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하은이는 저렇게 착하고 순진한데
"그래서? 이래도 죄책감이 안 들어?"
"박연진, 우리 분명히 말했잖아. 네 신분은 적당한 때가 되면 밝히기로. 하은이 상처 주지 말자고! 너도 알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뒤로는 딴짓을 해? 일부러 잡지사에 네 신상이며 사진이며 다 넘겼지. 우리가 이미 다 알아봤어!"
박진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박연진의 코앞에 대고 소리쳤다.
마치 피비린내 나는 원수를 마주한 것처럼.
"박연진, 네가 오랫동안 밖에서 고생한 거 생각해서, 지금이라도 하은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면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주지! 계속 이 집에 살게 해 주겠다고!"
박영호가 박연진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박연진이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 증거는요?"
"증거?"
"설마... 두 분이 입만 뻐끗해서 제가 잡지사에 제보했다고 하시는 건 아니죠.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는데, 증거 하나 못 내놓으시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있어요."
차갑고 가볍게 내뱉은 박연진의 한마디에 박영호 일행은 다시 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박영호의 곁에 숨어 울먹이던 박하은조차 몰래 고개를 들어 박연진을 훔쳐보았다.
달라졌다.
완전히 달라졌다.
박연진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얼음장 같은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예전의 그 겁먹고 주눅 든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얼음 칼날처럼 시리게 빛나,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왠지 모르게 박하은의 심장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싹텄다.
그녀는 애써 그 감정을 억눌렀다.
'아니야, 이번 계획은 완벽했어...'
박하은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좋아, 아주 끝까지 가 보시겠다?"
박영호는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스피커폰을 누른 채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았다.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공손하고 경외심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
"강 편집장, 말해 보시죠. 누가 당신한테 정보 넘겼는지."
"회장님... 그건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박연진 씨가 직접 줬습니다."
강한성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박연진에게로 향했다.
이제 증거도 확실하니, 어디 발M해 보시지.
하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당황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반면 박연진은 지극히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어떤 앱을 켠 뒤, 볼륨과 스피커폰을 최대로 높였다.
"제가 줬다고요? 맞죠?"
휴대폰 앱을 통해 변조된, 섬세하고 고운 목소리였다. 박연진의 원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박영호 일행은 미간을 찌푸렸다.
'박연진, 지금 무슨 꿍꿍이야?'
박하은은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오히려 꼬리가 잡히기 쉬웠다.
"네... 박연진 씨.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이렇게 빨리 조사하실 줄은..."
"저희 회사도 먹고살아야죠. 박씨 그룹에 밉보였다간 서현시에서 발붙일 곳도 없다고요!"
강한성은 멋대로 지껄였다.
그때 박영호 일행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럼 전 당시에 무슨 방법으로 당신과 연락했죠? 그리고 왜 그렇게 멍청하게 내 신분을 노출시켰을까요?"
"박씨 그룹의 힘이 그렇게 막강한 걸 알면서, 당신이 한 번 쪼니까 바로 실토할 거면서, 내가 뭐 하러 그런 자살골을 넣죠?"
"그건..."
강한성 쪽은 눈에 띄게 망설였다.
하지만 곧 대답이 돌아왔다.
"박연진 씨는 공중전화로 저와 연락했습니다. 신분은... 박연진 씨가 워낙 조심성이 없으셔서, 제가 눈치챘습니다."
"눈치챘다고요?"
박연진이 웃었다.
"그 말은, 저라는 확증도 없이, 그냥 저라고 떠벌린 거네요? 맞죠?"
"저... 저는..."
강한성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으로 '멍청이'라고 자책했다.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됐는데!'
강한성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박연진 씨 목소리를 압니다. 아주 특별하죠. 비록 그때 변조를 하긴 했지만...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박연진 씨가 저와 직접 만나서 상세히 논의하고, 사진도 건네줬습니다! 그때 박연진 씨 얼굴을 똑똑히 봤습니다!"
"틀림없다고요? 고작 목소리 하나로 사람을 모함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박연진은 강한성의 말허리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직접 만났다는 건 순전히 당신 주장일 뿐이고. 증거 있어요?"
"CCTV? 사진? 녹음?"
"저..."
강한성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모든 건 애초에 조작된 함정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방금 제가 낸 목소리, 제 목소리 아니거든요."
"지금 여러분 앞에서, 휴대폰 앱으로 목소리 변조한 거예요."
"저를 직접 만났다는 분이, 왜 제 변조된 목소리도 구분을 못 하시죠?"
"설마 제가 당신 앞에서, 휴대폰 앱으로 목소리를 변조했다고 하시게요?"
사실 박연진은 스스로 목소리를 변조할 수 있었다.
굳이 휴대폰 앱을 쓴 이유는,
이 함정을 더 확실하게 깨부수기 위해서였다.
이성을 마비시켰던 '가족애'라는 족쇄를 끊어낸 지금.
미래의 전개를 손에 쥔 박연진은, 무적이었다!
강한성은 이제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이 말했던 거랑 전혀 다르잖아!'
'분명 박연진은 잔뜩 주눅 들어서, 숨소리 하나 크게 못 내고, 비위나 맞추는 투명 인간 같은 존재라며?'
박하은의 심장이 거세게 내려앉았다.
'이 멍청한 게!'
'이렇게 간단하게 들통을 내?!'
'도대체 머리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편집장 자리까지 올라간 거야!'
"강 편집장, 이게 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박연진이 시킨 거라면서요!"
박영호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