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그의 얼굴은 그날 밤과 달랐지만, 저 눈빛만큼은 재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위장에 능숙했다. 그날 밤의 그는 키 185cm는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는데, 지금은 등을 잔뜩 구부린 채 서 있었다. 얼굴과 드러난 피부는 늙고 주름져 있어 누가 봐도 노인으로 착각할 만큼 감쪽같았다.
나를 죽인 사람이 바로 이 화랑에 있었다. 죽기 전의 고통이 되살아나 본능적으로 공포가 엄습했다.
그는 너무도 잔인했다. 아무 소리 없이 내 뒤에 나타나, 마치 수천 번은 연습해 온 사람처럼 망설임도 연민도 없이 등을 향해 칼을 꽂았다.
나는 늘 남에게 선하게 대하며 살았다. 나를 죽일 만큼 원한을 품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저토록 완벽하게 변장하는 걸 보면, 전문 킬러였을까?
이미 나를 죽였으면서, 왜 다시 나타난 걸까?
설마 이곳에 또 다른 표적이 있는 건가?
순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곧 깨달았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었는데 더 두려워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노영찬은 어깨를 툭 털며 그를 정면으로 보지도 않은 채 "괜찮아요." 하고 무심히 한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곧장 나를 향해 꽂혀 있었다. 내가 죽기 직전까지 나를 따라오던 그 눈빛 그대로였다.
차갑고, 잔혹하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한 번 죽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가 두려웠다. 몸이 얼어붙은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설마… 그가 나를 볼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노영찬이 낮게 불렀다.
"작은아버지."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남자의 시선은 나를 꿰뚫고 지나,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성현에게 닿아 있었던 것이다.
잔뜩 조여 있던 신경이 그제야 조금씩 풀렸다.
노성현의 시선은 노영찬에게 향해 있었고, 남자는 곧장 그의 쪽으로 걸어갔다.
그 잔혹한 수법을 떠올리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저 변태 같은 살인자가 또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노성현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남자는 노성현 곁을 스쳐 지나갔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심진호가 휠체어를 밀어 노영찬 앞에 세웠다. 노성현이 노영찬을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독이 서린 듯했고, 그 기세에 노영찬도 순간 움찔했다.
"내가 알기로는, 소혜나는 결혼식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도 지금 화랑에 올 여유가 있나?"
내 행방을 걱정하는 말이 가족도, 연인도 아닌 아무 관계 없는 남자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소혜나도 애는 아니잖아요. 어디를 가든 본인 자유죠. 원래 제멋대로인 사람이고, 한바탕 하고 나면 알아서 돌아올 겁니다."
노영찬의 태연함은, 심각한 얼굴의 노성현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소혜나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노영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가, 곧 입을 열려는 순간 소정은이 끼어들었다.
"작은아버지, 우리 언니 같은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하겠어요? 이미 지란도로 떠났을걸요."
노영찬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야?"
"오빠, 오늘 막 지란도 친척한테 들었는데, 언니가 한 달 전에 숙소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대."
맞다. 나는 여러 번 지란도의 꽃길과 짙은 푸른 산, 이어진 설산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곳에 정착하고 싶다고도 했었고.
보름 전, 나는 결혼식 다음 날 지란도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예매해 두었다.
결혼식장에서 노영찬과 소정은의 뻔뻔한 밀회의 증거를 공개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소씨 집안과 노씨 집안의 관계가 틀어질 걸 알았기에, 복수를 마치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었다.
소정은이 말을 이었다.
"확인해 보니까 15일 지란도행 비행기표도 끊어 놨더라."
노영찬의 얼굴이 확연히 변했다. 걱정이 분노로 뒤바뀌었다.
"그래서 연락이 안 된 거였군.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가 버렸다고?"
"오빠, 화내지 마. 언니는 원래 남 감정은 잘 신경 안 쓰잖아.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고. 우리도 다 익숙해."
노영찬이 조금만 확인해 봤어도, 나는 비행기표만 예매했을 뿐 그날 실제로 탑승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우스웠다. 그는 기본적인 확인조차 하지 않고는 소정은의 말 한마디에 그대로 믿어 버렸다.
쓴웃음을 짓는 순간, 노성현의 입꼬리에 걸린 냉소가 내 것과 똑같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검은 눈동자는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본 듯했다.
노성현이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
"후회하지 않길 바라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노성현이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도 무언가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노영찬 역시 말 속에 다른 뜻이 담겼음을 느낀 듯 입을 열려 했지만, 심진호가 이미 휠체어를 밀어 자리를 떠났다.
소정은이 그의 팔을 감싸 안았다.
"오빠, 경매 시작했어. 얼른 자리로 가자."
이번 경매에서 소정은은 내 그림 세 점을 내놓았다.
첫 번째는 내가 10년 전 그린 ‹새벽빛›이었다.
그때의 나는 순진하고 선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햇살이 가득했다. 그림 역시 생기로 넘쳤다.
시작가는 7억.
금세 수십억 단위로 호가가 뛰었다.
나는 그 가격에 전혀 마음이 가지 않았다. 행사장 안을 훑으며 그 살인자의 모습을 찾기에 바빴다.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빛을 피해 다니는 벌레처럼 어두운 구석에 숨어, 병적으로 음침한 눈빛으로 노영찬이 있는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떠올려 보았지만 저 눈을 어디서 또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는 대체 누구인가?
나를 죽인 뒤 왜 다시 이곳에 나타난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죽었다면 내 시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와 소정은을 번갈아 살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눈빛이 오가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가 소정은이 고용한 킬러는 아닌 건가?
"30억."
노영찬의 목소리였다. 그는 이 그림이 소정은의 작품이라 믿고, 그 사랑을 과시하듯 값을 불렀다.
그가 호가를 올리자 소정은은 수줍은 척 그의 곁에 붙어 섰다.
주변에서는 부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노 대표가 저 의붓여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소문만 들었는데, 오늘 보니 사실이네."
"저런 오빠 있으면 꿈에서도 웃다 깰 듯."
"남매 사이가 정말 좋다니까."
그 칭찬을 들으며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 '남매'가 뒤로는 더럽게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하지만 그 진실은 이제 영영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다.
"50억."
차갑게 울린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노성현이었다.
그는 왜 그림을 사려는 걸까?
노영찬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작은아버지가 그림 한 점을 두고 자신과 경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공기 속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감돌았다. 노영찬의 눈에는 노성현이 단지 그림만을 빼앗으려는 게 아닌 듯 보였다.
"80억."
노영찬이 다시 값을 올렸다.
S는 온라인에서 유명했지만, 자선 활동 덕분에 알려진 면이 더 컸다. 화단의 거물도 아니고, 이 그림이 골동품인 것도 아니었다.
미대의 저명한 교수 작품이라도 수십억 원이면 상당히 높은 가격이다. S의 경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80억도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이었고, 사업가라면 당연히 가치를 따질 테니 노영찬은 여기서 끝이라 생각했다. 더 올릴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노성현이 번호판을 들며 담담히 말했다.
"800억."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800억이라니.
모두가 숨을 삼켰다. 미친 게 아닐까 하는 눈빛이었다.
노성현은 그림 한 점에 800억을 써 버렸다.
노영찬도 말을 잃었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 속에서, 나머지 두 점 역시 연달아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노성현의 손에 넘어갔다.
행사가 끝나고 노성현이 자리를 뜰 때, 나는 노영찬이 황급히 뒤쫓아가는 걸 보았다.
그는 차 문에 두 손을 짚은 채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작은아버지, 그림 세 점에 몇백 억이나 쓰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노성현이 눈꺼풀을 들어 그를 흘끗 보았다. 그 시선에는 경멸뿐이었다.
"나를 너 같은 폐급으로 보나?"
노영찬은 아직 가업을 완전히 물려받지 못했다. 그 정도의 돈을 마음대로 쓸 형편이 아니었다.
노성현은 가볍게 그를 짓밟았다.
"작은아버지, 저한테 오해라도 있으신 겁니까?"
노성현이 그를 깊이 바라봤다. 눈동자 깊은 곳에 증오가 서려 있었다.
"노영찬, 이번엔 내가 양보하지 않을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