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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안유라

하예린은 임서진이 허재혁을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깊이 사랑해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임서진의 방 한쪽에는 커다란 노트북 몇 권이 있었다.

그 안에는 각종 경제지와 잡지 표지에서 오려낸 허재혁의 사진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그녀가 그걸 모으기 시작한 건 열여섯 살 무렵이었다.

가장 미쳐 있었던 시기는 대학교 졸업을 앞둔 해였다.

그해 허재혁은 허씨 그룹의 대표 자리에 막 올랐고, 수없이 많은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했다.

그때마다 임서진은 하예린을 끌고 가 드레스 고르고, 입어보고, 또 고르고… 그것도 모자라 꼭 함께 파티에 가자며 졸랐다.

하예린은 그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빠에게 같이 데려가 달라며 애교를 부리고 사정하던 그 모습.

그 애틋함과 설렘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 시절의 임서진은, 거의 매일 밤 파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단지 그곳에서 허재혁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신을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고 싶었으니까.

그녀의 SNS에는 3일마다 허재혁의 이름이 올라왔고,

비공개로 잠가둔 일기 속의 '그 사람' 역시 늘 허재혁이었다.

수없이 많은 날과 밤을, 그녀는 그를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바라던 대로 그와 결혼했다.

그날 하예린이 물었다.

"서진아, 허재혁이… 정말 너처럼 너를 사랑해줄까?"

임서진은 멍하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린아, 인생은 길잖아. 그 사람 마음속에 아직 다른 여자가 없다면, 언젠가는 나를 보게 될 거야."

그때는 그 말이 순수해서 더 아팠다.

하지만 세 해가 지난 지금, 그녀는 너무 달라져 있었다.

그림을 그리던 고운 손은 거칠어졌다. 허재혁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날마다 불 앞에 섰으니까.

옷장에 가득했던 예쁜 드레스들은 전부 상자 속에 들어갔다.

그녀는 더 이상 파티에서 반짝이지 않았다.

허재혁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조용하고 단정한 '허 대표의 아내'를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부인들과의 티타임에 참석하고, 꽃꽂이를 배우고, 정리와 살림을 배우며, '좋은 아내'가 되려 노력했다.

하예린을 만나서조차 마음대로 시간을 내지 못했다.

약속은 언제나 '점심만 가능'.

하예린이 두려워한 건 허재혁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가장 착하고 성실한 친구, 그게 바로 임서진이었다.

그런 그녀를 외면할 남자는 없다고 믿었지만 한 가지 두려운 게 있었다.

그가 아직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기도 전에 그 마음이 식어버리면 어쩌지.

그때 서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임서진은 하예린의 손을 꼭 잡았다.

"예린아… 그날, 그 사람 얼굴을 봤거든...? 처음이었어. 어떤 사람을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걸 본 게. 그게 너무 낯설었어. 그래서 알아야겠어. 너도 알잖아, 나랑 재혁 씨 일에 관한 건 다. 모르면 자꾸 마음이 더 깊이 막혀버려."

하예린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고모한테 연락해볼게. 원장이면 환자 기록 조회 권한이 있으니까, 자료 나오면 바로 보내줄게. 걱정 마, 허재혁한테는 절대 안 새."

임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쉽게 찾을 거야. 시간은 어제 오전, 대략 열시 반쯤. 사고로 유산돼서 응급실에 들어갔대."

"유산…?"

하예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허재혁이 유산한 여자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들어갔다는 건데, 그녀에게는 그저 '친구'라고 둘러댔다니.

임서진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임서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예린아."

하예린은 더 묻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말도 서진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직후, 하예린은 곧장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환자 정보와 대략적인 입원 시간만 알면 충분했다.

다음 날 아침, 고모는 그 시간대의 응급 환자 명단을 확인해 자료를 복사해주었다.

하예린은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고, 심부름 업체를 통해 그 서류를 곧바로 '가원'의 임서진 집으로 보냈다.

파일이 도착했을 때 허재혁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임서진은 봉투를 들고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갔다.

파일을 열어보니, 기록은 단 두 건.

그날 오전 비슷한 시각, 유산으로 응급실에 들어온 여자는 두 명뿐이었다.

둘 다 스물일곱 살.

누가 허재혁이 데려간 사람인지 단번에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그녀는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보호자 서명'란에 익숙한 필체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허재혁]

관계: 남자친구.

임서진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떨리는 손으로 병력지를 되짚어 읽었다.

환자 이름 — 안유라.

나이 — 27세.

출신지 — U시.

'U시'라는 단어에 눈이 흐릿해졌다.

그곳은 허재혁이 열여덟 살 이전까지 살았던 도시였다.

며칠 밤을 잠들지 못하며,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가 허씨 가문으로 돌아오기 전에 알던 사람일지도 몰라. 괜히 추측하지 말자.'

하지만 아무리 피하려 해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

임서진은 마치 경기 결과를 기다리는 탈락자처럼 숨이 막혔다.

허재혁의 열여덟 이전 삶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세계였다.

그는 그곳에서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았다고 들었다.

그녀는 그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느껴지는 불안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마치 '이제 곧 나의 자리는 끝난다'는 예감 같았다

"안유라는… 어떤 사람이지?"

그때 하예린의 전화가 걸려왔다.

임서진은 손이 떨려 제대로 통화 버튼도 누르기 힘들었다.

"서진아, 병력 봤어?"

하예린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을 뜨면 눈물이 흐르고, 숨을 쉬면 눈물이 흐르고, 숨을 참아도 결국 흘러내렸다.

자신의 의지로는 멈출 수가 없었다.

"봤어… 아마 재혁 씨가 허가로 돌아오기 전에 알던… 친구인 것 같아."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춰지지 않았다.

하예린은 그 한마디로 모든 걸 알아챘다.

'허가로 돌아오기 전의 여자' — 그 말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서진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여자가 유산한 아이… 혹시 재혁 씨 아이일 수도 있는 거야? 재혁 씨는 뭐래?"

임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배 위로 올라갔다.

"예린아, 나… 조금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하예린은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상태에서 더 이야기하면, 임서진의 마음만 더 무너질 게 뻔했다.

"내가 지금 갈까? 같이 있어줄게."

"아니, 괜찮아. 요 며칠 제대로 못 자서 눈이 너무 아파. 이제 대충은 알겠으니까… 잠깐 눈 좀 붙일게. 자고 일어나서 생각할래."

"그래. 무슨 일이든 나한테 얘기해."

"응."

전화를 끊고 나서, 방 안은 적막했다.

하예린도 알고 있었다.

임서진과 허재혁의 관계 문제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없다는 걸.

그녀가 그를 오랫동안 사랑해온 만큼, 그 모든 감정은 오직 임서진 자신이 견뎌내야 했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단 하나. 들어주고, 곁에 있어주는 일뿐이었다.

임서진은 눈을 감았다.

잠시라도 쉬려 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결국 이불을 걷어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집을 나서, 개인 탐정 사무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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