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오랜만인데...인사도 안 하냐?
천진주의 가슴은 불이 붙은 듯 타들어가고 있었다. 전예린을 도우려다 오히려 자신이 곤경에 빠진 셈이었다.
너무 후회스러웠다.
"어이, 청소부 아줌마!"
천진주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비웃으며 전예린에게 말했다.
"들었어? 청소부 아줌마가 너보다 상황 파악을 훨씬 잘 하네."
그는 와인 한 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다 마셔. 아니면 홍하나를 불러오든가."
홍하나는 천진주를 면접에서 받아줬던 그 여자를 의미했다.
홍하나가 언급되자 전예린의 얼굴이 살짝 겁에 질렸다. 그녀는 집안이 가난해 로열에서 높은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만약 홍하나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 그녀는 무조건 일자리를 잃을 것이었다.
"하나 언니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전예린은 상 위에 놓인 와인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제가 마실게요!"
눈물을 흘리며 병을 든 그녀는 아직 술을 마시기도 전에 흐느꼈다.
"잠깐만."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 천진주의 몸이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
천진주는 등 뒤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에 공포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서."
어둠 속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천진주의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고, 그녀는 그 명령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곧 또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뒤돌아 보라고. 청.소.부. 아.줌.마."
천진주는 가슴이 마치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답답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룸 안의 분위기는 더욱 묘해졌고, 모두가 이 상황의 심각함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까지 장난스럽게 휘파람을 불던 남자는 흥미롭게 웃으며 말했다.
"구경거리가 생겼네."
그러자 다른 남자가 소파에서 크게 소리쳤다.
"서민준, 조용히 해. 구경 방해하지 말고."
"씨발, 백요한. 넌 정말 뼛속까지 나쁜 새끼야."
천진주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고, 도망치고 싶었다.
3년의 감옥 생활… 그 지옥에서 빠져나왔지만, 이제 다시 그 남자와 마주해야 하는 건가…
3년 동안 감옥에서의 고통과 그 지옥 같은 날들을 잊고 싶었지만, 그녀의 모든 신경이 그 남자의 존재를 느끼며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이제 구태우에게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살과 뼈에 새겨진 그 남자에 대한 공포뿐이었다.
그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그 남자에게 느끼는 감정은 오직 두려움이었다.
"고개 들어."
차가운 목소리에 천진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불빛은 희미했지만, 그를 알아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파에 우아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구태우. 그의 가느다란 팔은 소파에 걸쳐져 있었고, 손등으로 턱을 받치며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신사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금테 안경 너머로 빛나는 그의 눈은 마치 굶주린 늑대처럼 천진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세월은 구태우를 더 성숙하고 매력적으로 만들었지만, 그녀에게는 그가 여전히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얼굴은 희미한 불빛에 비춰져 금빛으로 빛났고, 그 자리에서조차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강렬한 아우라를 발산했다.
하지만 천진주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두꺼운 옷 속으로 얼굴을 숙였다.
"푸흐흡."
구태우는 코웃음을 치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네. 뭐야? 인사도 안 해?"
천진주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태우 씨…"
천진주는 최대한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허벅지 살을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으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억누르려 했지만,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이미 소파에 앉은 남자의 시선에 포착된 지 오래였다.
구태우는 천진주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만약 오늘 로열에서 그녀를 보지 않았다면, 그는 이 여자를 거의 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진주는 많이 변해 있었다. 전예린이 무심코 던진 "진주 언니"라는 말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윤곽만 어렴풋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우는 천진주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꼈다.
"언제 나온 거야?" 구태우는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천진주의 얼굴에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다급하게 구태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
‘제발, 말하지 말아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감옥에 들어갔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줘... 제발...!’
그녀의 눈빛은 간절한 부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구태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전예린의 손에 쥐어진 와인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차가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스며들며 천진주를 향해 말했다.
"네가 뭘 말하려는지 알겠는데... 한 병을 다 마실 수 있으면 네 부탁을 들어주지."
천진주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전예린의 손에 쥐어진 보드카 병을 바라보았다. 보스 보드카, 세계적으로 유명한 40도짜리 도수의 술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술을 못 마셔요."
말이 끝나자마자 천진주는 자신의 두피가 마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몸은 시선에 화상을 입는 것처럼 뜨거워졌고, 손바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숨 막히는 두려움 속에서 최종 판결을 기다렸다.
"태우 씨, 제발 봐주세요."
천진주는 살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간절히 빌었다.
"제발 봐주세요. 술만 마시지 않게 해주세요. 뭐든지 시키기만 하면 다 할게요!"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애원했다. 살아야만 그녀는 자신의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빚은 하지아에게 진 것이 아니었다.
구태우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술 한 병을 마시지 않겠다고 무릎을 꿇는다고? 천진주… 그토록 오만했던 네 자존심은 어디로 갔냐?"
그의 말은 차가웠다.
자존심?
천진주는 조롱과 씁쓸함이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이란 무엇인가? 자존심이 그녀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그녀는 와인을 피하려 무릎을 꿇은 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 무릎을 꿇은 것이다.
눈을 감자마자 천진주의 머릿속에 굴욕적인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중 단 한 명만은 다르게 다가왔다. 자신 때문에, 그 소녀가… 어둡고 축축한 감옥에서 죽었다.
그녀의 꽃다운 스무 살이 그 어두운 곳에서 시들어버렸다.
그녀… 그녀 때문에 천진주가… 아!
그것은 죄였고 빚이었다.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죄와 빚. 하지아에게 진 빚이 아니었다. 그 감옥에서 그녀를 위해 싸워줬고, 이유 없이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소녀에게 진 빚이었다.
천진주는 피투성이가 된 그 소녀가 자신의 품에 누워, 마지막으로 '진주 언니'라고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소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향과 꿈을 이야기하며 죽어갔다. 그 장면이 떠오르자 천진주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