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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미행인가, 우연인가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하지만 다 닫힐 줄만 알았던 문이 다시 열리며 윤재욱이 앞에 나타났다.

강은채는 또 한 번 놀란 눈을 들어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그를 쳐다봤다.

“차 키랑 아파트 열쇠는 제가 다…”

설명하려고 하는데 윤재욱이 성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공간에 마주 서 있게 되자 은채는 순간 당황했다.

“배 비서님한테 드렸는데요. 아이가…”

아이가 오늘 유치원에 가는 마지막 날이라고 얘기하려고 했으나, 윤재욱이 하는 행동에 의해 말이 뚝 끊어졌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등진 그는 정확하게 문 닫는 버튼을 눌렀다.

“너한테 마지막 기회를 줄게.”

그는 차갑게 말을 뱉고는 까만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은채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대표님, 제 선택은 어제와 같습니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선택이 맞다고 확신했다. 이 남자를 멀리 해야 송세희를 멀리할 수 있고, 그래야 4년 전의 고통을 잊을 수 있으니까.

“돌아와서 나한테 다시 부탁하게 될 거야.”

한기가 서린 눈빛이 은채의 얼굴을 쓸고 갔다.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사뭇 위협적으로 들렸다.

윤재욱은 돌아서더니 분풀이하듯 버튼을 쾅쾅 두드리더니 문이 열리자 바로 밖으로 걸어나가 버리는 그는 단단히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건물에서 걸어 나와 고개를 들어 햇살을 마주했다.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내리쬐었지만 왠지 따사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은채는 숨을 길게 들이쉬며 며칠 동안 가슴속에 쌓인 찌꺼기를 비워냈다.

“시훈 씨?”

막 가려고 하는 데 이번엔 이시훈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뭐지? 우연인가? 왜 그녀를 미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어제 차가 고장 났을 때도 갑자기 나타나더니.

송세희랑 같이 또 무슨 작당을 하는 건 아닌지.

“은채야 오늘 출근 안 해? 이 시간에 어디 가는 거야?”

밝게 웃는 얼굴 뒤에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은채는 알 수 없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야. 시훈 씨는 여기 왜 왔어?”

왜 자꾸 나타나는지 알고 싶었다. 정말 우연이 맞긴 한 지.

“난 비즈니스 때문에 왔지.”

그의 말투는 가볍고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전혀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 그래. 그럼 일 봐.”

은채는 말을 마치고 바로 발길을 옮겼다. 등 뒤에서 이시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는데. 내가 데려다줄게.”

“어, 괜찮아. 뭐 특별한 일 없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골치 아픈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금은 홀가분하고 몸이 날아갈 듯하여 좋기만 한데, 이시훈과 함께라니. 말만 들어도 싫다.

은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폭을 크게 밟으며 그곳을 떠났다.

……

즐거운지 우울한지 헷갈리는 하루였다.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MT에서 걸려 온, 해고를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후회할 거라고 했던 윤재욱의 말이 무슨 뜻인지 끝내 알게 되었다.

그의 행동력은 신속했다. 4년 동안의 노력이 하루 만에 그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해고 통보를 받고도 처음엔 두렵지 않았다. 그녀의 실력으로 직장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구직을 위해 몇 통의 전화를 걸고 난 후 생각이 바뀌었다. 예전에 스카우트하겠다고 연락이 자주 오던 회사에서도 모두 그녀를 거절했다. 윤재욱한테 자신이 그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를 이 바닥에서 매장하려고 제대로 이를 갈았나 보다.

지유가 하원할 시간이 다가오자 유치원 입구에서 지유가 나오길 기다리다가, 마침 유치원에서 나오는 윤지민을 보게 되었다.

윤재욱과 송세희와의 관계를 말끔하게 정리하려면 지민이와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이 아이와는 그러는 게 너무 아쉬웠다.

윤지민은 지유와 손잡고 걸어 나오면서 은채를 보더니 곧장 걸어왔다.

“아줌마, 오늘 아줌마네 집에 또 가도 돼요?”

아이는 기대에 찬 얼굴로 은채를 바라봤다. 아줌마의 집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름 상황을 가늠하고 있었다. 또 갈 수 있으면, 어젯밤 아빠와 아줌마 사이에 생긴 일은 지나가 버린 것이고, 못 간다고 하면 더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지민아…”

은채는 몸을 낮춰 쪼그리고 앉아 손을 지민의 어깨에 얹으며 아이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완곡하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집사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지민을 불렀다.

“지민 도련님, 집에 가셔야죠.”

주 집사는 윤지민에게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어느 집에 가요? 할아버지 집? 아니면 아빠 집?”

지민이가 묻자 주 집사가 대답했다.

“집에서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주 집사가 하는 말을 듣자 지민이의 작은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줌마, 전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지민아, 아빠가 집에 계시니까 괜찮아.”

은채는 걱정이 되었지만 티 낼 순 없었다. 그리고 몸 뒤에 숨겨놓았던 곰 인형을 지민이에게 내밀었다.

“이 곰 인형, 지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거 맞지? 이걸 아빠 집에 갖고 가서 침대 머리맡에 두고 아줌마가 보고 싶을 때 보는 거야, 알았어?”

은채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이 아이가 이렇게 마음에 걸릴 줄은 생각 못 했다.

“네, 고마워요, 아줌마.”

가장 좋아하는 곰 인형을 품에 안고서도 지민은 기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머릿속엔 온통 집에 가서 엄마를 마주해야 한다는 걱정뿐이었다.

지민이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 집사의 손에 이끌려 차로 향해 가고 있었다.

“엄마, 오빠가 집에 가기 싫어해. 오빠 불쌍해. 나 오빠 또 볼 수 있어?”

지유도 아쉬워하긴 마찬가지였다. 미련을 못 버린 눈으로 계속 뒤를 힐끔거리며 가고 있는 지민이를 보며,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기 싫어도 가야 해. 거기가 오빠 집이니까. 오빠의 삶은 거기서 시작되는 거야.”

은채는 지유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오빠가 보고 싶을 땐 볼 수 있을 거야. 못 본다 해도 오빠한테 전화하면 되잖아?”

……

서수연은 퇴근하자마자 호텔로 찾아왔다. 고작 이틀 연락 안 했을 뿐인데 강은채한테 이렇게 큰 일이 생겼다니,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달려왔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은채는 문밖에 서 있는 서수연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 어디에 있다고 얘기할 겨를도 없었는데 제 발로 먼저 찾아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

서수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시훈이 전화해서 알려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후에 출근 중이었는데 이시훈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강은채가 호텔에 묵고 있는 것을 봤다며 아는 사람을 통해 윤 씨 그룹 비서실에 알아보니 강은채가 직장에서 잘렸다고 했다며 그녀한테 말해주었다.

이시훈은 걱정이 되지만 자기가 직접 물으면 강은채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녀가 대신 잘 위로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빨리 말해봐, 어떻게 된 일이야?”

서수연은 대충 얼버무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은채는 더는 캐묻지 않고 앉아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서술했다.

“윤 대표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널 괴롭히는 거잖아.”

듣고 순간 화가 뻗친 서수연은 톤이 저절로 올라갔다.

“돈 많고 힘 있으면 다야? 그러면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돼? 그 사람, 분명 불순한 목적이 있을 거야, 송세희 대신 화풀이하려는 게 확실해.”

“됐어, 그만해. 나도 화 안 내는데 네가 왜 화를 내. 송세희 대신 화풀이하는 거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잖아. 둘이 부부인데. 난 나랑 이제 일로 엮이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고마워. 나도 좀 조용하게 살 수 있게 돼서.”

담담한 척했지만, 사실 은채의 가슴속에도 불덩이가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 않나.

“살면서 어떤 일은 꼭 마주치게 돼 있어. 네가 참는다고 될 일이 아니야. 너희 세 사람의 일이 이미 지난 지 4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얽혀있긴 마찬가지잖아.”

서수연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단순히 여기를 떠나고 송세희를 멀리한다고 하여 강은채의 생활이 편안하게 바뀔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 됐어.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두 사람 멀리하는 것도 좋은 일일지도 몰라.”

그녀는 각도를 바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을 피해 멀리 떠나는 것이, 은채가 송세희를 찾아가 복수하는 것보다는 백만 배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최후에는 상처만 남게 될 것이다.

한참을 침묵한 후에 수연은 또 입을 열었다.

“너 이제 어쩔 셈이야?”

“떠나야지, 뭐. 고모랑 은혜한테 갈 거야.”

은채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풀이 죽어 대답했다.

이곳은 그녀가 지내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은채야, 가지 마. 소프트웨어 개발을 못 하면 변호사 하면 되지, 넌 교사 자격증도 있잖아. 그냥 이 바닥에서만 일을 안 하면 윤재욱이 널 뭐 어쩌겠어.”

은채를 못 보는 게 마냥 아쉬운 서수연은 가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 언제 만날지도 모른다.

“순진하기는. 내가 서울에 있는 한 길거리에서 장사한다고 해도 찾아와서 방해 할 사람이야.”

윤재욱이 사냥감처럼 그녀를 단단히 겨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은혜의 집을 팔고 나면 바로 떠날 거야. 요 며칠 새에…”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려는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어, 은혜야.”

전화는 강은혜한테서 걸려 온 것이었다.

“언니, 뭐 좀 상의할 게 있어서.”

“응, 말해.”

은채는 나긋하게 말했다.

“언니, 나 서울 가서 수능 보고 싶어.”

강은혜는 이 말을 한 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어, 그래, 그렇게 해. 이걸 말하려고 전화했어?”

은채는 동생이 다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물었다.

“언니, 그게… 미리 언니랑 상의하고 싶은데, 나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어.”

동생의 말을 듣고 은채는 말이 없었다.

“……”

그때 당시 서울을 떠나게 된 건 은혜와도 관련이 있었다. 은혜는 부모님의 그 교통사고로 인해 서울에 있기를 꺼려했다.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세였다.

은혜를 좀 더 빨리 낫게 하기 위해 은채는 서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은혜야, 너 괜찮겠니?”

은채는 좀 난감해하며 물었다.

“언니, 나 다 나았어. 전혀 문제없어. 나 돌아가고 싶어. 엄마, 아빠도 서울에 있잖아. 거기가 내 집인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은혜의 목소리는 슬퍼 보였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이 잔잔하게 전해졌다.

“고모는? 고모는 뭐래?”

은채도 집에 돌아가고 싶고 부모님이 그리웠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 더는 여기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안 된다고 모질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답답하고 난감했다.

“아직 고모한테는 말 안 했어. 언니가 동의하면 다시 고모한테 얘기하려고.”

“알겠어. 고모랑 얘기해 봐. 고모가 그러라고 하면 나도 안 말릴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화를 끊고 난 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토하듯 내뱉었다.

“휴.....집을 잠시 팔 수 없을 거 같아. 고모가 동의하게 되면, 몇 달 뒤에 돌아와야 할 텐데, 살 곳은 있어야 하잖아.”

“그럼, 안 간다는 얘기야?”

서수연은 너무 뜻밖이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은혜가 서울에 돌아오겠다는 소식은 그녀한테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몰라. 그런데 은혜가 서울에 오겠다고 하면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지, 뭐.”

“그래, 여기가 집이잖아. 은혜가 돌아오고 싶어 하는 거, 당연하지. 은혜 이제 다 나았을 거야, 넌 걱정하지 마.”

수심이 가득한 은채를 보며 수연은 서둘러 타일렀다.

“은채야, 당분간 일 안 나가는 거면 호텔에 있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자. 우리 아빠, 엄마가 지유 등하원 픽업을 해줄 수도 있잖아.”

수연은 말하면서 벌써 은채의 캐리어를 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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