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노영찬은 내가 정말 사고를 당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는 차 문을 세게 닫고 다시 한 번 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
차가운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곧바로 카카오톡을 열었다.
가장 위에 고정되어 있는 대화창이 눈에 들어왔다.
소정은.
나는 그가 붙여놓은 닉네임을 보았다. 이름 뒤에 하트 표시가 붙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 그의 상단 고정은 늘 나였다.
2년 전, 내가 직접 확인했을 때는 그 자리가 소정은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엔 '귀찮은 녀석'이라던 메모가 어느새 '정은이'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왜 상단 고정을 바꿨냐고.
그의 눈에 스친 건 분명한 동요였다.
그리고 곧바로 변명했다.
"지난번에 정은이가 갑자기 발작했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어. 내가 그 애를 차단해놔서 연락도 못 받았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거든."
나는 속으로 일어나는 불쾌함을 눌러 담으며 말했다.
"지금은 더 이상 노씨 집안의 딸도 아니야. 소씨 집안에서 잘 지내고 있잖아. 부모도 있고, 오빠도 셋이나 있고, 집에 직원도 많은데. 발작하면 왜 당신을 찾아?"
내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그는 순간 당황했다. 목소리를 높였다.
"정은이는 네 동생이야. 걔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네가 이렇게 몰아붙여? 그 애 병이 왜 생겼는지 잊었어? 네가 원인이잖아. 네가 신경 안 쓰면, 남이 신경 쓰는 것도 안 되냐?"
3년 전, 소정은이 소씨 집안으로 돌아온 뒤부터 그녀는 집요하게 나를 공격했다.
그녀의 능숙한 연기 앞에서 부모도, 오빠들도 나를 악독한 언니로 몰아갔다.
나는 설명할 길조차 없었다.
그래도 노영찬만은 다를 거라 믿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역시 어느새 변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몰아붙였다고?"
눈물이 고일 듯하자, 그제야 그는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나를 끌어안았다.
"알았어. 다시 바꾸면 되지. 왜 울려고 해."
그는 내 앞에서 상단 고정을 다시 내 프로필 사진으로 바꿨다.
메모도 바꿨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
내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
"이제 됐지?"
나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고, 마음 한구석에 스쳐 간 이상한 느낌을 억지로 눌러 담았다.
내가 어리석었다.
모든 건 이미 징조가 있었다.
노영찬은 오래전부터 멀어지고 있었는데, 나만 과거에 붙들려 있었다.
그가 언제부턴가 다시 상단 고정을 소정은으로 바꿨다는 걸 봤을 때, 나는 이미 알아야 했다.
내가 그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어디쯤인지.
노영찬의 손가락이 카카오톡 목록을 빠르게 훑었다.
도망치듯 식장을 떠난 뒤, 위로 메시지를 보내온 친지들이 너무 많았다. 그 사이에서 내 프로필을 한참 뒤져야 했다.
대화창을 열었다.
위치 공유 메시지 하나.
그리고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소혜나: 노영찬, 우리 얘기 좀 하자]
그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잠시 뒤 음성 메시지를 눌렀다.
"소혜나, 어디야?"
곧이어 또 보냈다.
"이런 식으로 장난치지 말라고 했잖아. 우리 이미 결혼했어. 왜 자꾸 정은이랑 부딪히려고 해? 어제 정은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잠시 멈췄다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지금 당장 돌아오면 어젯밤 일은 없던 걸로 할게."
메시지를 보내고 그는 휴대폰을 옆에 던져놓았다.
운전석 앞 거울로 보이는 그의 얼굴엔 피로와 함께 묘한 불안이 비쳤다.
조심스럽게 비서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사모님은 늘 분별 있는 분이셨습니다. 어제 그렇게 혼자 남겨졌는데도 화 한 번 내지 않으셨고요. 이런 일로 경찰까지 움직이게 하실 분은 아닙니다. 혹시 모르니 직접 찾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영찬이 고개를 들었다.
"넌 그 여자를 그렇게 잘 아나?"
"아닙니다, 대표님. 저는 그저… 사모님이 안쓰러워서요."
"안쓰러워?"
노영찬이 비웃듯 웃었다.
"그 사람은 원래 연기 좋아하잖아. 가식 떨면서 관심 끄는 거. 됐고, 네가 그렇게 한가하면 연강 쪽에 사람이나 보내. 혹시 시체라도 건져 올릴 수 있는지 보든가."
어떤 사람이 당신을 싫어하기 시작하면, 이유를 묻지 마라.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이유가 전부 정답이 되니까.
노영찬이 마음을 돌렸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소정은을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대화의 시작도 끝도 전부 소정은이 되었다. 그때 나는 그가 변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소정은의 취향과 입맛을 기억했다.
출장을 다녀오면 내 선물만이 아니라, 소정은의 것도 챙겨왔다.
어느 날, 소정은이 고급스러운 보석함을 열며 환하게 웃었다.
"오빠, 내가 이 목걸이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직 정식 출시도 안 된 건데."
"내 친구가 이 디자이너랑 아는 사이라서.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
소정은은 그의 팔을 끼었다. 풍만한 가슴이 무심한 듯 스치듯 닿았다.
"오빠가 제일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빠야."
다른 여자에게는 그토록 차갑던 노영찬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들어 그녀의 코를 살짝 톡하고 쳤다.
"목걸이 하나에 뭐 그렇게 좋아해."
소정은은 입을 삐죽였다.
"난 안 좋아. 오빠가 언니한테 사 준 게 제일 좋은 거잖아."
내 손바닥 위에는 다이아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디자인은 평범했다.
그가 일부러 구해다 준 소정은의 목걸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그의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 표정이 가라앉은 걸 눈치챘는지, 그는 급히 덧붙였다.
"며칠 뒤에 연회 있잖아. 네 드레스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야. 한번 착용해봐."
늘 그랬듯 다정한 말투였다.
나는 마음속의 서늘한 기분을 억지로 눌렀다.
괜히 예민해지는 건 아닐까.
그는 여전히 그였고, 단지 소정은에게 조금 더 잘해주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응."
나는 억지로 웃었다.
그가 목걸이를 들었을 때, 소정은이 또 외쳤다.
"오빠, 이거 너무 짧아. 나 손이 안 닿아. 오빠가 해줘."
다이아 목걸이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돌아서서 소정은 곁으로 갔다.
"바보야, 이런 것도 못 해?"
그는 그녀의 뒤에 서서 목걸이를 채워주었다.
소정은은 혀를 살짝 내밀었다.
"선물 준 사람이 직접 해줘야 좋지."
두 사람의 거리는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웠다.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입술이 닿을 듯했다.
노영찬도 순간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걸 느낀 듯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소정은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나 목말라. 과일 주스 좀 해줄래?"
"게으른 녀석."
투덜대면서도 그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가 사라지자, 소정은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집어 들더니, 조금 전의 얌전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언니, 오빠는 이제 언니 안 사랑해. 그런데 왜 그렇게 뻔뻔하게 옆에 붙어 있어? 나라면 진작 파혼했어. 괜히 웃음거리 되지 말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부모님처럼 노영찬까지 네 말에 넘어갈 거라 생각해? 난 여덟 살 때부터 그를 알아왔어. 넌 나이도 어린 게 남의 남자 건드리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그녀는 몸을 숙여 내 귀에 속삭였다.
"언니, 남녀 사이에서 사랑받지 않는 사람이 진 거야. 오빠는 나 사랑해. 아직도 모르겠어?"
"미친."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때리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고함이 터졌다.
"소혜나, 지금 뭐 하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