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엄청난 편애
진아름도 이마리가 최근에 맞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진아름: "이렇게 빨리 혼인신고한 거, 혹시 할머니 때문이야? 아니면… 그 사람 때문이야?"
강지석.
이마리: "그냥…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어."
진아름은 메시지를 보자마자 다급해졌다.
"이마리, 상대방 성품은 제대로 알아봤어? 한 번 만나보고 네 인생을 그 사람한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해? 적어도 나한테 데리고 와서 어떤 사람인지 좀 봐야지."
직장에서 ‘무서운 언니’로 통하던 진아름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고, 특히 남자 보는 데 있어선 더욱 그랬다.
이마리가 급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급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첫 만남에 바로 혼인신고라니.
이마리: "내 눈을 믿어.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사람이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26년 동안 우유부단했던 내가, 이씨 가문에서 반평생을 고통 속에 보냈어.
이제는, 한 번쯤 대담하게 살아보고 싶어."
진아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
이마리: "오늘은 오후에 감연동에 가서 할머니를 뵐 거야. 은화성에 돌아오면… 그때 보여줄게."
진아름은 그 말을 듣고, '이마리가 괜찮다고 판단한 남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오후 2시 30분, 고연우와 이마리는 감연동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이마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할머니를 불렀고,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이마리의 손을 꼭 잡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야, 너 할미 잡을 셈이냐?"
할머니는 정말 화가 난 듯했고, 동시에 안타까워 보였다.
"내가 너보고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한 건, 네가 얼마나 고집 센지 알기 때문이야. 그래서 가족이든 사랑이든, 무엇이든 붙잡고 다시 시작하라고, 강지석 그놈에게서 떠나고 이씨 가문에서도 벗어나서 네가 정착할 곳을 빨리 찾길 바랐던 거야.
혹시라도 네가 강지석을 그리워하다 인생을 허비할까 봐, 그게 걱정돼서 더 재촉한 거지. 근데 너는…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자마자 혼인신고를 했다고?
너 정말… 이 할미 화나게 하려고 작정했니?"
"할머니…"
이마리가 막 할머니를 위로하려는 순간, 고연우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할머니께 드릴 선물들이 들려 있었다.
홍삼, 해삼, 말린 전복. 모두 값이 꽤 나가는 귀한 것들이었다.
"할머님."
고연우의 목소리는 깊고 단정했으며, 사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성숙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할머니의 시선이 조용히, 이 낯선 손녀사위에게로 향했다.
생김새는 나쁘지 않았다.
고연우는 말을 이었다.
"제가 듣기론, 할머니께서 마리를 제게 맡기는 걸 걱정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결혼을 목적으로 만나 서로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빨리 혼인신고까지 하게 된 겁니다."
"할머님께서 저를 시험해보셔도 좋습니다. 꼭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을 거예요. 괜찮으시겠어요?"
고연우의 말투는 진지하고 진심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마리는 혹시 할머니가 그를 나무라진 않을까, 조마조마해졌다.
왜냐하면 혼인신고를 먼저 제안한 쪽은 자신이었고, 어떻게 보면 고연우는 그저 거기에 응한 '피해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할머니, 그 사람 잘못 아니에요. 결혼하자고 한 건… 저예요."
이 할머니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이마리를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이미 혼인신고는 끝났고, 일이 벌어진 이상 더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고연우의 말은 할머니의 마음에 어느 정도 닿은 듯했다.
그가 단지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었다면, 할머니는 절대 손녀를 그런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주전자에 차를 내리며 말했다.
"좋아, 일단 와서 앉으려무나."
고연우는 자연스럽고 우아한 동작으로 자리에 앉아, 할머니께 직접 차를 따라드렸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품격이 느껴졌고, 할머니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제야 이마리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조금 누그러진 걸 느끼고 마음속 짐을 살짝 내려놓을 수 있었다.
거실에서 고연우와 이 할머니는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눈 후, 그녀는 고연우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었다.
이 할머니는 한때 비즈니스 업계에서 고생도 많이 해봤고, 경험도 풍부했다.
지금은 일찍 은퇴해 시골에서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손녀가 데려온 이 남자는 겉보기에도 범상치 않았고, 기품이 느껴지는 동시에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손녀가 운이 좋아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노인의 눈빛엔 고연우에 대한 감탄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짙은 한숨이 깔려 있었다.
마리는 세 살 무렵, 병 치료를 위해 부모에게서 떨어져 시골에 맡겨졌다.
그 곁엔 보모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늘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한 번은 보모가 제대로 신경을 쓰지 않아 마리를 채소밭에 하루 종일 내버려둔 적이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팠던 마리는 채소 잎을 입 가득 씹어먹었고, 이를 본 이웃들이 참다못해 그녀를 데려가 분유를 먹여 겨우 큰일을 면했었다.
결국 마리의 어머니가 시골까지 오긴 했지만, 딸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집에서 키우던 늑대개 때문이었다.
나리가 개털 알레르기가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 마리의 엄마는 큰 개를 시골로 보내고, 보모에게 돌보게 맡긴 것뿐이었다.
이 모든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일들이었다.
한 어머니의 딸에 대한 편애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일 수 있다니, 그 일을 계기로 그녀는 일찍 사업에서 손을 떼고 불쌍한 손녀를 직접 돌보기로 결심했다.
마리는 어린 시절을 강하게 버텨냈고, 그 결과 지금처럼 차갑고 독립적인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나리처럼 부모 앞에서 약해지거나 애교를 부리지 못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말없이 삼키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눈엔 그녀가 차갑고 까다롭게만 보였다.
나리도 분명 그녀의 손녀였지만, 본인은 이나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마치 이씨 가문에 빚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나이를 먹고 세상을 떠난 뒤 마리를 지켜줄 사람이 없을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할머니는 마음속으로 바랐다.
이 남자가 앞으로 그녀의 손녀를 잘 지켜줄 수 있기를.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넌 좀 더 앉아 있어라. 내가 밭에 가서 채소 좀 따오마."
"할머님, 제가 같이 갈게요."
고연우가 일어섰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다. 너는 방에 가서 마리를 좀 보거라. 이 녀석, 아마 자고 있을 거야."
노인은 신혼부부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고연우도 그 속뜻을 당연히 눈치챘다.
이 갑작스런 결혼이 그에게는 꽤 흥미로운 경험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할머니에게 쫓기듯 방에 들어간 이마리는 침대에 누워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과거의 수많은 기억들을 헤매다 점점 악몽으로 이어지는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고연우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불 속에 파묻힌 이마리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는 그녀의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었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는 이마리였지만, 그 속엔 여린 마음과 고집스러운 진심이 숨겨져 있었다.
고연우의 눈빛 아래에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결이 어렸다.
이마리는 눈가에 닿는 따뜻한 감촉에 놀라 눈을 떴고, 자신의 위로 드리워진 큼직한 그림자를 보고 순간 흠칫했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니, 고연우였다.
그가 언제 들어왔는지, 전혀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남자의 얼굴은 너무 잘생겼고, 그 다정한 시선과 행동이 오히려 이마리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이 남자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날 보고 있었다니?
이마리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새하얘졌고, 마음은 거의 타버릴 듯 요동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