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산꼭대기 별장
강은채는 문밖에 있는 경호원들에 의해 최대한 빨리 윤재욱이 술을 마시는 곳으로 보내졌다.
이곳은 아주 고급스러운 술집이었다. 은채는 지정된 룸으로 곧장 걸어갔다.
안에 들어서자 한눈에 술이 가득 담긴 잔을 들고 있는 재욱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의 곁에는 권혁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강은채가 온 것을 본 권혁수는 마치 구세주를 본 듯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그는 감히 말은 못 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혁수의 뜻을 이해한 은채는 재욱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든 술잔을 빼앗았다. 하지만 부주의로 술이 두 사람의 몸에 쏟아지고 만 것이다.
“간이 부었다 이거지. 내 술도 빼앗고.”
술잔이 뺏기자 윤재욱이 버럭 화를 냈다.
그는 술잔을 빼앗은 사람이 권혁수인 줄 알고 고개를 돌려 계속 따지려 했지만, 강은채의 그 아름답고 단아한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누가 오랬어?”
그의 표정은 일관적인 냉담함으로 바뀌었다.
“아무도 안 불렀어요. 그만 마셔요. 몸 상하니까.”
강은채는 권혁수의 전화를 받고 계속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면 머리가 종종 아프곤 했으니. 하지만 그는 이 증상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데려다줄게요.”
은채가 일어나 재욱을 부추기려 했지만, 상대의 힘에 오히려 그의 몸 위로 넘어지고 만 것이다.
“당신... 술에 취했어요.”
가까이 있는 얼굴을 보며 강은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알코올이 섞인 남성의 냄새와 그의 뜨거운 숨결이 꽤 자극적이었으니.
하지만 윤재욱의 현재 상태는 술에 취했다고 하기에는 이른 것 같았다.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는 취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비록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가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런 갑작스런 접근에 강은채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윤재욱의 큰 손에 짓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놔요.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
강은채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들 나가.”
윤재욱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명령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게 바쁘게, 룸 안의 경호원과 권혁수는 조용히 룸을 나섰다.
그윽한 분위기 속에서 남은 두 사람은 친밀한 자세로 아래위로 겹쳐 있었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분위기를 더 뜨겁게 달구었다. 강은채는 심장이 하도 떨려서 이런 분위기를 즐길 겨를이 없었다.
“너무 늦었어요. 당신 한 사람 때문에 모두 기다리고 있잖아요. 이거 놔요. 집에 데려다줄게요.”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어느 집 말하는 거야? 너 아니면 송세희? 혹은...”
윤재욱이 차갑게 되묻더니 말끝을 흐렸다. 이어 미간에 피로와 슬픔이 묻어났다.
그것을 본 강은채는 그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빛 속의 슬픔은 무엇 때문일까? 가족 아니면 일 때문인가? 혹은 여자 때문에?
윤재욱이 여자 때문에 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은채의 가슴이 쓰려 났다.
“당신이 어딜 가든 다 돼요. 송세희 씨한테 가고 싶으면 데려다줄게요.”
“안 가. 너한테 갈래. 너랑 한 침대에서 자고 싶어.”
윤재욱이 떼를 쓰는 것 같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의 눈에 자신에 대한 욕망 외에 혐오까지 섞인 걸 본 강은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요. 원하는 대로 해요.”
강은채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취한 사람과 도리를 따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니.
강은채가 말을 마치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재욱의 놀리는 듯한 소리가 전해왔다.
“너 심장박동이 왜 이렇게 빨라?”
“저...”
남자의 말은 마치 정곡을 찌른 듯 그녀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은채는 지금 이 흐릿한 불빛에 감사할 뿐이다. 아니면 윤재욱이 그녀의 붉어진 뺨을 보면 놀릴 게 뻔했으니.
“당신 심장도 뛰고 있잖아요. 안 뛰면 큰일 나죠.”
강은채는 갑작스레 몸을 일으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당황함이 윤재욱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재욱은 모든 사람을 보내고 은채에게 운전을 맡겼다.
그는 조수석의 등받이에 나란히 기대어 있었다. 술도 많이 마셨고 기분도 우울했지만, 그의 각진 얼굴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은채는 재욱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속으로 그가 오늘 왜 이러는지 추측하고 있었다.
“앞으로 거짓말하지 마. 네 능력으로 원하는 삶은 충분히 살 수 있잖아.”
재욱이 입을 열어 차 안의 정적을 깼다.
은채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속이 울렁이었다.
“내가 정말 거짓말쟁이인 것 같아요?”
강은채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똑같은 질문을 이시훈에게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을 뿐. 이번에도 같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본인도 인정했는데, 내가 못 믿을 게 뭐 있어서.”
재욱의 냉담한 어조가 감정 없이 전해왔다.
“그렇다면 내 생각을 바꾸려 하지 마세요. 내 길은 내가 알아서 갈 테니.”
더 이상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윤재욱이 그녀에 대한 인상은 이미 뿌리박혀 있으니, 그녀에게 그것을 흔들 힘이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강은채의 손이 점점 조여들었다. 윤재욱이 그녀에 대한 불신과 경멸 때문이었다.
그녀를 얼마나 얕잡아 봤으면 굳이 자기 여자로 삼겠다고 고집을 부리겠는가. 돈만 주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그런 여자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으니.
여기까지 생각한 은채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왜 이렇게 비굴한 지경까지 되었는지, 왜 여기서 남자의 멸시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은채,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주제 파악해.”
윤재욱의 어조가 한 층 높아졌다.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네요.”
이런 관심은 왜 송세희한테 주지 않는지, 그녀에게 있어서는 모욕과 다름없었다.
‘이 남자는 정말 독사야, 멀리해야겠어.’
은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은채...”
“대표님, 도착했어요.”
재욱이 화를 내려고 하자 강은채가 브레이크를 밟더니 차를 멈췄다.
“대표님, 애들이 잠들었으니 들어가서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차 몰아. 안 올라가.”
윤재욱이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강은채를 그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 그녀도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냥 차에서 밀어 내렸을 것이다.
“그럼 어디 가요?”
“내비게이션을 켜면 알 거야.”
재욱이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은채는 내비게이션 경로를 따라 질주했다. 다행히도 윤재욱은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한참 운전한 후, 차는 뜻밖에도 산길로 향하는 것이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강은채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산길을 올라갈수록 그 익숙한 느낌은 점점 더 강렬해졌고, 심장박동수도 빨라졌다.
차가 한 별장 앞에 멈추었을 때, 강은채는 벼락을 맞기라도 한 듯 멍하니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쳐다봤다.
여긴...
이곳은 너무 익숙했고 그녀에게 있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윤재욱의 집인가? 아닐 거야...
“새로 산 집이에요?”
은채는 숨을 죽이고 물었다. 크게 떠진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전동 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6년 전에 지은 거야. 새 집이라 할 수는 없지. 쓸데없는 말 말고 빨리 들어가.”
윤재욱의 말투에 초조함이 드러났다. 그는 매번 술에 취할 때마다 이곳에 오곤 했다.
한편 남자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강은채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얼굴은 순간 핏기를 잃은 듯 창백해졌다.
‘이게 다 꿈일 거야. 절대 현실이 아니야.’
강은채는 속으로 이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거듭 되뇌었다.
차가 천천히 앞으로 향했지만, 강은채는 자신이 차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본채와 가까와질수록 그녀의 의식도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모든 게 대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윤재욱이 그 남자라면, 윤지민은 그럼...
이 점을 깨달은 강은채는 놀라운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
지금 그녀의 내심은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우연인가 싶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진짜이길 바랐다.
차를 세운 강은채는 여전히 별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려.”
갑작스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강은채는 충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싫어요. 송세희 씨와 부딪치고 싶지 않아요. 전 이만 돌아갈게요.”
강은채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만약 이곳이 정말 윤재욱의 집이라면, 송세희는 분명 여기에 있을 것이고, 그녀를 아는 하인도 있을 것이다.
아직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은 이상, 강은채는 무방비 상태에서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긴 내 집이야. 송세희는 몰라. 아무도 없어.”
그의 말이 떨어지자,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눌렀는지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해졌
다.
정말로 휘황찬란했다.
강은채는 드디어 별장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4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주차장 옆에 있던 큰 나무 몇 그루가 조금 더 굵어진 듯.
정말 이곳이 맞았다. 그녀는 속으로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확인해야 할 것은 윤재욱이 그 남자와 같은 사람인지였다.
차에서 내린 강은채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아주 힘겨웠다.
별장의 거실에 도착한 은채는 2층의 굳게 닫힌 침실 문을 보며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4년이 지난 지금, 강은채는 이곳에서 지내던 모든 기억을 잊고 싶었지만, 오히려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곳에는 그녀가 가장 힘들게 살아온 삶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그 기억을 파고 헤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