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애피타이저
윤씨 집의 식사 자리는 모두 화기애애했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윤가네 사람들은 안별네 가족에게 정원에서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나뭇잎이 물들고,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정원은 꽤나 분위기가 있었다.
“그럼, 우리 사이에선 돌려서 말 안 할게.” 윤판호는 하인이 차례대로 찻잔을 채운 뒤, 서서히 입을 열었다.
안수철은 당연히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무슨 일이든 말해. 별이랑 태성이 결혼은 네가 말하는 대로 따를 예정이야.”
윤판호는 아량이 넓은 척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다음 달이면 결혼식인데, 우리도 단출하게 식을 치를 생각은 없어. 어쨌든 우리는 한성 4대가족의 일원인데, 혼사는 절대 간단하게 넘어갈 수 없지. 결혼식장과 호텔을 포함한 모든 비용은 우리 집에서 내기로 했어. 받은 모든 부조금은 별이랑 태성이 신혼부부에게 주고 싶어.”
“당연히 괜찮지.” 안수철은 동의했다.
여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예물과 예단에 대해서도 서로 추측만 하지 말고, 예물은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줬으면 좋겠어? 얼마든지 말해줘. 우린 최대한 맞춰줄 생각이 있어.” 윤판호는 큰 성의를 보이며 말했다.
“결혼식 대부분을 너희가 맡겠다니, 그것도 적지 않은 액수잖아. 게다가 우리는 자식이 별이뿐이라, 결국 우리 재산이 별이 재산이 될 텐데. 특별히 바라지는 않아. 별이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안별은 아빠의 시그널을 받고 말했다.
“없어요. 난 그냥 행복한 결혼식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 이상 바라는 건 없어요.”
“갖고 싶은 건 없어?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윤태성의 어머니, 조영숙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 말에 안별은 조영숙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이 여자가 그녀를 위하는 척 하며 억지로 약을 먹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약은 윤씨 가문을 이어가게 하려는 그녀의 음모였고, 죽음이 다가올 때야 비로소 그 약이 메스꺼운 벌레들의 시체로 달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번 약을 마신 뒤, 며칠씩 구토와 배탈을 앓으며 지냈고, 그저 윤씨 가문의 후손을 낳기 위해 8년 동안이나 그 약을 먹었다!
안별의 눈밑에 잔인함이 서서히 스며들었지만, 억누르려 애썼다.
“원래 마음에 들었던 건 사파이어였는데, 이제는 그걸 이미 갖게 돼서 이제는 갖고 싶은 게 없어요.”
사파이어는 이제 윤씨 집안에서 절대 언급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고, 윤씨 가족의 얼굴에는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하지만, 연기자들처럼 윤씨 가족은 불리한 화제를 피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대화를 대충 넘기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이제 별이가 시집 오면 다 한 가족이 될 텐데,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고맙습니다, 어머님.” 안별이 대답했다.
윤판호가 뜸을 들이면서 뭔가 말을 꺼내려 했다. 그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예물은 그렇게 하고, 예단도 우리 쪽에서 요구하는 건 없어. 애들이 잘 살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해. 그런데...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뭐든 말만 해.” 이번에는 안수철이 넉넉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요즘 윤씨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원래 자금에 문제는 없었어. 그런데 은행 대출이 만기가 되어버려서 어쩔 수 없이 갚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지. 그랬더니 자금에 부족이 생기고, 원래는 은행에서 빌리려고 했는데, 은행도 요즘 상황이 안 좋아서 몇 번이나 거절당했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리 수철이 너한테 도움을 청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너 말대로 결국 윤씨도 태성이에게 넘어가게 되니까, 태성이가 별이랑 결혼하면 결국 애들 것인 셈이잖아. 부끄럽기도 했지만, 지금이 적절한 시기인 것 같아서 말을 꺼냈어.” 윤판호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전생에 윤씨가 자금난을 겪었을 때 안씨가 큰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윤판호의 말을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안수철이 잠시 안별을 힐끗 보았다.
안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 도와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말인데, 이번 너네 자금 부족은 어느 정도 되는 거야?”
“대략 계산해 봤는데, 4천억 정도야.” 윤판호는 그 말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 가볍게 내뱉었다.
그 금액은 마치 사소한 것처럼 들렸지만, 안별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물론 안씨 집안도 그 정도 금액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큰 금액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었다.
안별은 웃으며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아버님 회사에서 이번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이 4천억이라고 하던데, 그럼 아버님은 지금 한 푼도 없으신 건가요?”
윤판호는 순간 당황하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안별이 그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뜻도 명확했다. 그렇게 된다면 안씨가 이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셈이고, 윤씨는 중간에서 아무런 손해 없이 이득을 취하려는 셈이다.
서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거래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이때 윤태성이 말을 꺼냈다.
“윤씨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서 균형을 맞추느라 일부 자금을 빼서 메웠어요.”
“아, 그렇구나.” 안별은 이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별은 윤씨가 주식 시장을 메우는 데 몇십억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는 몇천억이 필요했다. 그 액수에 비하면 몇십억은 터무니없이 작은 금액이었다.
윤태성은 안별의 납득하는 표정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안별이 그런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를 알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어디서 들은 걸 테다고 생각했다.
그때 안별이 문득 말했다.
“아빠, 윤씨가 투자 프로젝트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 그럼 도와주는 게 어때요?”
윤태성은 그 말을 듣고 음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안별은 내 손아귀에 놀아나는 멍청한 여자에 불과해.
안수철은 안별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점 이해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한 가족인데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야지.”
“수철아, 고맙다. 물론 나도 돈을 그냥 빌리지는 않을 거야. 프로젝트가 잘 되면 바로 다 갚을게.” 윤판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입은 하마처럼 크게 벌리고 웃었다.
“만약 잘 안 되면요?” 안별이 갑자기 물었고, 마치 지나가는 가을바람처럼 가볍게 내뱉었다.
윤판호의 크게 벌렸던 입이 살짝 떨리며 웃었다.
“워낙에 수익성이 높은 프로젝트고, 전수조사를 마친 상태라서 적자가 날 상황은 절대 없어.”
“사업이라는 건 본래 절대적인 게 없잖아요.” 안별은 중얼거리며 윤태성을 향해 또다시 웃었다. “안 그래, 태성 씨?”
“그렇긴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거니까, 적자가 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윤태성은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만약 적자가 나면 4000억은 못 갚겠죠?” 안별이 짧게 물었다.
윤판호는 다급히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니까! 윤씨는 이 프로젝트 하나로 먹고사는 게 아니야. 다른 수익 창출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많고, 이 프로젝트가 잘 안 풀린다고 해도 다른 방법으로 다 갚을 수 있어. 절대로 4000억을 못 갚을 일은 없어.”
“그럼 아버님이 그렇게 꼭 갚으시겠다고 하시니, 우리 차용증을 작성하는 건 어떨까요?” 안별이 배시시 웃으며 제안했다.
그 웃음은 정말로 맑고도 무해했다. 마치 지금 하는 말이 양가 간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