한 배경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강한 사람이니까요."
한도겸의 눈썹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의미심장했다.
아까 혼인신고서를 쓸 때만 해도 그녀는 더웠는지 머리를 단정히 묶었다. 그 덕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매끈한 이마, 맑은 눈매, 곧게 뻗은 콧대, 촉촉하게 빛나는 붉은 입술. 기쁨 때문인지 눈가에는 웃음기가 가득했고, 하얀 얼굴에는 옅은 보조개가 살짝 패였다.
예쁘고, 단정하고, 순해 보였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울타리를 찾는 순진한 작은 토끼처럼.
하지만 과연 정말 그 모습 그대로일까?
"결국 날 이용하려는 거였군?"
담담한 어조에 윤리안은 순간 긴장했다.
"이용이라기보다… 서로 필요한 관계라고 하는 게 맞겠죠. 당신도 아내가 필요하잖아요?"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피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내가 단지 아내가 필요했다면, 원한다는 여자는 넘쳐났을 거다."
"하지만 그 여자들은 대부분 당신이나 한씨 집안과 이해관계로 얽혀 있을 가능성이 크죠. 그래서 당신은 생활 반경이 전혀 겹치지 않는 윤하은을 선택한 거예요. 그리고 저는, 윤하은보다 더 조건에 맞는 사람이고요."
"어떻게?"
"저는 애초에 당신과 아무 관련도 없고… 게다가 고아나 다름없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순간부터 그랬으니까요. 그리고 윤씨 집안 사람들과는..."
그녀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당신과 대리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윤세광과는 이미 부녀 관계를 정리했어요. 그러니 당신이 저를 아내로 맞이해도, 윤씨 집안이 기생하듯 달라붙어 이익을 뜯어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말과 함께 서류 두 장을 한도겸 앞으로 내밀었다.
하나는 윤세광과의 부녀 관계를 단절한다는 각서, 다른 하나는 백하진과의 약혼 해지 합의서였다.
"윤세광은 친부 아닌가?" 한도겸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윤리안은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눈동자 깊은 곳에 잠겨 있던 증오가 서서히 드러났다.
"낳기만 하고 키우지 않은 친부, 악독한 계모, 뭐든 빼앗고, 무엇이든 가로채는 이복여동생,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약혼자."
"그들은 제 20년을 지옥처럼 만들었어요. 전 그들이 제게서 빼앗아 간 걸 전부 돌려받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겪은 고통의 대가도 치르게 하고 싶고요."
한도겸은 서류를 거두어 들였다.
"그래서 내 힘을 빌려 복수하겠다는 건가?"
"네."
윤리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 일로 당신께 폐를 끼치진 않을게요. 혹시라도 걱정되신다면 계약서를 따로 작성해도 돼요."
"언젠가 이 결혼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되시면, 언제든 끝내셔도 돼요. 전 절대 매달리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게요."
한도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국 호랑이 등을 빌려 위세를 세우겠다는 거군."
윤리안은 잠깐 말이 막혔다. 표현이 썩 듣기 좋지는 않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협력이라면 이득을 혼자만 취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물론 이 결혼이 제게 보호막이 되어주는 만큼, 저 역시 이 관계에 충실할 거예요.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제 세상에서 유일한 가족이에요."
"그러니 어떤 요구든 말씀하세요. 전 최선을 다해 맞출게요."
"어떤 요구든?" 한도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윤리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요구든."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설령 나쁜 사람이라 해도, 백하진이나 윤하은보다 더 잔혹하진 않을 거라고. 그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심장을 내놓으라는 것보다 더 끔찍할 리는 없었다.
한도겸은 낮게 "그래." 하고 답했다.
"그럼 한씨 집안 셋째 며느리 역할이나 제대로 해. 어떤 상황에서도 그 신분을 잊지 말고."
아내라는 자리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윤리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도겸은 이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짙은 속눈썹이 내려와 아래 눈꺼풀 위에 부채처럼 드리웠다. 짙은 눈썹은 단정하게 올라가 있었고, 콧대는 곧고 또렷했다. 다만 얇은 입술은 옅은 창백함을 띠고 있었다.
윤리안은 그 빛깔이 오래 병을 앓은 사람의 것임을 알았다.
차 안에는 은은하게 한약 향이 감돌았다. 쉽게 눈치채기 어려운, 살짝 쌉싸래한 향이었다.
윤리안은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전생에서 그는 윤하은과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지금 그의 기색은, 그렇게까지 위독해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검지와 중지, 약지를 나란히 올려 맥을 짚었고, 오 분 남짓이 흐른 뒤, 그녀는 손을 거두었다.
눈동자에 설명하기 어려운 의문이 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