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나는 너를 좋아해
임지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최씨 집안에서 벌어진 소동을 겪고 난 후, 그녀는 더 이상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걸, 특히 송유리에 대해서는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송유리가 최강민에게 전화를 걸어, 누군가 자신을 모함했다고 울먹이며 말하던 장면. 그 순간, 임지연은 이미 직감했다. 송유리와 심민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심민희는 임지연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써온 일기까지도.
그녀가 최강민과 하룻밤을 보낸 이후, 인터넷에는 곧바로 '임지연이 최강민에게 약을 먹이고 같이 잤다'는 내용이 담긴 짝사랑 일기가 퍼졌다. 임지연은 확신했다. 그것 역시 심민희의 짓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미리, 몰래 일기장을 바꿔두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그녀를 따라왔다. 심민희였다.
가는 내내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하다가도 망설이며, 임지연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정작 임지연은 평온했다. 방금 배신당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기숙사 건물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결국 심민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임지연의 팔을 붙잡고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 형편이 너무 어렵고, 나도 겁이 많잖아… 나 정말 송유리 같은 사람이랑 맞설 수 없어. 그 사람들이 나 겁줘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
임지연은 당장 그녀와 인연을 끊지는 않았다. 아직 송유리와 심민희가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짝 한숨을 쉬고, 일부러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민희야, 나… 널 정말 친구로 생각했어. 그런데… 넌 방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었어?"
"다 송유리가 시킨 거야. 그렇게 말하라고 강요했어. 안 그러면 내가 졸업 못 하게 만들겠대. 우리 집은 간신히 내 학비만 겨우 내고 있는데, 졸업 못 하면… 난 정말 끝이야… 지연아, 제발 날 믿어줘…"
심민희는 임지연의 손을 꼭 붙잡았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임지연은 그런 그녀의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며 말했다.
"민희야, 물론 널 믿어. 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 해."
그 말을 들은 심민희는 눈물을 머금은 채 멍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뭘… 조심하라는 거야?"
임지연은 곁눈질로 멀리서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실루엣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민희야, 셋째 도련님은… 유리 언니 거야. 비현실적인 생각은 하지 마. 방금 네가 셋째 도련님을 바라보던 눈빛… 너무 끈적거렸어."
"너 이상한 말 하지 마!" 속을 찔린 심민희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그런 수줍은 모습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송유리의 시선에 고스란히 포착되었다. 하지만 임지연은 못 본 척하며, 심민희를 끌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 순간 화려한 차량 안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임지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막 기숙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심민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곧장 휴대폰을 내려놓고 말했다.
"지연아, 나 일이 좀 생겨서 먼저 갈게."
"응."
임지연은 심민희가 급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송유리가 분명 그녀에게 뒷일을 마무리 지으러 갔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기숙사 안엔 룸메이트들이 모두 나가고 없었다. 임지연은 조용히 앉아 물 한 잔을 마시며, 최강민의 독사 같은, 음울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의 눈동자…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가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임지연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제 어떤 약점도 남겨선 안 된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바꿔둔 일기장을 들고 기숙사를 나섰다.
마침 그때, 심민희가 계단에서 허둥지둥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반쪽 얼굴은 크게 부어 있었고, 그 모습은 딱 개들의 싸움이 시작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임지연은 심민희를 부르지 않고, 곧장 혼자 조용한 작은 숲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아무도 없는 장소였다.
그녀는 일기장을 펼쳤다. 그 안엔 그녀가 최강민을 향해 써 내려간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몇 페이지를 넘긴 후, 임지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곧 일기장을 돌무더기 위에 올려놓고 성냥을 켰다. 불꽃이 단번에 치솟았고, 살랑이는 바람은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며, 조용히—그러나 확실히 태워갔다. 마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던 짝사랑이, 드디어 완전히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불빛 속에서 재가 피어오를 즈음, 조용히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는 묵묵히, 거의 타버린 일기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두운 밤 속에서도 차갑고 단단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임지연 앞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결국 그녀를 등지고 좁은 공간 안에 가둬버렸다. 최강민이었다.
그는 긴 손으로 임지연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을음이 묻은 그녀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훑었다. 극도로 애매한 동작이었고, 그의 눈에는 묘한 조롱기가 스쳐갔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그런데 이 일기는 또 뭐지?"
"작은 삼촌, 오해하셨어요. 그건 그냥… 폐지에 불과해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해요."
임지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폐지’라는 말에 최강민은 검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낮게 되물었다. "그래?"
그리고 다음 순간 임지연이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망설임도 없이 손을 불더미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아직 다 타지 않은 반쪽짜리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는 그 위에 적힌 단정한 글씨를 한 번 훑어보고, 낮고 깊은 목소리로 글귀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최강민은 그 종이를 두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이미 가장자리는 검게 그을렸지만, 글자는 또렷했다.
그는 무심하고 나른한 눈빛으로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그렇게 애틋한 고백이 적혀 있음에도 어떠한 감정 변화도 없었다. 담담했고, 차가웠으며, 무감각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최강민은 언제나 이렇게 무심하고, 무정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조롱은 여전히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들었고, 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녀의 과거 사랑이, 그의 눈엔 그저 개미처럼 하찮고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임지연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가볍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글이에요. 그러니 당신이라고 단정할 수 없죠. ’당신’은 누구든 될 수 있어요. 단, 절대로 작은 삼촌일 리는 없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 벗어나려 했지만, 최강민이 손목을 낚아채며 그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천천히 몸을 숙이자,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임지연을 감쌌다. "누구야?"
"임지연, 나를 건드려 놓고 도망치겠다고?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임지연은 몇 번 몸을 떨며 저항했지만, 그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옆 작은 길에서 연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불 타는 냄새 안 나?"
"응, 자기야 내 마음이 불타고 있잖아."
"으악 이 바보야! 누가 그런 농담하래. 너… 으응… 나빠. 함부로 그런 데 키스하지 마."
"한 번만 더 할게."
간간이 들려오는 자극적인 키스 소리에, 임지연의 머리가 짜릿하게 울렸고, 온몸이 통제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필 최강민이 그 반응을 눈치챘다. 그의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고,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임지연은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놓아주세요."
그러나 최강민의 눈빛은 더 깊어졌고, 낮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크게 말해봐. 사람들한테 들릴 정도로. 들키는 거… 정말 두렵지 않아?"
임지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그 연인들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거기 누구야? 누가 우리 데이트를 방해해?"
"저기… 나무 뒤에 누구 있는 거 같은데?"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에, 임지연은 긴장해 식은땀을 흘렸지만 눈앞의 최강민을 밀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가요."
하지만 최강민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몸에 더욱 가까이 붙었다. 단단한 가슴이 그녀에게 스치듯 밀착되었고, 그것은 마치 임지연을 불태우기라도 하려는 듯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머물렀고,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모든 동작은 대낮에 그녀를 극도로 난처하게 만들었다.
"누구야?"
“아니면… 지금 네 모습을 사람들이 보게 해줄까?"
임지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고, 그 감각은 그녀의 심장을 마비시킬 만큼 아팠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를 원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녀의 감정 따윈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녀가 괴로워하든, 아파하든 그는 언제나 차갑게 외면했다.
"…응?" 그의 목소리는 낮고, 이제는 인내심이 바닥난 듯했다.
연인들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자, 임지연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없어요."
그 순간, 최강민은 그녀를 확 끌어안아 나무 뒤로 숨었다. 한 손은 나무 기둥에, 다른 손은 그녀의 허리에 감겨 있었다. 움직일 수 없이 단단히 고정됐고,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압도적인 키에 위압적인 기세. 그 깊은 눈빛에는 위험한 빛이 도사리고 있었고, 날카롭고 차가운 기운이 퍼졌다.
나무 뒤에서, 연인들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저기, 나무 뒤에 누구 있는 거 아니야?"
"장난 좀 그만해, 진짜!"
임지연은 온몸이 경직된 채,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최강민은, 또다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