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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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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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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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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개요

임서진은 허재혁을 가장 사랑하던 해에, 끝내 그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 후 3년 동안, 그녀는 허재혁이 세상 모든 일에 냉정하고 무심한 사람이라 믿었다. 그러다 안유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허재혁의 눈빛도 누군가를 향해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 걸. 단지,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 임서진은 가장 사랑하던 남자와, 뱃속 세 달 된 아이를 잃었다. 허재혁이 진심으로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았을 때, 그녀 곁에는 이미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그녀를 세상 누구보다 아끼는 남자가 있었다. 허재혁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우리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면 안 될까?" 임서진은 담담히 답했다. "허 대표님, 한 번 버린 사람은 다시 얻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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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산전 검사 중 남편이 다른 여자를 안고 응급실로 향하다

"임서진 씨, 임신 4주 차입니다."

의사의 말에 임서진은 손에 쥔 검사지를 꼭 쥐었다.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요 며칠 계속 피곤하고 입맛도 없으며 구역질이 나서 단순한 몸살이라 생각했는데, 병원에 와보니 이미 한 달째 임신이었다.

"임서진 씨, 아이는 낳으실 건가요?"

"네, 낳을 거예요."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좋아요. 그럼 병원에서 산모수첩을 작성해드릴게요."

의사는 평소 병력과 유산 경험을 확인한 뒤 등록을 마쳤다.

"지금까지는 아이 상태가 아주 좋아요. 한 달 뒤에 다시 오셔서 검사받으시면 됩니다."

"네."

임서진은 초음파 사진과 엽산제를 가방에 넣고 병원을 나섰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차 안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남편 허재혁에게 알리고 싶었다.

결혼한 지 3년. 그는 허씨 그룹의 대표로 늘 바빴고, 임서진은 웬만하면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임신 소식이 너무 벅차서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신호음이 이어졌다.

"뚜, 뚜, 뚜——"

임서진의 심장도 그 리듬에 맞춰 두근거렸다.

"재혁 씨, 저녁엔 뭐 드시고 싶어요?"

저녁 먹고 나서 직접 말할 생각이었다.

"오늘 W시로 출장을 가야 해서 오후에 떠나. 한 달쯤 걸릴 거야."

허재혁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 달이나요?"

망설이다 결국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그래도 용기 내 한마디 더 하려는데,

"재혁 씨, 나 오늘 병원에…"

그는 바로 말을 끊었다.

"지금 접대 중이야. 고객 도착했으니까 나중에 얘기해."

뚝—

화면에 '통화 종료'라는 글자가 선명히 뜨자, 그녀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결혼 3년. 두 사람의 대화는 늘 이랬다.

그녀가 무언가를 나누려 할 때마다, 그는 차갑고 짧은 말로 대화를 끝냈다.

기쁜 마음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닿지 못한 채 공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임서진은 이제 익숙했다.

허재혁은 누구에게나, 어떤 일에도 늘 같은 태도였다.

곧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한 달 동안 출장을 다녀오면, 마침 다음 달 산전 검진 시기였다. 그때 함께 병원에 가서 직접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한 달은 길고 고됐다.

입덧이 점점 심해져서 물 말고는 뭐든 먹기만 하면 토했다.

조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서진 씨, 혹시 임신하신 거 아니에요?"

임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위가 좀 안 좋아서 그래요."

남편과 함께 양가 부모님께 직접 알리고 싶어서 일부러 숨겼지만 허재혁은 출장 내내 단 한 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처음 나타났던 날을 떠올렸다.

열다섯 살 생일날, 처음으로 그 소년을 봤다.

S시 허씨 집안에서 한동안 잃어버렸다가 막 찾은 장남, 허재혁이었다.

그때 그는 열여덟 살.

다른 재벌가 자제들처럼 시끄럽게 어울리지 않고, 묵묵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인사만 했다.

키가 크고 단정한 얼굴, 차분한 눈빛. 처음 등장하자마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가 다가와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맑은 목소리와 은은한 향기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날 이후, 임서진은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그게 좋아함이라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그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게 된 해, 그녀는 스물두 살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 어머니가 말했다.

"서진아, 허씨 쪽에서 혼담이 들어왔어. 큰아들 허재혁은 어릴 때 잃어버렸다가 열여덟에 돌아왔고, 너보다 세 살 많단다. 하지만 집안에선 둘째 허재민이 훨씬 총애를 받아. 그 아이는 네 또래고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잖니. 둘 중에 네 마음은 누구에게 있니?"

어머니는 은근히 둘째를 원했지만, 임서진은 망설임 없이 첫째, 허재혁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 방향이 정해졌다.

그때 그를 선택했던 결심을 떠올리자, 임서진은 이상하게도 억울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녀도 들은 적이 있었다. 허재혁이 실종됐던 몇 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그 시절이 너무 힘들었기에, 지금처럼 냉정하고 차가운 성격이 된 걸지도 몰랐다.

'그럴 수도 있지.'

그녀는 스스로를 달랬다. 그의 성격이 차가워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결혼 후 지금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겉보기엔 나쁘지 않았다.

출장이 없을 때면 아무리 늦어도 꼭 집에 돌아왔고,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선물도 늘 직접 준비해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날이 훤해질 무렵에야 잠이 들었다.

깊이 잠들기도 전에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은 산전 검사 날이라 아침을 먹을 수 없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내려가 조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오늘 병원에 검진 다녀올게요."

그리고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

혈액검사를 하고, 초음파를 마친 뒤 결과지를 들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결과를 훑어본 뒤 말했다.

"이상은 없는데, 체중이 좀 많이 빠졌네요."

그는 엽산제와 칼슘제를 처방하며, 영양을 잘 챙기라고 당부했다.

전반적으로 아기는 건강했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 로비를 막 나서려는데, 익숙한 차 한 대가 정문으로 곧장 들어오는 게 보였다.

허재혁의 차였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출장에서 돌아와 조 아주머니에게 자신이 병원에 간 걸 듣고, 혹시 직접 데리러 온 걸까?

차가 로비 앞에 멈췄다.

임서진은 반가운 마음에 내려가려던 찰나, 운전석에서 그의 비서가 급히 내려 뒷문을 열었다.

그다음 순간, 허재혁이 피투성이 여자를 안고 뛰쳐나왔다.

"의사! 여기 사람 살려요!"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응급실 쪽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