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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양보한다고?

노성현이 무엇을 양보한다는 건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노영찬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 가는 것만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정은은 소씨 집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얼굴 가득 자부심을 띠고 있었다. 엄마는 연신 칭찬을 퍼부었다.

"정은이는 정말 대단해. 그림 몇 점으로 몇 백억을 찍다니."

"소혜나 그 죽일 년은 어릴 때 선생이 재능 있다고 하더니, 정작 제대로 된 작품 하나 못 내놓잖아. 걘 네 발가락 하나만도 못해."

옆에 있던 오빠도 거들었다.

"그나저나 소혜나 연락은 왔어? 전화도 안 받더라. 갈수록 철이 없어져서, 맨날 가족 걱정만 시키고."

"지란도로 갔다던데."

"애초에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저렇게 사고 쳐 놓고 말도 없이 날아가 버리다니. 제멋대로야, 정말."

"엄마, 아빠, 오빠, 화내지 마요. 언니도 그냥 기분 전환하려는 거겠지."

"이번에 돌아오면 무릎 꿇고 사과부터 시켜야 해."

"내 생각엔 한 번 제대로 두들겨 패야 정신 차릴 거야."

소정은의 위선적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그 가면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 누구도 조금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따랐다.

연인이 변심하는 건 견딜 수 있었지만 가족이 내게 내뱉는 냉랭한 말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 역시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품어 낳은 자식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나는 그림 그리는 걸 그렇게나 좋아했다.

그날은 동생 생일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갑자기 화를 내며 내 작업실로 들이닥치더니 내 그림 위에 물감을 퍼붓고, 직접 찢어 버렸다.

정은이가 죽었는데, 너는 양심도 없이 그림이나 그리고 있느냐고.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이라고.

그때 이미, 엄마는 나를 그렇게 미워하고 있었다. 사라져야 할 사람은 소정은이 아니라 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 일 역시 소정은과 노영찬이 벌인 일이었는데, 모든 책임은 내게 뒤집어씌웠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찾으러 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오면 때리겠다고 상의하고 있었다.

나는 내 얼굴을 만져 보았다.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언제부터인가 하늘에서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은, 내가 죽기 직전 보았던 풍경과 꼭 닮아 있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내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게 될까.

온라인 여론은 더 가혹했다.

[저렇게 뻔뻔한 언니가 또 있을까? 동생 공을 가로채다니. 나 예전에 S인 줄 알고 우상처럼 생각했는데, 진짜 역겹다.]

[소정은이 매일 저런 여자랑 같이 살았다니 불쌍해.]

[천박한 여자, 노 대표한테 버림받을 만하다.]

[나라면 빨리 저 무서운 여자랑 정리하고 소정은이랑 사귄다. 소정은은 예쁘고 마음도 착하고, 노 대표랑 찰떡궁합이잖아.]

[어차피 피 안 섞인 의붓남매인데, 둘이 진짜 잘 어울리지 않나? 노 대표가 소정은이 보는 눈빛이 꿀이 뚝뚝이더라.]

[소정은 같은 천재가 300억이나 자선재단에 기부했다네. 비교해 보면 언니는 인간도 아니지.]

나는 노영찬의 뒤에 서서, 그가 휴대폰을 쉴 새 없이 넘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의 미간은 더 깊이 패였다.

소정은이 그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

"오빠,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차라리 내가 돈 써서 실시간 검색어 좀 사버릴까?"

"왜 그래야 해?"

말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친엄마였다.

화려하게 치장한 얼굴에 값비싼 옷을 걸쳤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차갑기만 했다.

"네티즌들이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원래 소혜나가 공을 가로챈 거고, 이제 들통난 건 자업자득이지. 진작에 그러지 말았어야지. 다들 우리 정은이가 예쁘고 마음씨도 곱다고 칭찬하는데, 돈 한 푼 안 들이고 실검으로 홍보된다는데 뭐가 문제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소정은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정은이는 앞으로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칠 화가가 될 거야. 역사에 남을 인물이란 말이야."

"엄마 말이 맞아. 소혜나가 더 추락해야 정은이가 더 완벽해 보이지. 논란이 있어야 화제도 커지고, 정은이를 아는 사람도 더 늘어. 나중엔 정은이가 더 크게 뜰 거야."

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시신이 식기도 전에, 가족들은 내 마지막 가치까지 짜내려 하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면 엄마는 늘 나를 나무랐다. 쓸데없는 짓에 빠져 가문 앞날은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아이라고. 매일같이 시간만 낭비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얼굴 가득 자랑스러움을 띠고 소정은을 칭찬했다. 심지어 내 시체를 밟고 올라서도 괜찮다는 듯.

엄마는 그림을 싫어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소정은을 좋아했을 뿐이다. 소정은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옳다고 여겼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건 이미 받아들였다. 하지만 가족의 배신은 여전히 가슴을 찢어 놓았다.

소정은이 고개를 기울여 노영찬을 바라봤다.

"영찬 오빠, 어떻게 생각해? 실검 내려야 할까? 언니가 지란도에서 이걸 보면 많이 속상할 텐데… 그래도 오빠 아내잖아."

노영찬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말도 없이 지란도로 가 버렸다는 생각에,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싸늘한 빛이 번졌다.

"속상해? 자업자득이지. 그대로 둬. 창피하면 빨리 돌아오든가."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나를 두둔하려는 기색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수년간의 감정이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한마디로 끝났다.

소씨 집안도, 노씨 집안도 실검을 눌러 버릴 능력은 충분했다. 하지만 소정은을 위해서라면, 내 명예쯤은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었다.

이게 가족인가.

나는 구석에 웅크린 채 그들의 냉담한 말들을 들었다. 한 가족이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사라져야 할 사람은 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노영찬도, 소씨 가족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치 지하실 같은 곳에 서 있었다.

어둡고, 축축하고, 공기가 눅눅했다.

여긴 어디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장소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돌로 된 벽은 세월에 닳아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고, 촛불이 희미한 빛을 흔들며 벽을 비추고 있었다.

빛은 분명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벽에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오히려 공포를 키웠다.

복도 끝에는 돌로 된 방 하나가 보였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서 보니 돌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누가 이런 곳에 누워 있는 걸까.

왜인지 모르게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이미 숨이 끊긴 채 미동도 없이, 두 눈은 굳게 감긴 여자.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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