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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박씨 집안을 떠나다

"진심입니다, 회장님. 이게 다들 원하시던 거 아니었나요?"

박연진은 입꼬리를 비틀어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멋지게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좋아! 배짱 한 번 두둑하네! 어디 가! 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마! 나 박영호도 너 같은 딸 둔 적 없으니까!"

박영호도 욱하는 성질이 올라왔다.

어린것이 감히 애비인 자신을 협박해? 집을 나가? 관계를 끊어?

박연진은 박씨 가문 빌라를 떠났다.

캐리어를 끌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택시를 한 대 잡아탔다.

택시 기사는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마침 박씨 가문의 진짜, 가짜 딸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님, 어디로 가시죠?"

"...근처 여관으로 가 주세요. 신분증 필요 없는 곳으로요."

여관을 택한 이유는.

첫째, 돈을 아끼기 위해서.

둘째,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호텔에 묵으려면 신분증이 필요했다.

마스크와 모자로 가려봤자 소용없었다.

지금 박연진의 사진과 신상 정보는 전부 공개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박연진은 곧 근처의 한 여관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내고, 방을 잡았다.

박연진은 짐을 한쪽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퀸! 드디어 연락됐네요! 세상에!"

"블랙넷 은퇴하고 잠수 타신 줄 알았잖아요!"

박연진은 전화기 너머의 상대가 이렇게 흥분할 줄 알았다는 듯,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뗐다.

"도현 씨, 미안해요. 돈이 필요해서. 일 좀 하려고요. 빠른 걸로."

"지금 복귀 선언하시는 거예요? 맙소사! 블랙넷 또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네요!"

"퀸, 당신 이름값이 있는데, 일 구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죠! 기다려요!"

안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박연진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익숙하게 비밀 URL을 입력하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쳤다.

익숙한 화면이 그녀를 반겼다.

화면에는 붉은 해골이 새겨진 낡은 구리 문이 나타났다.

음산하고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퀸."

해커들이 퀸의 복귀에 열광하는 동안, 박연진은 이미 일을 받았다.

"퀸, 일 들어왔어요. 테러 조직 방화벽 뚫는 거. 10억. 현찰."

"접수."

컴퓨터 화면에 수많은 코드와 프로그램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번만 봐도 어지러울 광경이었지만,

박연진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는 여유롭게, 아주 간단하게 테러 조직의 방화벽을 뚫어버렸다.

"도현 씨, 끝났어요."

"좋아요. 10억 보낼게요. 계좌는 그대로죠?"

"네. 도현 씨, 수수료 2억은..."

"제 최고의 파트너가 돌아온 기념 선물이라고 치죠. 전에 은퇴하면서 수입 전부 기부했잖아요. 지금 돌아온 거 보면 무슨 일 생긴 것 같은데, 돈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고마워요."

박연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과거의 감각이 다시 몸속으로 돌아왔다.

다시 태어난다는 거, 참 좋네.

블랙넷 안에서 박연진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은 안도현 뿐이었다.

"신경 써요, 퀸. 나 있잖아요. 무슨 일 있으면 도와달라고 해요. 온 세상이 당신한테 등을 돌려도, 난 망설임 없이 당신 편에 서서 세상이랑 맞짱 뜰 거니까! 난 당신 믿어요!"

"고마워요, 도현 씨. My good friends forever."

"아, 그리고 퀸. 당신이랑 혈액형 같은 사람이... 저한테 연락했었어요."

박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혈액형은 아주 특별했다.

전설 속의 '황금혈', 오메가형 혈액이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혈액형 중 가장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이 피는 누구에게나 수혈해 줄 수 있었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받으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만약 피를 흘리면, 오직 같은 오메가형 혈액을 가진 사람에게만 수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박연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늘 자기 피를 비축해 두었고, 안도현에게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었다.

"상대방이 뭐라고 했죠?"

"그쪽에서 좀 이상한 요구를 하던데..."

"자기랑... 같이 자 달래요."

박연진은 순간 멍해졌다.

"무슨 뜻이죠?"

"그쪽도 이 혈액형 부작용 때문에, 예전부터 잠을 통 못 잤나 봐요. 요즘 그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고요."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체취를 맡아야만 잠들 수 있대요."

"조건은 엄청나게 불렀어요, 퀸."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박연진은 창가로 다가갔다.

휴대폰에서 '띵동' 소리가 울렸다.

계좌에 10억이 입금되었다.

이 돈이면 박연진은 한동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오메가형 혈액 부작용..."

박연진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사실.

박연진 역시... 그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박연진은 휴대폰을 꺼냈다.

열여섯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예상대로, 박씨 집안에서 온 전화는 단 한 통도 없었다.

열여섯 통의 부재중 전화. 전부 박연진의 대학 단짝인 서소정에게서 온 것이었다.

지난 생에 박연진은 박씨 집안의 '가족애'라는 지독한 늪에 빠져,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며 살았다. 게다가 오메가형 혈액 부작용이 가져오는 악몽에 시달리며, 자아를 잃고 우울증으로 자살할 뻔했다.

만약 서소정이 곁에 없었다면, 박연진은 진작에 박씨 집안에 학대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박연진은 서소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3초 만에 연결되었다.

"세상에, 연진아, 너 괜찮아? 내가 어제 밤 10시에 실검 뜬 거 봤어!"

"소정아, 미안. 어제 박씨 집에서 나와서 거처 좀 구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뻗었어. 메시지 바로 못 봤네."

"박씨 집에서 나왔다고?!"

박연진은 서소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 일이... 연진아, 너 진짜 힘들었겠다."

서소정은 1학년 때 박연진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오리카 대학교 컴퓨터 공학과 동기였다.

박연진은 처음에 굉장히 겉돌아서 서소정조차 다가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박연진과 지내면 지낼수록, 서소정은 본능적으로 이 아이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서소정이 박연진의 마음을 녹이고, 그녀를 구원했다.

박연진은 서소정이 호들갑 떨며 자신을 걱정해 주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다. 이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어서.

박연진은 조용히 다짐했다.

이번 생에 박연진은 가족 따위 필요 없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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