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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사람의 탈을 쓴 짐승

시선을 느낀 임지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최강민이 서 있었다.

차갑고 단정한 검은 정장, 길고 곧은 손가락은 이마 옆에 얹혀 있었고, 햇빛 아래에서 피빛 반지는 묘하게 냉기를 띠며 빛났다.

그의 옆에는 송유리가 기대 서 있었다. 송유리는 무언가 조근조근 말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다. 최강민의 표정은 담담하면서도 어딘지 부드러워 보였다.

임지연은 시선을 거두며, 침착한 척 손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옆에 있던 남자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분… 셋째 도련님이시죠? 약혼녀분을 정말 아끼시나 봐요. 직접 데려다주시다니."

그렇지. 누가 봐도 최강민이 송유리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다 알 수 있었다. 오직 전생의 임지연만이, 바보처럼 그를 기다렸고, 그를 사랑했다.

임지연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유하영이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마침 만났으니, 빨리 가서 작은 삼촌께 인사드려."

"안 갈래요." 임지연은 손을 뿌리치며, 자리를 피하려는 듯 움직였다.

"이 녀석이—" 유하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유리의 다정한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사모님? 지연아, 우연이네. 이분은…?"

송유리는 자연스럽게 최강민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임지연 옆의 남자를 살피고 있었다.

유하영은 본래 송유리를 ‘가식적인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최씨 집안의 일을 겪은 이후로는 그녀가 결코 가식적이지만은 않고 순진하지도 않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유하영은 조용히 남자 쪽으로 다가가, 약간 자랑스럽게 말했다.

"조씨 집안 도련님, 조성진이에요. 훌륭한 인물이라, 우리 모두 아주 만족해하고 있어요."

그녀가 내뱉은 ‘우리 모두’라는 표현에는 의도적인 강조가 담겨 있었다.

임지연은 급히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고,

그 순간, 마주한 시선이 눈에 띄게 깊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성진은 신사답게 앞으로 나섰다. "강민 도련님."

하지만 최강민은 그를 보지도 않고, 시선을 임지연에게만 떨어뜨린 채 입꼬리를 조롱하듯 천천히 올렸다.

"‘우리’?"

그는 마지막에야 고개를 돌려 조성진을 훑어보았다. "정말… 훌륭한 인물이네요."

임지연의 등이 굳어졌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분명 가볍게 넘긴 말투였지만, 그 안에 깃든 분위기는 그녀를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송유리는 조성진을 천천히 훑어보며, 눈 밑으로 경멸의 기색을 아주 잠깐 드러냈다.

그녀 눈에 조성진은, 최강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와 임지연은, 서로 어울리는 한도 내에서 잘 어울릴 뿐.

하지만 송유리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성진 도련님 참 멋지시네요. 지연아, 잘 잡아야 해. 얌전히 살아가는 게 제일이야. 괜히 이상한 일들 꾸미지 말고."

그 말에 담긴 의도는 분명했다. 조성진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유하영은 참지 못하고 반박하려다 임지연에게 붙잡혔다. 지금 이 자리에서 괜히 싸움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송유리의 함정에 말려들 수 있었다.

임지연은 고개를 들어,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최강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누구와 무슨 일을 했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송유리가 퍼부은 비방을 묵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지연은 조용히 냉소를 지으며, 유하영의 팔을 끌어당겼다. "엄마, 조 선생님. 가요."

조성진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했고, 임지연과 유하영을 위해 직접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지연은 오 교수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지연아, 미안해. 셋째 도련님이 학교 측에 말해서, 송유리에게 대회 자리 하나를 더 주기로 했어.」

「알았어요.」

그녀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사실 이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속은 여전히 답답했고, 숨이 턱턱 막혔다. 마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채 허우적대는 것처럼.

그녀는 분명 한 발 앞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여전히 그의 발밑에 짓눌린 채였다.

운명은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가지고 놀 작정이인걸까?

식당에 도착했다.

조성진은 신사적으로 그녀의 의자를 빼주고, 따뜻한 음료 한 잔을 시켜주었다.

"기분이 계속 안 좋아 보이네요. 혹시 불편하신 거 아니에요? 이 와인차는 찬 기운을 풀어주거든요."

"감사합니다."

친절한 사람은, 언제나 좋은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다.

임지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 모습을 본 유하영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진 도련님, 우리 지연이는 좀 느린 편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에요. 지연 아가씨, 참 좋은 분 같아요. 그리고…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조성진의 시선이 임지연의 얼굴에 머물렀고 그의 미소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임지연은 조금 어색해하며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차를 마셨다.

식사 후.

유하영은 조성진이 무척 마음에 든 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더니 전화를 받는 척, 핑계를 댔다.

"지연아, 네 삼촌이 나 좀 급하게 찾는다네. 먼저 가볼게. 너희 둘이 영화라도 보면서 서로 좀 더 알아봐."

임지연이 말릴 틈도 없이, 유하영은 벌써 차에 올라 떠나버렸다.

임지연은 무력하게 몸을 돌려, 조성진을 향해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해요. 사실 이 소개팅은 제 본의가 아니었어요. 그냥… 어른들 뜻이라…"

조성진은 가볍게 웃었다.

"저도 비슷해요. 하지만 사모님께서 임무를 맡기셨으니, 영화 한 편 정도는 괜찮잖아요? 양쪽 부모님께 보고는 해야 하니까요."

그의 말에 임지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성진이 예매를 하며 휴대폰을 넘기다 무심히 물었다.

"지연 아가씨, 지금 어디 사세요? 근처 영화관에서 보면 나중에 댁에 돌아가기도 편할 테니까요."

그가 계속해서 배려 깊은 태도를 보이자, 임지연도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어요. 10시 전까지만 돌아가면 돼요."

"좋아요. 예매했어요."

조성진은 시원하게 결제를 마쳤다.

임지연은 마냥 신세지고 싶지 않아, "얼마예요? 제가 드릴게요." 하고 물었다.

조성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제 성의를 안 봐주실 건가요?"

임지연은 살짝 웃으며 말을 바꿨다.

"그럼 제가 음료수 살게요."

약속이 정해지고,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조성진은 시간을 잘못 예매했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7시 20분 영화로 예매하려 했는데, 실수로 8시 20분을 눌러버린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기숙사에 돌아갈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서두르지 마요."

결국 마지막 2분을 남기고, 임지연은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조성진은 학교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임지연은 곧장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당겼다.

하지만—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잠겼다.

임지연은 놀라서 몇 번 더 세게 손잡이를 당겼지만, 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조성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얼굴— 하지만 눈빛만큼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그의 눈 속엔 농염한 욕망이 가득했고, 그는 천천히 입술을 핥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임지연은 한 순간도 망설일 수 없었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경고했다.

"차 문 열어주세요. 안 그러면… 바로 신고할 거예요!"

조성진은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전혀 당황하지도, 급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손을 들어 차량 내 화면을 한 번 터치했다. "네 휴대폰, 다시 확인해봐."

임지연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호가 가득했던 휴대폰은 순식간에 신호 없음으로 변해 있었다.

신호 차단기였다.

지금 이 차 안은 그녀에겐 고립된 감옥이 되었다.

조성진의 태연한 미소를 바라보며, 임지연은 이 남자가 절대로 이런 일을 처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더는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임지연은 온 힘을 다해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다행히 주차장엔 아직 차들이 남아 있었다. 분명 누군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옆 차의 전조등이 켜졌고, 그 빛은 은은하게 번지며 차체의 고급스러운 윤기를 드러냈다.

그 차—최강민의 차였다.

임지연은 놀란 눈으로 그 차량을 바라보았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최강민을 본 순간, 마치 구세주를 마주한 듯한 간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셋째 도련님! 셋째 도련님!!"

하지만 바로 그때 가느다란 손이 최강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를 차 문 쪽으로 눌렀다.

송유리.

그녀는 최강민에게 깊게 몸을 기울여 입술을 맞췄다.

뜨겁고, 깊은 키스였다.

그렇게 임지연의 구조 요청은 무시되었다.

최강민의 차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자리를 떠났다.

임지연은 그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다시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조성진이 그녀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으읍! 으으읍!"

숨을 쉴 수 없었다. 몸은 덜덜 떨렸고, 그저 눈을 뜬 채로 멀어져가는 최강민의 차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달빛 아래 은밀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품고 떠나는 그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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