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누군가를 조사해줘
임서진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머릿속에는 낮에 병원에서 들었던 허재혁의 절규 같은 외침이 계속 맴돌았다.
그 여자가 그의 말대로 단순한 '친구'라면, 꽤 중요한 친구겠지.
그의 옷에서 아직 남아 있던 소독약 냄새는, 그가 병원에서 막 돌아왔다는 걸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하루 종일 그 여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대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일까.
임서진의 눈가에 금세 물기가 고였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황급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남자가 이불을 살짝 들추고 들어왔다.
침대 한쪽이 살짝 내려앉자, 임서진은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오늘 많이 피곤하지? 일찍 자."
남자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그녀의 팔을 떼어내려 하자, 임서진은 재빨리 그의 팔 안으로 머리를 묻었다.
"재혁 씨, 나 오늘은 당신 안고 자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참아왔던 눈물이 만들어낸 떨림이었다.
허재혁은 더 이상 막지 않았고, 그저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그래, 자자."
익숙한 그의 체취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소년 시절의 맑은 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음을 안정시키는 냄새였다.
임서진은 그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품속에서도 예전처럼 편히 잠들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
허재혁이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임서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재혁 씨, 어제 병원에 있던 그 여자분은 괜찮으셔요?"
말은 가볍게 꺼냈지만, 수저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허재혁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하게 앉았다.
검은 눈동자가 스치듯 그녀를 훑었다.
"사람은 괜찮아. 하지만 아이는 잃었어."
임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까지… 많이 힘들겠네."
허재혁의 눈빛이 가늘게 좁혀졌다.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걸렸다.
"서진아, 그 여자 일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임서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의 눈을 마주 봤다.
잠시 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당신 친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허재혁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돌아서며 낮고 냉담한 목소리를 남겼다.
"서진아, 세상엔 몰라도 되는 일들이 많아. 내가 알려주는 것만 알면 돼."
임서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응, 알겠어요. 당신 말대로 할게요."
허재혁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식당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임서진의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다.
세상 어느 여자도 남편에게 갑자기 '아주 중요한 여자 사람 친구'가 생기는 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임서진은 조 아주머니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알고 싶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방 안에 앉아 한참을 생각한 끝에, 마음을 추스른 임서진은 휴대폰을 들어 절친 하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몇 번 울리자 전화가 연결됐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하예린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
"우리 서진 씨가 웬일이야? 요즘은 연락도 없더니,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
"예린아, 바쁘지? 점심 시간에 같이 밥 먹을 수 있을까?"
"서진이가 나한테 점심 먹자고 하면 무조건이지."
"좋아, 그럼 네 회사 맞은편 우리 자주 가던 그 식당에서 보자."
"오케이. 나 일 끝나면 바로 갈게."
하예린의 고모 하소연은 S시 종합병원 원장이었다.
임서진은 허재혁에게 들키지 않고 그 여자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름과 배경 정도는 알고 싶었다.
점심 무렵, 그녀는 하예린의 퇴근 시간을 계산해 미리 식당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서둘러 달려온 하예린이 들어왔다.
눈앞에 보이는 임서진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하예린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서진아, 너 왜 이렇게 말랐어? 허씨네 재산이 얼마나 큰데, 남편이 밥도 안 먹여?"
임서진은 맞은편에서 하얀 정장 차림으로 앉은 친구를 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냐, 나 요즘 다이어트 중이야."
"다이어트는 무슨 다이어트야? 이 상태에서 더 빠지면 사람도 아니야."
"그럼 힘든 다이어트 그만둘까? 그러니까 이렇게 너 불러냈잖아."
하예린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는 점심 약속만 잡잖아. 남편이 점심에 집에 안 들어오니까. 나 오후에 일해야 해서 술도 못 마시고 말이야."
그녀가 '남편'이라는 이름을 꺼내자, 임서진은 잠시 웃었다.
그 웃음 속에 쓴맛이 섞여 있었지만, 애써 밝은 척 말했다.
"알았어. 다음엔 꼭 저녁에 만나자."
두 사람은 잠시 잡담을 나누는 사이, 음식이 모두 차려졌다.
임서진은 어릴 때부터 하예린과 함께 자라, 그녀의 입맛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하예린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하예린은 배불리 먹고 나서야 임서진이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서진아, 다이어트 그만둔다더니 왜 이렇게 조금 먹어?"
"요즘 계속 조금 먹다 보니 버릇이 됐나 봐."
"이제 진짜 그만해. 넌 지금도 예뻐. 어떤 모습이어도 다 괜찮은데, 이렇게 마르면 마음이 아프잖아."
마음이 아프다…
그 한마디에 임서진의 가슴이 미묘하게 저려왔다.
요즘 입덧 때문에 힘들어 살이 빠진 걸 친구는 단번에 알아봤는데, 정작 함께 잠드는 남편은 눈치채지 못했다.
임서진은 하예린이 젓가락을 내려놓는 걸 보고 조용히 물었다.
"예린아, 다 먹었지?"
그녀의 눈빛을 본 하예린은 바로 알아챘다.
"무슨 일 있는 거지?"
"응, 부탁 하나 하려고."
"말해봐."
임서진은 치맛자락 너머 허벅지를 꼬집었다.
따끔한 통증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최대한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예린아, 네 고모님이 시립병원 원장이시잖아. 혹시 그 병원에 입원한 환자 한 명만 알아봐 줄 수 있을까?"
"그래, 이름이 뭐야?"
"이름은 몰라. 여자야. 어제 오전에 응급실로 실려갔어."
하예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누가 데려왔는데?"
그제야 그녀도 상황을 눈치챘다.
보통 사람이면 서진이 직접 알아볼 수 있는 일을, 굳이 원장 고모를 통할 이유가 없었다.
"설마… 허재혁이 데려간 거야?"
하예린은 믿기 어렵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임서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친구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냥 알고 싶어. 이름이라도."
하예린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임서진 옆으로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서진아, 허재혁이 그럴 리 없을 거야.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그 사람 주변엔 오직 너뿐이었잖아."
잠시 후,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좋아. 내가 알아봐 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