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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지유가 전학 가다

은채는 일어나서 수연을 말렸다.

“아니야, 너희 집 가는 거 불편해. 애가 장난이 심해서 아저씨, 아줌마 쉬는 데 방해 될 거야. 나 오늘만 여기서 자고 내일엔 은혜의 집으로 갈 거야.”

마음은 고맙지만 수연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 집에는 세입자가 있잖아. 어떻게 애를 데리고 그 집 가서 살아?”

“괜찮아. 내일 세입자랑 상의해서 방 한 칸만 내달라고 할 거야.”

아직 결정된 건 없으니 대충 묵을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그럼 상의해 보고 안 된다고 하면 내가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게.”

보기와는 달리 고집이 센 은채를 꺾을 것 같지 않아 수연은 일단 그러라고 했다. 그러면서 은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지유가 유치원 가는 일은 내가 알아볼게. 취직하는 것도 그리 걱정할 거 없어. 너 같은 멀티형 인재가 무슨 그런 걱정을 해. 마음 푹 놓고 있어, 찾게 될 거니까.”

“아참, 네가 하는 분야는 소프트웨어 맞지? 휴대폰에만 한하는 거 아니지?”

수연이 갑자기 뭐가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을 거 같아. 게임이랑 군사 쪽은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그리고 내가 잘하는 건 소프트웨어뿐만이 아니야. 휴대폰 외관 디자인도 잘할 수 있어.”

일부러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솔직히 그녀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생각 밖으로 많았다. 그녀가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한 휴대폰은 세계에서 대상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와, 너 대단하구나! 너한테 그렇게 막강한 실력이 있는 줄 몰랐어. 우리 회사에서 지금 새로운 유형의 수술용 프로브를 연구 개발 중인데 소프트웨어 인재가 필요해. 내가 널 추천할게.”

서수연은 깜짝 놀랐다. 강은채의 능력이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자신이 윤재욱이라면,이런 인재를 잃게 된 걸 땅 치며 후회할 것이다.

“추천은 필요 없고, 내가 지금 마침 완성품이 하나 있는데 너희 회사에 얘기해 봐. 필요하다고 하면 너희 회사에 팔 생각이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래? 너무 좋지! 은채야, 만일 이 일이 성사되면 나 승진할지도 몰라. 고마워, 은채야! 너 진짜 대단하다, 완전 짱이야. 진작에 너한테 얘기해야 했는데. 너한테 또 뭐 좋은 거 있으면 말해봐. 내가 대신 판로를 찾아줄게…”

수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했다.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취직은 무슨. 소프트웨어를 자체 개발해서 팔아도 평생 돈 걱정은 없을 텐데.

하지만 은채는 수연이처럼 들떠있지 않았다. 윤재욱이 또 나서서 훼방 놓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이 도시에서 쫓아내겠다고 벼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

지민이는 집에 돌아와서 윤재욱이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보고 한시름 놓았다.

“아빠, 엄마. 저 왔어요.”

“우리 지민이 왔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

송세희는 호들갑을 떨다시피 하며 아이한테로 다가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말과는 달리 눈매는 차갑기만 했다.

“저도 엄마 보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억압을 받아서인지 지민이도 이젠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우리 착한 아들. 요 며칠은 여기서 엄마랑 재미있게 놀면서 지내자.”

윤재욱을 등지고 있는 송세희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지민이한테 말했다. 하지만 눈동자는 소름 돋을 만큼 서늘했다.

“네, 엄마. 저 위층에서 옷 갈아입고 내려올게요.”

지민이는 얼른 핑계를 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아빠가 있어서 큰일은 없겠지만 엄마의 그 위험한 눈빛만 떠올리면 오금이 저렸다.

방으로 와서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윤재욱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빠.”

지민이는 윤재욱을 부르며 강은채가 준 곰 인형을 침대 위에 올려놨다.

“어디서 난 거야?”

윤재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이 오늘 저 잘했다고 주신 거예요.”

어젯밤에 두 사람이 싸웠기 때문에, 솔직히 얘기하면 윤재욱이 인형을 버릴까 봐 지민이는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민아, 오늘 하교할 때 은채 아줌마 만났어?”

“네, 만났어요. 아줌마가 집에 와서 말 잘 들으라고 했어요. 보고 싶으면 전화하라고도 했어요. 아빠, 저 앞으로 아줌마네 집에 못 가는 거예요?”

지민이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윤재욱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윤재욱은 무서운 아빠였다. 그래서 말도 항상 조심스럽게 해야 했고 다른 애들처럼 애교를 부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빠는 지민이의 우상이다. 성공한 사람이고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마치 슈퍼맨, 스파이더맨처럼. 그냥 자신한테 조금만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만 대해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못 가, 이제. 아줌마는 아빠 회사에서 일 안 하거든. 곧 서울을 떠날 거야.”

윤재욱은 강은채 생각만 하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또 자꾸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 여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아빠, 난 아줌마가 좋아요. 아줌마도 날 좋아해요. 전 느낄 수 있어요. 왜 싸웠어요? 왜 아줌마한테 화냈어요? 사이좋게 지내면 안 돼요?”

아빠의 표정이 험악하지 않은 걸 보고 지민이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물었다. 아빠도 좋고, 아줌마도 좋은데 왜 하필 두 사람이 싸운 걸까.

“어른들 일이야. 애들은 알 거 없어.”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차가워졌다는 걸 미처 느끼지 못하고 지민이는 계속하여 말했다.

“아빠, 저랑 지유도 이제 아주 어린애는 아니에요. 어른들이 싸우면 저희도 기분이 나빠져요. 지유는 아빠를 엄청 좋아하는데 아빠가 너무 쌀쌀해서 좀 무섭대요. 아빠, 지유랑 아줌마는 다 여자잖아요. 남자는 여자한테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고 했어요.”

지민이는 일부러 지유 얘기를 꺼냈다. 매번 윤재욱이 지유랑 말할 때면 알게 모르게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자신을 대할 때보다 더 많이.

아이는 그걸로 아빠가 지유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하여 지유를 봐서라도 은채와 싸우지 않았으면 했다.

“윤지민, 너 지금 감히 아빠를 가르치는 거야?”

윤재욱는 표정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 하지만 화내지는 않았다.

“아빠, 미안해요. 전 아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줌마가 너무 좋아서요.”

지민이는 울상을 하며 얼른 사과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윤재욱은 화를 낼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윤재욱도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 지민이는 또 물었다.

“아빠, 저 요새 왜 할아버지네 집에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사실 이것이 지민이한테는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할아버지는 요양하러 가셨어. 집사 아저씨도 같이 갔으니까 널 픽업해 줄 사람이 없어서 여기로 데려온 거야. 요 며칠은 엄마가 널 데리고 등교할 거야.”

“아빠…”

윤재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민이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너무 흥분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지민이는 금세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아빠, 아빠가 저 데려다주면 안 돼요?”

등하굣길에 줄곧 혼나는 불상사는 면하고 싶었다.

“엄마가 데려다주는 건 왜 싫어?”

윤재욱은 아이가 송세희와 같이 있는 걸 꺼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그게 왠지 강은채과 연관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데려다주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마침 아빠도 출근해야 하니까요. 엄마는… 엄마가 힘들까 봐서요.”

지민이는 솔직히 말하지 않고 또 한 번 덮고 넘어갔다.

“엄마 안 바쁘니까 엄마가 매일 픽업하는 걸로 해.”

말을 마친 윤재욱은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이튿날, 강은채는 세입자를 찾아가서 방 한 칸만 내달라고 했다. 세입자는 흔쾌히 방을 내주었고 은채는 호텔에서 짐을 꾸리고 나왔다.

뭐니 뭐니 해도 제 집이 제일 좋은 법. 이 집은 부모님이 남겨준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렇게 거처가 해결되었고, 지유가 유치원에 다니는 문제도 서수연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원래 다니던 유치원보다 좋지는 않아도 윤재욱을 만날 일이 없어졌으니 마음은 홀가분했다.

은채는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데 송세희를 가서 건드리지만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윤재욱도, 송세희도 자신을 머릿속에서 지울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녀가 원하는 조용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다만 아직 지민이가 마음에 걸렸다.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도 되었다.

……

지민이는 똑똑한 아이였다. 아빠를 설득하지 못하자, 엄마가 너무 힘들 거라는 핑계로 송세희한테 기사를 한 명 배치했다. 그나마 기사가 있으면 자신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유치원에서 나오는 지민이는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송세희의 화를 돋우지 않으려고 나와서 송세희를 봤을 때도 억지로 웃음 지어 보이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 방 안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은 지민이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

요즘 들어 윤재욱은 제때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왔다. 윤재욱이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송세희는 얼른 그를 맞이하며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재욱 씨, 지민이 방에 한 번 가보세요. 애가 유치원에서 나올 때부터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거 같더니 오자마자 방안에 틀어박혀서 안 나와요.”

송세희는 남편 앞에서 언제나 현숙한 모습이었다. 아이도 지극히 잘 보살피는 것 같은데, 지민이가 왜 그녀를 싫어하는지 윤재욱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았어, 내가 가 볼게.”

위층에 올라가 먼저 안방에 들러 방과 외투를 내려놓고 지민이의 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는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그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윤재욱은 그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엄마가 그러는데 네가 기분이 별로라던데?”

그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아빠, 지유가 유치원에 안 왔어요…”

지민이는 울먹이며 커다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지유도, 아줌마도 이제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픈 나머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지유는 전학 갔대요. 이제 다시는 우리 유치원에 안 온대요.”

지민이는 울면서 말을 겨우 뱉었다. 다 말하고 나서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남자애가 운다고 아빠한테 꾸지람을 들을까 봐, 일어서서 침대로 뛰어가 베개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렇게 울면 소리가 덜 할 거라고 생각했다.

윤재욱은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아이가 울어서가 아니라, 지유가 전학갔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강은채와의 일 때문에 지유한테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유치원에서 떠나게 하려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강은채가 지유를 전학시켰다는 건 자신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슬슬 악이 오르기 시작했다. 자신과 얼마나 분명하게 선을 그을 건지 두고볼 거라 생각하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튿날 출근하여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권혁수가 다급한 안색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MT에서 보낸 사람은 며칠 뒤에야 도착합니다. A시리즈 금일 생산에 관해서 최종 확인이 필요한데 기타 부서에서는 전부 확인을 마쳤는데 소프트웨어 개발부만 확인을 못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거기는 관리자가 없어? 왜 이깟 일도 처리 못 해?”

소프트웨어 개발부 얘기만 나오면 저도 모르게 강은채가 떠오르며 동시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대표님, 전에는 모두 강 부장님이 준비한 거라, 너무 갑작스럽게 가셔서 아직 부서원들이 우왕좌왕하는 것 같습니다.”

권혁수의 업무 보고를 듣고 윤재욱은 미간을 좁히고 잠깐 사색했다.

“강은채는 지금 어디 있어?”

“아직 서울에 있는데 호텔에서 나간 뒤에 셰어하우스를 찾은 거 같습니다. 자료는 제가 어제 대표님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애는 어디 있고?”

윤재욱은 지유에 대해 물었다. 어제 저녁에 지민이 한 말을 들어보니 지유가 저에 대해 실망했을 것 같았다.

“아이는 집 근처에 있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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