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첫 사이다
통화가 끝나고 안별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느슨하게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내려오자마자 큰 아버지네 일가가 방문한 것을 보았다.
이 가족의 방문은 언제나 즐겁지 않았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안씨 가문의 대부분의 가업을 아버지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큰 아버지 안수만은 그걸 원한으로 품고, 때때로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심지어 가업을 뺏으려는 야욕으로 암암리에 윤태성과 결탁하며 안씨 가문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안별은 조용히 거실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오늘 안수만은 자기 사생딸 안효진까지 데리고 온 상태였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오늘 안수만이 온 목적은 자기 사생딸을 안씨 기업에 집어넣으려는 심산이다.
현재 안씨 그룹의 수뇌자는 그녀의 아버지 안수철이었고, 안수철이 동의해야만 가능했다. 특히, 안수만이 사생딸에게 편한 일자리를 마련하려면 더욱 그러했다.
전생에 안수철은 확실히 안수만의 체면을 봐서 사생딸이 안씨 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동의했었다. 그런데 안효진은 능력은 없으면서 야망이 가득했고, 결국 안씨 그룹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번 생에 안별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언니, 차 마셔요.” 안효진은 공손한 자세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안별은 손을 내밀었다.
찻잔을 받으려는 순간, 안효진의 손이 미끄러져 뜨거운 차를 전부 안별의 손에 쏟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환생한 안별 앞에서 이런 수작이 통할 리 없었다.
전생의 안효진은 불쌍한 척하며 순진한 얼굴로 뒤에서 안별을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더욱이 윤태성과 침대까지 구른 여자였다.
자고로 이런 해괴망측한 여자들을 상대로는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모조리 찢어버려야 한다.
그 순간, 안별은 재빨리 빠져나가려던 안효진의 손을 잡았다. 쏟아진 뜨거운 차가 그대로 안효진의 손에 부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그 과정을 보지 못했다.
거실에 있던 안효진이 “악!!” 하고 소리쳤다.
이윽고 찻잔이 땅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안수만이 다급하게 물었다.
“언니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안효진이 바로 대답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도 참 재능이었다.
어찌나 가련하고 보듬어주고 싶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사생딸임에도 불구하고 안수만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짝!”
안별의 매서운 따귀가 안효진의 세상 가련한 얼굴에 날아들었다.
열이면 열, 힘을 다해 때린 따귀가 안효진을 당장에 벙찌게 만들었다.
안효진은 두 눈이 커져서, 지금 이 순간 기세등등한 안별을 보았다.
그녀는 안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여자라 절대 이런 일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안별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못 봤다. 그녀가 울기만 하면 안별은 마음이 약해지고, 온 가족이 그녀의 울음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안별이 지금,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제일 아끼시던 찻잔인 거 몰랐어? 그런 물건을 지금 네가 깨트린 거야! 보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안별은 큰 소리로 호통을 쳤고, 기선제압에 들어갔다.
반쪽 얼굴이 빨개진 안효진의 눈물은 더 세차게 흘러내렸다.
“아니에요. 방금은 언니가 잔을 잡지 않은 거예요. 언니가 방금...”
“내가 잔을 잡지 않은 거였을까? 아니면 내가 잡기도 전에 네가 손을 일부러 놓은 걸까?” 안별은 그녀의 말을 가차없이 끊었다. “이젠 거짓말까지 하려고 드네?”
“그런 게 아니에요. 분명 언니가...” 연신 고개를 젓던 안효진의 얼굴은 억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직도 변명하고 있어!” 안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역시 안씨 집안에서 제대로 키워지지 않은 자식이라 그런지, 정말 어디 내놓기 부끄럽네. 찻잔을 건네면서도 떨어뜨려 깨뜨리다니.”
안수만은 안별이 자기 딸을 비꼬는 말을 듣고 얼굴색이 바로 변했다.
방금 누구의 잘못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던 안효진은 상류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든 사생딸 신분이라 순간적으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화만 삼켰다.
“언니.” 안별이 고개를 돌려 안은서를 보았다. 안수만의 정실 딸, 안은서. “언니 여동생은 정말 언니 발끝도 못 따라가네.”
사실 안은서는 안별과도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
안은서야말로 안씨 집안의 큰 아가씨였지만, 할아버지가 가업을 안별 일가에게 물려주면서 안별이 사실상 안씨 집안의 진정한 아가씨가 되었고, 반면 안은서는 방계가 된 느낌을 받았다. 그로 인해 안은서도 줄곧 안별을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안별이 안효진을 혼내고 비꼬자, 안은서의 가슴 속에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효진, 저 천한 계집애는 아버지가 예뻐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몽둥이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어떻게 컸는지, 불쌍한 척만 하는 거 외엔 아무것도 모르네. 내가 아빠한테 얘 둘째 삼촌 집에 데려가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게. 할아버지 생전에 아끼던 찻잔까지 깨먹고, 저런 건 확실히 혼내줘야 돼!” 안은서가 혐오스러운 듯 말했다.
“그만해!” 안수만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안은서를 향해 소리쳤다. “조용히 안 해?!”
안은서는 기분 나쁘게 힐끗 보았다.
“그만들 해.” 안수철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중재하려 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남기신 물건이긴 하지만, 찻잔 하나로 온 집안이 불화하는 걸 원하셨을 리 없으니, 그만들 하고 하인에게 시켜서 청소하라고 하면 된다.”
“맞아요.” 여민정도 나서서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효진이 손이 데여서 빨갛게 됐구나. 얼른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여민정은 좋은 마음으로 말했지만, 안별에게 맞아 부은 반쪽 얼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안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우리 엄마, 똑똑하네!
“네, 데리고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네요. 페를 끼쳐서 죄송했어요.” 안수만의 본처 박정선이 말했다.
아마도 진심으로 안효진이 안씨 그룹으로 들어가길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수만이 사생딸을 안씨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걸 참아도,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다만 안수만이 예뻐하니까 외면치레를 하는 것 뿐이다.
박정선은 말을 하면서 안수만을 끌었다.
안수만의 표정은 아주 가관이었다. 원래 오늘은 안효진이 회사에 들어가는 일을 말하려고 했는데 안별이 꼽을 주어 지금 이 상황이 되었으니 그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 화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한 가족 모두가 그를 따라서 떠났다.
안효진은 눈밑의 분노가 사그러들지 않은 상태로 떠났다.
안별이 자기한테 그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원래는 자기의 나약함으로 질투 나던 안별을 데이게 하려고 했다. 어차피 안별은 화를 내지 않을 테니까. 근데 사람 일은 모른다고, 안별한테 뺨을 맞고 자기가 안씨 그룹으로 들어가는 일까지 그르치게 되었다.
안된다.
기필코 안씨 그룹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모두 안씨 집안 사람인데, 왜 자기만 이런 모욕과 비꼼을 당해야 하는 걸까?
안씨 집안 모든 사람이 자기를 다시 보게 만들고 말 테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
안별은 그들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안효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가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업자득으로 멸망의 길을 향해 나아가게 될 그 모습을, 안별은 그저 지켜볼 작정이었다.
“별아.” 안수철이 그녀를 불렀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패기가 넘치냐?”
예전에는 조용히 지내려고, 늘 온화하고 참을성 있던 딸이 이렇게 기개를 발휘할 줄은 몰랐다. 왠지 마음이 후련해지기도 했다.
안별은 고개를 돌려 빙그레 웃었다.
“갑자기 사람이 착하면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할아버지 유품을 그렇게 말할 줄이야.” 안수철은 약간 책망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분명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안별은 귀엽게 혀를 내밀며 말했다.
“악에 맞서려면 착하기만 하면 안 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