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피임약이 임신촉진제로 바뀌다

송유리는 몰락한 가문의 규수였다. 3년 전, 최강민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송유리와의 연인 관계를 공개했고, 심지어 최태웅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약혼식까지 올렸다. 그 일로 인해 송유리는 단숨에 경시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여성이 되었다.

외부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답고 마음씨 곱고, 고귀하면서도 우아한 여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임지연만큼은 알고 있었다. 송유리가 어떤 사람인지.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면, 분명 최고의 여배우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처세술로 미루어 보아, 임지연이 자신을 지목한 의도를 송유리는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이미 그녀와 최강민의 결혼은 3년째 미뤄지고 있었고, 송유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최씨 집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송유리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 임지연이 있던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

"어르신, 제가 그랬어요. 저와 지연이는 체형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몇 군데 닮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해한 것 같아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곁에서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인터넷에 올라온 그 일기 말이에요. 임지연이 셋째 도련님 짝사랑했던 거… 최소 5~6년은 된 것 같던데요? 송유리 씨랑 셋째 도련님은 3년 전부터 만났잖아요?"

하지만 송유리가 가장 잘하는 건, 진심처럼 보이는 연기였다.

"제가 먼저 셋째 도련님을 짝사랑했어요. 그 모든 글은… 제가 써둔 제 마음이었어요. 누가 그걸 발견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두 줄기 맑은 눈물, 깊은 감정이 담긴 눈빛, 그리고 뺨 위로 살짝 올라온 붉은 기색까지, 그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완벽했다. 누가 보더라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지연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완전히 패배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작은 삼촌과 유리 언니는 몇 년 전부터 약혼한 사이였고, 작은 삼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언니가 도운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저 외부 파파라치들이 사람들 관심을 끌기 위해, 부잣집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꾸며낸 것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주변 구경꾼들의 시선이 서서히 식어갔고, 어떤 이들은 이제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임지연은 전생의 삶이 얼마나 무가치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항상 조심스럽게, 성실히 살아왔지만 이들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잠깐의 심심풀이일 뿐이었다.

여기서의 매 순간은, 마치 1년처럼 길고 고통스러웠다.

임지연은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차분하지만 쓰라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모든 일이 밝혀졌으니, 더 이상 최씨 집안의 중요한 일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할아버지, 어른들…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그녀가 돌아서자 등 뒤로, 심연처럼 무거운 시선 하나가 얹혔다.

하지만 이젠 그 모든 것들이 더는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대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임지연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아는 건, 유하영이 저택에서 돌아왔을 때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아마도 최씨 집안 다른 사람들에게 또다시 무시당했거나, 비난을 들은 게 분명했다.

둘째 형 최민환은 사업 능력이 부족했고, 할아버지 최태웅도 이미 오래전에 그를 포기했기에, 부부는 최씨 집안에서 늘 찬밥 신세였다. 겉으로는 '둘째 형님', '둘째 부인'이라 부르며 예의를 차렸지만, 속으로는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첨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유하영은 다가와 임지연의 팔을 가볍게 꼬집었다.

"너, 미쳤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무슨 기회요?"

임지연이 되물었다.

"어젯밤에 네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내가 몰랐을 것 같아? 온몸이 엉망이었잖아. 사과 한 번 하는 게 뭐가 어렵니? 지금 밖에서는 여론이 안 좋은데, 최강민이 상속자 자리를 굳히려면 너한테 함부로 못 해. 좋은 날을 누릴 기회인데 그걸 송유리한테 넘겨준다고? 그 계집애, 내가 봐도 불여시같은 썩은내가 진동을 하는데!"

유하영은 분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의 약혼자를 가로채고, 약을 먹여 잠자리를 같이하고, 그것도 이름뿐인 '작은 삼촌'과 잠자리를 한 거라면… 엄마는 정말 제가 그런 짓을 하고도 앞으로 좋은 날이 올 거라 생각하세요?"

임지연은 천천히 손을 풀며 대화를 그만두려 했다. 유하영이 어머니로서 특별히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에도 유하영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고, 재혼할 때도 임지연을 반드시 데려가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문제는 유하영이 지나치게 남자에게 의존하는 성향이었다.

이처럼 사람을 삼켜버리는 최씨 집안에서, 그런 유하영이 최민환에게 의존해 살아간다는 건, 애초에 존중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하영의 말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다 결국 막혔다.

"그래도… 사람 눈치 보는 것보단 낫지 않니? 큰 도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네 의붓아버지는 강민이만큼 사업 수완이 없어. 결국 최씨 집안은 전부 최강민 거야. 그런데 네가 그와…"

"엄마, 그만 말해요." 임지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차갑고도 단단했다.

"너… 넌 정말 나를 좀 이해할 수는 없니? 네 의붓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고,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최씨 집안 위아래 누구도 나를 존중해주지 않아. 결국 나는 너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거잖니…"

유하영은 손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눌렀다.

그러자 임지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럼 셋째 도련님한테 가서, 절 그 사람에게 시집보내 달라고 직접 말씀드려 보세요. 지금 당장요."

유하영은 말문이 막혔고, 한 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 누구도 감히 최강민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잠시 적막이 흐른 뒤, 임지연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유하영의 팔을 붙잡았다. "엄마, 혹시… 약 있어요?"

"무슨 약?"

"사후 피임약이요."

임지연은 힘없이 말했다.

"너…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그런 약을 갖고 있겠니? 그런 일이 있어도, 네 의붓아버지는 항상 날 배려해줬는걸…"

"엄마, 지금 최씨 집안 사람들이 분명히 저를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저 대신… 약 좀 사다 주실 수 있나요? 어제가… 배란일이었어요."

임지연은 휴대폰 앱을 열어 빨간색으로 표시된 날짜를 바라보며 불안에 휩싸였다. 그녀는 상아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아를 다시 낳을 수 없었다.

이번 생에서 상아는, 반드시 따뜻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야 했다. 절대로 자신을 따라 고통받아서는 안 되었다.

유하영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내가 갔다올게."

"네…"

임지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유하영은 곧장 나가지 않았다. 직접 사러 가는 대신, 믿을 수 있다고 여긴 하인을 불러 몇 마디를 속삭였다. 하인이 나가자 유하영은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지금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대청에 쏠려 있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지시한 그 말들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30분 후. 유하영은 약 봉투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빨리 먹어. 오래 끌면 약 먹어도 소용없어."

임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 봉지를 받아들었다.

약을 꺼냈지만, 그녀는 곧장 먹지 못했다. 손이 멈췄고, 본능적으로 아랫배에 손이 올라갔다.

한때 이곳에는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딸이 있었다. 그토록 이해심 많고,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아이.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상아가 축복받지 못한 출생을 반복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혼자 병상에서 죽어가며 공포에 떨게 할 수는 없었다.

그때 상아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상아야. 엄마를 탓하지 마. 이번 생에는, 꼭 너를 아껴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해.

임지연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약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들어, 물을 마구 들이켰다. 한 방울의 망설임도, 한 치의 후회도 남기지 않기 위해.

단지 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임지연은 마치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을 삼키고 또 삼키는 동안, 그녀의 눈물도 함께 뚝뚝 떨어졌다.

최강민… ’당신은 결국, 당신이 가장 미워하던 두 사람——나와 상아를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군요.’

슬픔이 지나간 뒤, 임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일어나 약상자를 처분하려 했다.

그 순간——

방문이 쾅, 하고 거칠게 밀려 열리며 벽에 세게 부딪쳤다. 방 전체가 두 번쯤 요동치는 듯 흔들렸다.

임지연도, 유하영도 아무런 대응을 할 틈이 없었다. 곧장 최태웅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두 사람의 양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지연은 다시 대청으로 끌려갔다. 누군가의 손에 세차게 떠밀리며 앞으로 넘어졌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어젯밤 고통받은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몸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자 그녀는 이전보다 더한 혐오와 경멸이 뒤섞인 시선들과 마주쳤다. 특히 최강민의 먹빛 눈동자는, 짙고 위험하며 싸늘했다.

주변은 숨소리조차 사라진 듯 조용했다. 그 고요 속에, 송유리의 낮은 흐느낌만이 묻어났다.

임지연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눈물이 맺힌 송유리의 눈동자엔, 알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바로 그다음 순간 약 상자 하나가 임지연의 발 앞에 내던져졌다. 그 충격에 약들이 한 알씩 바닥에 흩어졌다.

최태웅은 분노에 찬 손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이게 대체 뭐냐! 확실하게 말해!"

임지연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숨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말했다.

"피임약입니다."

그러자 최강민이 옆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겨울 서리처럼 차가웠다.

"피임약—? 그렇단 말이지?"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에는 뚜렷한 조롱이 깃들어 있었다.

임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약상자와 약통을 확인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종이로 된 약 상자에는 분명 "48시간 사후 피임약"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약 통에는 분명하게 "임신 촉진제"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