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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는 송유리만 신경 썼다

임지연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그 순간, 최강민은 고개를 돌려 나무 뒤의 연인들을 바라보았다.

"볼일 있어?" 차갑고 짜증 섞인 말투였다.

상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바로 가겠습니다."

연인들은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임지연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최강민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손목은 여전히 그에게 잡혀 있었다.

"짐 챙겨."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고, 상의할 여지 따윈 없었다. "진이수한테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그가 널 아파트로 데려다 줄 거야."

그 말투는 언제나처럼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명령이었다.

임지연은 굳어버렸다. 긴 속눈썹이 몇 번 떨렸고, 그녀는 마음속의 파도를 억누르려 애썼다.

최강민에게서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말 잘 듣는 인형처럼, 필요할 땐 쓰고, 질리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존재. 그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존재’가 아닌 ‘소유물’이었다.

임지연은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정말 걱정된다면, 한 달 후에 함께 병원 가서 검사하면 되잖아요."

최강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 밑으로 한 줄기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임지연이 이렇게 반항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둘 사이에 무겁고 냉랭한 기운이 흘러가려던 그 순간 최강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유리였다.

임지연은 그 틈을 타 조용히 두어 걸음 물러났고,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작은 삼촌, 바쁘신 것 같으니 전 먼저 가볼게요."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미련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돌아섰다.

그 뒤에서, 검은 눈동자가 조용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시선이었다.

휴대폰은 몇 번 더 울렸고, 마침내 최강민은 무심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강민 도련님… 기자들이 너무 많아요. 무서워요." 송유리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바로 갈게."

최강민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연은 고개를 돌려, 그가 황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를 저렇게까지 조급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송유리뿐이지.

임지연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송유리는 휴대폰을 꽉 쥔 채, 앞에서 다정하게 대화하는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강민이 그런 곳에서 있다니… 놀랍네. 숲에서 뭐가 있었던 걸까?"

"근데, 거기 있던 여자 누구였어? 꽤 강하게 지키던데."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송유리지."

하지만 송유리는 그들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고, 최강민 곁에 있던 여자가 누구였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임지연.

하룻밤 사이, 임지연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고 달라진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최강민 역시 변해 있었다.

송유리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려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

기숙사. 졸업이 가까워오면서, 건물 전체가 다소 한산해 보였다.

임지연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조용히 옷장을 열었다. 그 안 깊숙한 곳에서 꺼낸 것은, 그녀가 밤낮으로 공들여 만든 디자인이었다.

전생에서 이 디자인들은 결국 모두 최강민의 손을 거쳐 송유리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송유리는 그 작품들로 단숨에 유명한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었다.

8년 뒤, 송유리가 해외에서 귀국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당시, 셋째 도련님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날 위해 네 디자인을 넘겨준 거야. 너한테 빚졌다고? 당연하잖아? 네가 8년 동안 그 사람한테 몸을 줬고, 아이까지 키워줬는데, 그 사람은 여전히 널 혐오하잖아. 어휴... 그 정도면… 너, 네가 생각해도 정말 한심하지 않아?"

그때 임지연은 온몸과 마음이 지쳐 그대로 쓰러졌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최강민이 그녀의 8년간의 노력을 송유리에게 내어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건, 단지 ‘송유리의 웃음’을 위해서였다.

그녀의 꿈은 두 번, 이 두 사람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누구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연아, 뭐 하고 있어?"

심민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무것도 아냐. 졸업이 다가오니까, 옷장 정리 좀 하고 있었어."

임지연은 무심한 듯 대답하며, 디자인을 다시 옷장 깊숙한 곳에 넣고 자물쇠를 잠갔다. 돌아서자 심민희가 그녀의 옷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빛 속의 속내는 읽을 수 없었지만, 확실히 뭔가를 엿보고 있었다.

임지연은 못 본 척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심민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웃었다. "너 밥 사주려고 왔지. 그리고… 오늘 일도 미안해서."

그 말을 듣고, 임지연은 시선을 내려 그녀 주머니에 달린 인형 키링을 보았다. 그걸 본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친구잖아.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예전에 자주 가던 3층 식당에서 떡볶이 먹을래?"

그 제안에, 심민희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눈이 휘어질 정도로 기뻐 보였지만, 그 눈 밑으로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조롱은 놓칠 수 없었다.

아마도, 나를 여전히 ‘다루기 쉬운 바보’로 여기는 것이겠지.

식당으로 향하던 길. 그때 유하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임지연은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고, 심민희를 피해 전화를 받았다.

"엄마."

"지연아, 좋은 소식이 있어. 네 삼촌이 아는 고객 아들이 막 해외에서 돌아왔대. 잘생기고, 능력도 뛰어나고, 집안도 좋아."

"내일 그 사람이랑 밥 한번 같이 먹어보는 게 어때?"

유하영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엄마… 저 이제 막 졸업하는데, 아직 결혼은 생각 없어요."

"지연아, 나도 네 사진 보여줬는데, 정말 괜찮대. 그 집안은 네 삼촌이랑도 협력 관계고, 네가 그쪽에 시집가면 나도 마음이 놓이지. 그리고 지금 인터넷에서 네 소문이 잠잠해지지 않잖아… 엄마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

유하영의 말에는 걱정이 묻어났고, 임지연은 그 속뜻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이 소개팅, 피할 수 없는 자리라는 걸.

"... 알겠어요."

"그래, 내일 보자."

전화를 끊고 돌아서자, 심민희가 재빨리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심민희, 너 바빠?"

심민희는 재빨리 휴대폰을 치우고 설명했다. "이제 인턴 준비해야 하잖아. 난 너처럼 대회에 나갈 실력이 없으니까, 이력서를 여기저기 뿌리고 회사 인사부 쪽이랑 이야기도 해야 하고…"

"아 그래, 가자." 임지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심민희는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팔짱을 끼며, 조심스레 물었다. "곧 대회잖아. 디자인 아이디어는 나왔어?"

임지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마. 이미 완성했어. 분명 완벽할 거야."

"…정말?" 심민희는 손가락을 꼬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냥… 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서. 나는 4년 내내 열심히 배웠는데도, 디자인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야."

심민희는 눈을 내리깔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임지연은 그녀를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조차 아깝다고 느껴졌다.

"그럼 앞으로 더 노력해."

그 말에 심민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입술을 꾹 깨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식사가 끝난 뒤. 임지연은 심민희에게 조용히 말했다.

"내일은 나갈 일이 있어서, 굳이 밥 먹으러 나 찾아오지 않아도 돼."

심민희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 "알겠어."

다음 날 아침.

룸메이트들은 모두 일찍 면접을 보러 나갔고, 기숙사엔 임지연만이 남아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노크 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문을 열자, 어머니가 기숙사 방문 앞에서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아직도 자고 있니? 벌써 몇 시야. 꾸미지도 않고 뭐 하는 거야?"

"아홉 시예요."

임지연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투덜댔다. 어젯밤 거의 밤을 새웠기에, 움직일 기운조차 없었다.

유하영은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끌어당겨 화장실로 데려갔다. 작고 협소한 화장실을 흘겨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일찍이 아파트 하나 구하라고 했잖아. 꼭 이런 기숙사에서 살겠다고 고집하더니."

"엄마, 경시에서 아파트가 얼마나 비싼 줄 아세요? 제가 부자한테 빌붙으려 한다는 소리나 듣고 싶으세요?"

임지연은 천천히 물을 틀며 세수를 시작했다.

유하영은 그녀의 속내를 단번에 간파했다. "지금 시간 끌고 있는 거지?"

임지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유하영은 그녀가 씻고 꾸미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학교 정문 쪽으로 향했다.

"여기요!"

상쾌하고 맑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지연은 하이힐이 익숙하지 않아 한 발 헛디뎠고,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재빠르게 붙잡았다.

"괜찮아요?"

"괜찮…"

임지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꿰뚫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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