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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멀티형 인재

이때 배원영이 자료를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 윤재욱의 안색을 살피고는 권혁수가 보고한 내용이 그다지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란 걸 알았다.

말없이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으고 똑바로 서서 자신이 보고할 차례를 기다렸다.

그때 권혁수가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주저하고 있는 듯했다. 말하면 윤재욱이 발끈할까 봐 걱정되었지만, 말하지 않으려니 또 입이 근질근질했다.

“할 말 있으면 해.”

그의 망설이는 표정을 읽은 윤재욱이 말했다.

“대표님, 강 부장님은 사실 매우 유능한 분이십니다. 멀티형 인재죠. 저희 회사 업무가 원래 다양하지 않습니까. 각 사업팀마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필요한데, 강 부장님은 어느 부서에 가나 크게 쓰일 분이세요.”

권혁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윤재욱과 강은채 사이의 일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은채가 회사를 떠나게 된 건 윤재욱의 감정적인 처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윤재욱의 곁에서 4년이나 있었지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사무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윤재욱은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배원영도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

윤재욱이 화를 내지 않자, 권혁수는 말을 이었다

“휴대폰 사업은 저희도 신인이나 마찬가지고, 대표님의 목표는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인데 강 부장님이 계신다면 꼭 대표님이 원하시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표님, 제가 어제 강 부장님의 대한 자료를 얻었는데 이미 대표님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권혁수는 오로지 윤재욱을 위해 진심으로 권유했다.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되든 간에, 권혁수는 회사의 인재가 유실되는 것이 아까울 따름이었다. 좋은 인재는 수시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윤재운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아 노트북에서 메일을 열어보았다.

자료에는 강은채가 디자인한 휴대폰이 국제디자인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컴퓨터, 냉장고, TV, 세탁기…등 제품에 응용되었으며 그 응용 범위에는 심지어 의학 분야와 선박도 포함이 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프로필은 본 적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경력이 마구마구 튀어나왔다. 윤재욱은 미간이 심하게 좁혀졌다.

“배 비서, 왜 전에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

그가 차갑게 묻자 배원영은 서둘러 대답했다.

“대표님, 강 부장님은 워낙에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이런 것들은 이력서에 적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알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대표님, 이 자료에 있는 내용은 조사하기가 확실히 쉽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컴퓨터와 휴대폰의 프로그램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하던데 강 부장님은 어떤 것이든 다 쉽게 해내는 것 같아요.”

권혁수는 배원영의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주었다. 강은채가 그동안 거둔 성과들 중 어떤 것은 이름조차 서명하지 않았다. 이 자료들은 비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얻은 것이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대표님, 강 부장님이 MT에서 퇴사했다는 소식은 아직 다른 대기업에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저희가 휴대폰 분야, 의료기기 분야, 선박 제조 분야까지 다 통제할 수 있더라도 다른 수많은 분야는 저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다른 대기업에서 강 부장님의 이력을 알고 스카우트한다면 그땐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권혁수는 어떻게든 강은채를 다시 회사로 데려오고 싶었다. 강은채와 같은 능력자가 회사에 있다면 그룹은 더 크게 발전할 것이다.

“……”

윤재욱은 매서운 눈초리로 말없이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권혁수는 입을 다문 채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할 말은 이미 다 했고, 결정은 윤재욱이 해야 한다. 개인감정이 더 중요한지, 회사 일이 더 중요한지, 모두 윤재욱이 가늠해야 할 일이다.

권혁수의 말이 끝나자 배원영은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

하지만 윤재욱은 한마디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강은채, 아니, 강은채가 거둔 성과들이었다.

사기꾼.

송세희는 그녀를 사기꾼이라고 했고, 이시훈도 그녀를 사기꾼이라고 했다. 사기꾼이 이 많은 성과를 이루다니. 그야말로 엄청난 사기꾼이다.

대표 사무실에서 나온 배원영은 권혁수를 비서실로 끌어당겼다.

비서실 벽은 유리 벽이라, 배원영은 바깥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힐끔거리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왜 굳이 강 부장을 회사로 데려오려고 그래요? 인재는 맞는데 그런 인재는 많아요. 방금 무슨 신처럼 얘기하던데 그 여자가 없다고 회사가 망해요?”

“내가 신처럼 얘기한 게 아니라, 그 여자 능력이 워낙에 훌륭하잖아요. 배 비서랑 나 같은 사람이 열 명 더 있다고 해도 그 여자 하나만 못해요. 그런 인재를 본적이 있어요? 배 비서, 난 다 회사를 위해서, 대표님을 위해서 그러는 건데, 배 비서는 왜 반대하는 거예요?”

“저… 제가 반대하는 게 아니고요. 대표님이 쫓아낸 사람이잖아요. 그 성질에 우리가 다시 오라고 해서 올 사람도 아니고, 설마 대표님이 가서 다시 모셔 와야 된단 말이에요?”

배원영은 눈빛이 흔들리며 아무 핑계나 둘러대며 말했다.

“저희 대표님이 어떤 분이신데. 어떻게 쫓아낸 직원을 다시 데려온다고 찾으러 가요? 딴사람들이 알게 되면 대표님 위신이 바닥에 떨어져요.”

“그건 배 비서가 걱정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니고. 대표님께 이 사실을 알려주는 건 내가 해야 할 업무예요. 가서 다시 데려오든 안 데려오든, 그건 대표님이 알아서 할 일이고. 배 비서도 너무 오지랖 떨지 말고 할 일이나 하세요.”

권혁수는 어두운 낯빛으로 말하고 나서 돌아서 가버렸다.

……

윤재욱은 퇴근하는 길에 지민이를 픽업하여 바로 강은채가 산다는 집으로 향했다.

차를 동네 안에 세워놓고 주변을 둘러보니 꽤 깨끗한 동네였다. 그가 살고 있는 곳과 비길 수는 없지만.

자료에 있는 주소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60대 돼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었을 때, 윤재욱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누구 찾으십니까?”

“강은채 씨 안에 있나요?”

윤재욱은 아래위로 그 남자를 훑어보았다.

“아, 들어오세요.”

남자는 손으로 강은채가 살고 있는 방을 가리켜 알려주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윤재욱은 노크도 하지 않고 방 문을 열었다.

“아줌마! 지유야!”

문이 열리자 지민이가 먼저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침대 옆에 서 있는 강은채를 끌어안았다.

윤재욱은 방으로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지민 오빠!”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요?”

지유와 은채는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지유는 지민한테 물었고, 은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윤재욱한테 물었다.

“흙에 파묻혀도 찾아낼 수 있어.”

윤재욱은 눈썹을 찌푸리고 서늘한 말투로 말했다.

방안을 둘러보니 두 사람이 겨우 잘 수 있는 침대 하나에 간이식 옷장 하나와 화장대가 전부였다. 화장대에는 화장품은 별로 없고 지유의 공부 책과 학용품들이 놓여있었다.

방금 들어왔을 때 지유는 그 화장대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고, 강은채는 노트북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침대로 올라가 일을 하려는 모양새였다.

사는 모습을 보니 윤재욱은 속으로 더 화가 나는 듯했다.

강은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로 가든 이 남자는 피할 수 없는 건가…

“무슨 일이에요? 나가서 얘기해요. 여기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밥은 어떻게 해 먹어? 화장실을 어떻게 써?”

윤재욱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이 손바닥만 한 방에서 어떻게 애를 데리고 사는지, 그것만 궁금했다.

“같이 쓰고 있어요. 대표님…”

“이시훈은 어쩌고? 왜 당신한테 살만한 집도 하나 마련 안 해줘?”

윤재욱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사기꾼이, 그렇게 많은 성과를 낸 사람이 단독으로 집을 맡을 돈도 없는 건가?

그의 말을 들은 강은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남자는 다 좋은 데 유독 저 입이 문제다. 말로 사람을 찌르는 것 같다.

“제 일이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에요?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지민이가 은채 씨 보고 싶어 해. 그리고 업무도 채 완성 못했잖아. 강은채 씨 때문에 휴대폰 출시가 늦어지면 안 돼.”

윤재욱은 방안 구석구석을 훑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럼 제가 내일 회사로 가서 처리할게요. 대표님…”

“내일 다른 데로 이사해. 권혁수가 와서 얘기할 거야. 지유도 원래 다니던 유치원으로 돌아가고.”

윤재욱은 강하게 밀고 나갔다.

방도 코딱지만 한 데, 웬 늙은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니.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강은채가 뭐라고 하든,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대표님, 전 이미 회사에서 잘렸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 좋아요. 한동안 있으면 저분들도 이 집에서 나갈 거예요.”

강은채는 바로 거절했다. 겨우 그와 좀 멀리하게 됐는데, 또 도움받는 건 원하지 않았다. 혹시나 무슨 함정을 파서 그 안에 자신을 던질까 두려웠다.

“이사하라고 하면 이사해. 잔말 말고.”

윤재욱의 말투는 더 퉁명스러워졌고 얼굴에도 화낼 조짐이 보였다.

“아줌마. 아빠 말대로 하세요. 여기 너무 작아요. 아빠랑 오면 잘 곳도 없는 거 같아요.”

지민이는 아빠가 또 성질을 낼까 봐 얼른 은채를 타일렀다. 문제는 그 말이 약간 이상야릇하게 들렸다는 것.

강은채는 순간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싸움을 막아보려고 한 말이라지만 어떻게 저런 특이한 생각을 했을까.

방안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두 어른은 말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은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방이 좁아도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나 재잘재잘 얘기하며 놀고 있었고 윤재욱은 피곤한지 침대에 벌렁 누웠다.

강은채는 침대 위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화장대에 올려놓고 그 옆에 앉아 윤재욱한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누워있던 육재욱은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리며 눈길을 강은채한테 떨궜다. 그리고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방이 너무 좁은 탓에 그들은 밖에 나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밥 먹고 돌아오는 길에 강은채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거 우리 집으로 가는 길 아닌데요? 데려다주는 거 불편하시면 저희 길가에 내려주셔도 돼요. 저랑 지유는 택시 타고 가도 되니까.”

“은채 씨네 집 가는 길 맞아.”

윤재욱은 쌀쌀한 어조로 이렇게만 대꾸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차가 한 고급 주택 앞에 세워졌다.

강은채는 윤재욱한테 이끌려 16층에 있는 집으로 오게 되었다. 윤재욱은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보다 3배 가까이 되는 큰 집이었다. 방도 여러 개였다. 주방도 널찍하고, 화장실은 방마다 달려있었다.

“대표님, 저희 왜 여기로 왔어요?”

묻고 있었지만 사실 그가 어떤 답을 할지 알고 있었다. 혹시나 넘겨짚은게 아닐까 하여 물어본 것이다.

“네가 살 새 집이야. 앞으로 지유랑 여기서 살아.”

원래는 내일에 이사하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윤재욱은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대표님, 호의는 고맙지만 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전 대표님 직원도 아니고 이런 대우 받을 자격 없는 거 같아요. 지유야, 늦었어, 우리 가자.”

강은채는 또 한 번 윤재욱을 호의를 거절했다. 화도 조금 났다. 회사에서 자르고 취직을 방해하더니 그녀가 필요하다고 다시 찾아와서 떡 하나 던져주는 꼴이라니.

이런 떡은 소화가 안 돼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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