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이한테 당하다
‘전에 윤재욱과 만난 적도 엮인 적도 없어. 확실해. 틀림없이 내가 전생에 저 사람한테 빚져서 이번 생에 복수하러 온 걸 거야.’
“이거 놔요. 당신 와이프한테 가요.”
강은채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
“나는 와이프 없어.”
윤재욱은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요. 또 나를 속이려고요? 송세희 씨가 당신 와이프잖아요. 또 없다고 그럴 거예요? 윤재욱 씨, 당신한테 와이프가 있건 없건 상관없어요. 당신이 싱글이라고 해도 나는 당신한테 관심 없다고요.”
재욱의 말에 은채는 우스웠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던가.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한테 와이프도 아이도 있다는 걸 아는데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거짓말을 해?’
“강은채...!”
윤재욱은 결국 폭발하며 강은채를 밀어냈다. 하지만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강은채를 보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됐어. 우리 일은 내가 잘 생각해 볼테니까. 물건은 그대로 둬. 당신은 어디도 못 가.”
윤재욱은 차갑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지금 두 사람은 모두 감정이 격해져 침착하지 않은 상태라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한 사람은 한발 물러서며 양보해야 했다.
은채는 너무 화가 나 방에서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다. 그러다 갑자기 문 앞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두 아이들을 발견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강은채가 거실 소파에 앉자 두 아이는 그녀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서서 말하지 못했다.
“왜들 그래?”
강은채는 의아했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엄마랑 아저씨 술에 수면제를 탔어. 아저씨는...”
강지유가 먼저 어제 저녁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지유가 그런 거 아니에요. 아줌마, 다 제가 낸 아이디어예요. 우리 아빠 미워하지 마세요. 아빠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요.”
윤지민이 나서서 강지유의 말을 끊었다.
‘이건 내가 책임져야 해. 나는 남자니까’
“너희가 꾸민 일이야? 술에 수면제를 탔단 말이야?”
강은채는 너무 황당했다.
‘이 녀석들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생각 해?’
“지유야. 수면제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알아, 몰라?”
강은채는 처음으로 아이의 행동에 화가 났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수면제의 양이 조금만 컸어도 그녀와 윤재욱은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알아. 인터넷에서 안전 용량을 검색하고 엄마 서랍에서 수면제를 훔쳤어. 엄마, 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아저씨와 엄마가 싸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강지유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인식했다.
‘엄마한테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저씨와 더 심하게 싸울 것 같아. 그러다가 엄마가 진짜 나를 다시 부산으로 데려가면 어떡해? 부산에는 지민 오빠도 없고 아저씨도 없어. 돌아가기 싫어.’
“아줌마, 지유 탓 아니에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발 아빠랑 싸우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그냥 아줌마와 아빠가 잘돼서 이렇게 넷이 같이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윤지민은 다시 한번 책임을 떠안았다. 지민은 잘못을 인정했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죄를 지은 기분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은채는 슬퍼하는 지민을 보고 있자니 차마 나무랄 수가 없어 한숨을 쉬었다.
“지민아, 앞으로는 그런 생각하지 마. 아줌마와 아빠는 이루어질 수 없어. 너한테는 엄마가 있고 엄마는 그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하실 거야. 너희 세 식구도 남들처럼 행복할 수 있어. 집에 가면 엄마와 잘 이야기해 봐. 내 생각에는 지민이 엄마도...”
윤지민은 그를 위로하던 강은채의 말을 끊었다.
“잘 이야기할 수 없어요. 친엄마 아니에요.”
윤지민은 어두운 표정에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차갑고도 외로워 보이며 한스러워하는 모습은 윤재욱과 판박이였다.
강은채는 순간 충격 받았다. 지민의 말은 마치 원자폭탄처럼 그녀의 마음에 꽂혀 그녀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폭파하는 것 같았다.
“지민아, 그게 진짜야?”
강은채가 다급하게 물었다.
“진짜예요. 작년에 아빠 집 고용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윤지민은 여전히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말하면 말할수록 처량하고 슬펐다.
‘그래서 내가 우리 엄마를 안 좋아하는 거예요.’
강은채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불쌍한 지민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녀는 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안았다.
“가여워서 어떡해? 지민아, 너는 아줌마 마음속에서 최고야. 너는 강하고 착한 아이야.”
‘송세희가 친엄마도 아닌데 학대를 하면서 키웠겠지. 아빠는 또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엄하게 키웠겠어. 이런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줌마. 지민이 엄마 해주시면 안 돼요? 저는 아줌마가 좋아요. 아줌마가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아줌마가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지민은 너무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
“지민이 착하지. 울지 마.”
은채는 아이를 위로할 뿐 아이에게 그 어떠한 무책임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줄 수 없었다.
강은채는 처음부터 송세희가 지민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의심했었다. 게다가 송세희가 임신했을 시간도 들어맞지 않았다. 지금 아이한테서 이 모든 걸 듣고 나니 그게 사실이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지민이의 생모는 누구지? 윤재욱 말고 또 누가 알고 있을까?’
재욱은 은채의 집에서 나와 바로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윤지민은 강은채가 잘 보살필 테니 걱정되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갈아입을 옷가지들이 이미 배달된 상태였다. 곧바로 비서가 노크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대표님을 미행하고 계십니다.”
권혁수가 보고하자 윤재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젯밤 내가 어디 있었는지도 알아?”
“네. 방금 사모님께서 강은채 씨 집으로 가고 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권혁수는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사실대로 보고했다.
“알겠어. 계속 따라붙어.”
권혁수가 나가자 재욱은 은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야?”
“방금 애들 유치원에 데려다줬어요. 바로 회사로 가려고요.”
강은채는 평온하게 말했다.
“출근하면 먼저 내 사무실로 와.”
윤재욱은 명령적인 말투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당신이 나를 찾지 않아도 먼저 찾아가려고 했어요. 최대한 빨리 상황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강은채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배원영은 얼른 다가가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배원영의 표정은 여전히 우호적이지 않았다.
“강 부장님, 대표님께서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강은채는 배원영을 따라 대표이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대표님…”
배원영이 보고하려 하자 윤재욱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배 비서는 나가 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배원영은 멈칫하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나갔다.
커다란 대표 사무실에 적막이 흘렀다.
재욱이 끝까지 말하지 않자 은채가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어젯밤 일은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술에 수면제를 탔더라고요. 제가 대표님을 오해했어요.”
강은채는 말을 다 하고 가방에서 사직서를 꺼내 재욱의 사무실 데스크 위로 올려 놓았다.
“대표님, 이건 제 사직서입니다. 회사에서는 기술 고문 자리에 다른 분을 파견할 겁니다.”
강은채는 윤재욱이 폭주하는 걸 대비하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강은채, 도발하지 마. 내 동의 없이 못 떠난다고 이미 말했잖아.”
역시나 윤재욱은 노발대발하며 사직서를 보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강은채는 진작에 윤재욱의 반응을 예상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던 그녀는 태연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윤 대표님, 그건 대표님이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에요. MT 쪽의 사직서도 이미 준비했어요. 누구도 저를 막을 수 없어요. 그리고 위약금은 얼마나 물면 되는지 바로 저한테 알려 주세요. 당장 갚을 순 없어도 죽기 전에는 무조건 갚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강은채는 할 말을 다 하고 도도하게 자리를 떠났다.
‘남은 평생을 빚 갚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저 남자의 여자가 되지 않을 거야. 남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내연녀는 더욱 되지 않을 거고.’
“거기서 강은채!!”
윤재욱은 사자처럼 울부짖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무 무서워서 온몸을 떨었겠지만 강은채는 못 들은 척하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사무실 문을 열려고 손을 내민 순간 그에게 손이 잡혀 버렸다.
“내가 당신 앞길을 막을까 봐 두렵지 않아? 모든 걸 잃고 지유를 키워내지 못할까 봐 두렵지 않아?”
윤재욱은 강은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크고 따뜻한 손으로 강은채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을 놓으면 강은채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의 차가운 냉기가 강은채의 얼굴에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강은채는 그의 냉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결연한 눈빛으로 윤재욱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두려워요. 커리어가 막히면 폐지를 줍거나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지유를 키울 거예요.”
“당신…”
윤재욱은 고집스러운 이 여자를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뭘 원해?”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노려보았다. 경직된 분위가 지속되더니 결국 타협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재욱이었다.
“원하는 거 없어요. 앞으로 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지켜주세요. 다시는 당신의 여자가 돼란 말도 하지 말고요.”
강은채도 한걸음 양보했다.
‘윤재욱이 이 두 가지 조건에 동의한다면 계속 일할 마음 있어.’
“좋아. 후회하지 마.”
재욱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존중이란 건 여러 측면이 존재하고 최소한의 존중이라는 걸 정의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여자가 된다는 것도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두 사람이 타협을 본 뒤에야 은채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계속 업무를 이어갔다.
재욱은 은채가 자리를 뜨자 그제야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던 목적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녀 때문에 화가 나서 그걸 잊고 말았다.
강은채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고 업무를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세희가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다음부턴 노크하고 들어와 주세요. 재벌 출신이고 윤씨 가문 사모님이라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셔야죠?”
강은채는 고개를 들어 송세희를 바라보더니 그녀의 눈에 서린 분노를 무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위선 좀 작작 떨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예의가 뭔지 알기나 해요?”
송세희의 목소리는 아주 컸다. 그녀는 온갖 불만과 분노를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저랑 싸우려고 오셨어요? 그렇다면 나가서 싸우죠. 대표 사모님께서 얼마나 악독한지 모든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말이죠.”
강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대표 사모님이 창피한 줄 모르는데 내가 무서울 게 뭐가 있어?’
강은채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 몰랐지만 언제든지 그녀를 창피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은채의 말에 송세희는 그제야 들어올 때 문을 닫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그녀는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세게 닫더니 손가락으로 강은채를 짚었다.
“강은채, 당신은 상도덕도 없어요? 내가 대표 사모님인 걸 알면서도 내 남편을 꼬셔?”
흥분한 송세희는 손을 들어 강은채를 때리려 했다.
지난번의 교훈을 기억한 강은채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는 허공에 들린 송세희의 손을 한발 빠르게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요. 문 열고 로비로 가서 나를 때리든지, 옥상으로 가든지 하세요. 이 사무실에 중요한 실험 시제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하나라도 망가뜨리면 당신 남편이 유엔 의장이라 해도 구해줄 수 없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