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그러면 왜 내 침대에 올라온 거야?”
윤재욱이 갑자기 화를 내며 크게 소리쳤다.
"윤 대표님, 당신이 저번에 그렇게 말했잖아요.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며칠 전 재욱이 했던 말이 아직도 은채의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해놓곤 왜 그렇게 소리치는 거지?
"화난 거야?"
재욱의 귀에는 은채가 심술을 부리는 거로 들렸다.
“아니요, 전 화낼 이유 없는데요.”
은채는 냉소적으로 말했지만, 마음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인정하지 않는 게 싫다면, 차라리 인정해 버리고 말지.
은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윤 대표님,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우리 둘 다 원했던 일이잖아요. 처음부터 서로 그렇게 약속했잖아요….”
"조용히 해, 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듣기 싫어. 이건 또 네가 나를 유혹하려는 수작이지?"
재욱은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다.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무슨 문제에 부딪혔는지 물어보려던 것이었지만, 그녀의 무심한 태도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
은채는 그런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반박하려 했지만 결국 하려던 말을 참았다. 그녀가 계속 말해봤자 재욱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둘 사이의 갈등만 깊어질 뿐이었다.
그냥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두자.
은채는 몸을 돌려 바로 사무실을 떠나버렸다.
유치원 앞, 은채가 지유를 데리러 나와 있었다.
"아줌마!"
윤지민이 먼저 뛰어나왔다.
"지민아!"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열정적으로 인사했지만, 사실 거의 매일 얼굴을 보고 있었다.
"엄마!"
뒤따라오던 지유도 엄마를 부르고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재욱이 은채의 뒤에 서 있었다. 지유의 인사를 듣고 나자,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빠, 아빠가 나 데리러 온 거야?"
지민이 흥분해서 물었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아빠가 두 번이나 자기를 데리러 왔으니 세 번째, 네 번째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겸사겸사 널 데리러 온 거야."
겸사겸사? 뭘 겸사겸사한다는 거지, 재욱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윤 대표님."
은채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나서….
"윤 대표님, 저와 지유는 먼저 가볼게요."
은채는 지유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
"아줌마, 저 지유네 집에 가고 싶어요."
지민은 은채를 급히 붙잡았다.
하지만 은채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욱이 먼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차에 타, 내가 데려다줄게."
지민은 조금 놀랐다.
"저를 어디로 데려다줘요?"
지민은 또 아빠랑 자기 집에 가는 줄 알고 겁을 먹었다.
"지유네 집."
"정말요? 고마워요, 아빠!"
지민은 오늘 하루 동안 받은 행복이 갑자기 너무 많아져 신나서 방방 뛰었다.
지민은 차로 달려가려다 다시 돌아와 지유의 손을 잡고 다시 차를 향해 달렸다.
"엄마, 나 아저씨 차 타고 집에 갈게."
은채가 반박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이미 떠나버리고 없었다.
이게 뭐지? 윤재욱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아파트 단지로 돌아와 차를 주차하고, 모두 함께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 이시훈을 보게 되었다.
은채는 순간 멈춰 서서 시훈에게 다가갔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냥 널 보려고 왔어."
시훈의 얼굴에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지금 얼어붙은 얼굴의 윤재욱과는 천지 차이였다.
"윤 대표님도 계시네요."
시훈은 아무렇지 않게 재욱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네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에 그는 질투했고 동시에 불안했다.
"이 대표님께서 여기에 계시면 안 될 텐데요."
재욱이 차갑게 말했다. 그의 눈은 이미 위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별일 아니에요, 윤 대표님께선 모르실 수도 있지만, 저와 은채는 오래된 친구라 이번에 돌아온 김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려는 거예요."
시훈은 여전히 우아했고, 그의 모습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시훈이 친근하게 은채를 부르는 것을 보고 재욱의 얼굴은 완전히 먹구름에 덮여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악마 같았다.
은채는 이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서둘러 뒤돌아 재욱에게 말했다.
"당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올라가요. 저도 이시훈 씨와 할 말이 있어요."
"아저씨, 우리 올라가요."
"아빠, 나 피곤해요. 올라가서 쉬고 싶어요."
두 아이는 빠르게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재욱을 데리고 올라갔다.
은채와 시훈은 작은 공원의 정자에 앉았다.
"이시훈, 우리 사이의 일은 이미 다 이야기했잖아. 다 지난 일이고 우리는 이제 각자 잘 살고 있으니,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마."
은채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 일에 대해 4년 전에도 그녀는 따지지 않았고, 이제 와서 그들을 탓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오히려 이시훈과 송세희가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은채는 이런 복잡한 상황이 더는 이어지지 않길 바랐고, 시훈과 세희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은채야, 나도 알아. 예전 일은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우리는 연인은 되지 못했지만, 지금은 최소한 친구로 남을 수 있잖아. 네가 이제 막 돌아왔으니 이 도시가 낯설 거야. 혹시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시훈이 진심으로 말했다.
시훈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은채는 놀랐다. 며칠 전만 해도 그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고 들더니, 오늘은 왜 친구가 되자고 하는 걸까?
"이시훈, 지금 당장은 네가 특별히 도와줄 일이 없어. 하지만 나중에 필요하면 꼭 말할게."
은채는 마음은 쓰라렸다. 만약 4년 전에 그때, 시훈이 오늘처럼만 도와주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친구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은채는 한 번 연인이었던 사람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은채는 친구를 사귈 때 더욱 조심스러워야 했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이용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은채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은채야, 송세희한테 복수하려고 하지 마. 윤재욱과 너무 가까워지지도 말고.”
시훈은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 방금 재욱이 그녀 곁에 있는 것을 보자 더욱 불안해졌다.
이 장면을 송세희가 보면, 은채는 곤란해질 것이다.
은채는 멈춰 섰다. 시훈이 여기에 온 진짜 이유를 듣자,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송세희 같은 음흉한 여자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이토록 최고의 남자들이라니, 세상은 정말 불공평해.
재욱은 송세희 때문에 은채와 함께 잤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못했고, 시훈은 송세희를 위해 그녀와 화해하러 와서 친구라는 명분으로 충고했다.
이 남자들, 다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왜 나를 송세희를 사랑하기 위한 디딤돌로 여기는 거야? 왜 모두가 송세희를 보호하는 거야? 송세희가 전생에 뭐 우주라도 구했어?
은채는 마음이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자신의 운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이 두 남자를 만나게 됐을까?
은채는 발걸음을 옮기다 갑자기 중요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시훈,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말해봐.”
“4년 전, 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전화했을 때, 너 송세희와 함께 있었지?”
은채는 진지해졌고, 시훈은 조금 긴장했다. 은채가 4년 전의 그 일을 밝히려는 줄 알았다.
“맞아.”
시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대답했다.
“그 이후로도 송세희가 유학을 마칠 때까지 계속 같이 있었던 거지?”
“맞아.”
시훈의 대답을 들으며, 은채의 마음은 점점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물었다.
“그동안 그녀는 한 번도 귀국하지 않았어?”
“아니, 유학이 거의 끝날 때쯤 그녀의 친부가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학업을 마친 후에야 귀국하겠다고 고집했어. 그때 우리는 헤어졌지.”
시훈은 죄책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4년 전의 진실을 알고 나서야, 다시 돌아보니 그는 자신이 쓰레기 같다고 느꼈다.
“알겠어, 말해줘서 고마워. 이시훈, 송세희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어. 난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이제 돌아가.”
은채는 이번에 진정으로 돌아섰고, 뒤에서 답답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시훈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송세희를 걱정한 게 아니라, 그녀가 다칠지 걱정하고 있었다.
은채가 집에 돌아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윤재욱에게 잡혀 비상계단의 구석으로 끌려 들어갔다.
“쟤가 너한테 왜 온 거야? 너희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재욱은 화난 얼굴로, 큰 소리로 따졌다.
“나랑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에게 말할 필요가 있나요?”
은채도 지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방금 전 시훈과 있을 때는 계속 참는 것 같았는데, 지금 윤재욱은 왜 또 화를 내는 건가? 도대체 그녀가 그를 뭘 또 불쾌하게 했단 말인가?
“잊지 마, 넌 내 침대에 올랐어. 그러니까 넌 내 여자야. 다른 남자들과 함부로 어울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재욱은 대답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은채가 자신한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둘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윤재욱 씨, 당신 침대에 올랐으니 당신 여자라고요? 그럼 송세희가 물어봤을 때 왜 내가 당신 여자라고 말하지 못했나요?”
은채가 큰 소리로 맞받아쳤다. 원래도 억울해 미칠 것 같았는데, 윤재욱까지 거기에 불을 지피다니, 꼭 그녀를 무너뜨려야만 속이 시원한 걸까?
“강은채…”
재욱은 화가 났지만, 그와 동시에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너 송세희라는 이름은 어떻게 알아?”
재욱은 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은채는 잠시 멍해졌다가, 재욱이 그녀와 송세희 사이의 원한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아직 모른다면 계속 숨기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더 복잡해질 테니까.
“별거 아니에요, 회사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평소 거짓말을 잘 못하는 그녀는 재욱이 그녀의 떨리는 눈빛을 눈치챌까 봐 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마치 모든 걸 간파할 것만 같은 예리한 시선을 말이다.
“강은채, 넌 지금 거짓말하고 있어. 회사 사람들이 이런 걸 말할 리가 없잖아.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은채의 변명은 오히려 재욱의 의심을 키웠다.
“못 믿겠으면 말고요, 더 할 말은 없어요. 그리고 나랑 이시훈 사이의 일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우리가 무슨 일이 있었든 그건 그저 불장난 같은 거 였을 뿐이에요. 그런 걸로 날 묶어두지 마요.”
은채가 강하게 나갔다. 재욱이 아무리 물어봐도 그녀는 자신과 송세희 사이의 원한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건 그녀의 치욕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되면 또 한 번 짓밟힐 기회가 될 뿐이었다.
특히 윤재욱에게는, 그는 원래부터 그녀에게 편견이 있었기에 더더욱 많은 것을 알려선 안 됐다.
“……”
재욱은 은채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아낼 수 있었다. 다만 이번엔 그녀의 고집이 극에 달했다.
“난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러 갈 게요. 날 믿는다면 아이를 여기 두고 가요. 믿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데리러 오고요.”
은채의 말 속엔 재욱과 같이 식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아이를 너 같은 거짓말쟁이에게 맡길 수 없지. 지금 당장 데려갈 거야.”
재욱은 화난 목소리로 말하고 바로 은채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의 고집이 얼마나 오래갈지 두고 보려고 했다. 오늘 밤 그가 먹을 밥이 있을지 없을지도 궁금했다.
“당신…”
은채가 급히 달려가 따라잡았다.
“뭐 하려는 거예요? 아이가 며칠 동안 오지 않았는데, 저녁이라도 먹고 가게 해주면 안 돼요?”
은채는 지민과 헤어지기 싫어서 목소리를 낮췄다.
“……”
“그래요, 당신도 같이 저녁 먹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