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송세희의 정체
분위기에 취해 그와의 신체적 대화를 즐기고 있던 강은채는 4년 전의 그 느낌을 되찾은 듯했다. 똑같은 체온, 똑같은 체취는 마치 그녀를 4년 전 그 산 정상위의 별장으로, 4년 전 항상 어두웠던 그 침실로 데려간 듯했다.
4년 전 그 남자는 지금의 윤재욱보다 더 차가웠지만, 그 특별한 상황에서 은채에게 다른 온기를 주었다.
비록 짧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은채는 모든 일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런 느낌이었다. 비록 술 때문에 몸이 뜨거웠지만 그한테서 오는 체온이 더 많이 느껴졌다.
다음 날.
새벽 4시, 은채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고는 여기가 윤재욱의 휴게실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확인한 은채는 머릿속이 텅 비었다. 한참을 완전히 멍해 있다가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은채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몽롱한 정신으론 어젯밤 일이 꿈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젯밤 일은 꿈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릴수록 어젯밤의 일이 더 또렷해졌다.
다시는 남자를 찾지 않겠다고, 남자와는 멀리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녀가, 스스로 윤재욱과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문에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했던 거야?
설상 남자가 필요했더라도 그게 하필 윤재욱여선 안 되는 거였다.
그는 원래부터 그녀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고 굳게 믿었는데, 이제 그의 침대에 올라간 이상 은채는 더 이상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었다.
시간을 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떠나야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은채는 일단 재빨리 옷을 입었다. 하지만 옷을 다 입고 나서야 제일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윤재욱은 어디 있는 거야? 왜 나 혼자만 여기 있는 거지?
은채가 이것 때문에 어리둥절해 있을 때, 재욱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재욱은 은채와 하룻밤을 함께 보낸 후에도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차가워졌다.
그는 싸늘하게 은채를 한 번 쳐다본 후, 그녀에게 다가가 흰색 알약을 내밀었다.
“먹어. 나중에 귀찮은 일 겪고 싶지 않으니까.”
은채는 그 조소 어린 피임약을 보며, 가슴이 날카로운 얼음에 찔린 것처럼 아파졌다.
“신중하시네요. 하긴, 오늘 밤 일로 나중에 제가 애라도 낳으면 당신은 진짜로 끝장일 테니까요.”
은채는 두말없이 약을 집어 들고 바로 삼켰다.
“약을 먹었으니 전 이제 가도 되겠죠?”
은채는 재욱을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본 후, 걸음을 옮겼다.
“어제 지유와 널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어.”
재욱은 외투를 들고 은채의 뒤를 따라갔다.
“그럴 필요 없어요.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그걸로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은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사무실 문을 향해 걸었지만, 재욱은 그녀를 끌고선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윤 대표님…”
“조용히 해.”
은채가 거절하려 하자, 재욱은 바로 말을 끊고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곧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고, 재욱의 차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순간, 재욱은 손에 들고 있던 외투를 은채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조금 의외였다.
“고마워요.”
밖의 기온은 아직도 살짝 낮았고, 그녀도 옷을 얇게 입었기 때문에 외투가 필요했던 참이었다.
은채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고 막 차에 타려는 순간,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은채와 재욱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손에 갈아입을 옷을 든 송세희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희는 은채를 보자마자 얼굴에 살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상황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이 어젯밤을 함께 보낸 것이 분명했다.
비서가 재욱이 아침 회의가 있다고 세희한테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렇게 일찍 옷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고 일찍 오지 않았다면, 이 장면을 목격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충격을 받은 건 은채도 마찬가지였다. 은채는 송세희와 마주쳤다는 것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입에서 나온 ‘여보’라는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은채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재욱을 쳐다보았다. 여기 남자는 그밖에 없었으니, 송세희가 부른 ‘여보’는 재욱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지?
은채는 이때까지 송세희를 윤재욱의 여동생이라고만 생각했지, 그의 아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4년이 지난 후 모든 게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시 이렇게 얽히게 된 것일까?
오히려 재욱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비록 세희의 눈에서 적대감을 읽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차 문을 닫고, 차 뒤로 돌아 세희에게 다가갔다.
“옷은 주고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 있어.”
재욱은 늘 차가운 태도로 말을 했는데, 그건 자신의 아내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재욱은 세희가 건넨 가방을 받은 후, 그대로 돌아섰다.
“여보, 이 여자분은 누구세요?”
세희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설사 재욱에게 심하게 혼나더라도 강은채 앞에서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싶었다.
“회사 동료야.”
재욱은 화를 내지 않았고, 세희의 질문에 대답한 후 바로 차에 올라탔다.
은채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세희가 화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니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차 문을 열어 차에 탔다.
집으로 가는 길.
“당신 아내가 우리가 같이 있는 걸 봤는데…”
은채는 세희가 재욱의 아내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으나 직접 묻기 어렵기 때문에 말을 돌려서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재욱이 냉정하게 끊었다.
“봤는데 뭐? 우리가 뭘 했는데?”
재욱의 말은 한여름에도 은채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재욱의 말은 이미 송세희가 그의 아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었고, 동시에 그들과의 관계도 부정한 셈이었다.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죠.”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고개를 돌렸고, 희미해진 눈빛은 창밖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고, 평생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
어제 그렇게 서로를 갈망해놓고도 인정하지 않는다니.
됐어,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랬어. 다음번엔… 아니,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집에 도착하자, 서수연과 지유는 자고 있었다. 은채는 씻은 후 혼자 소파에 누워 세희를 떠올렸다.
송세희가 윤재욱의 아내였다니.
어쩐지 그녀가 그렇게 거만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뒤엔 서울시, 나아가 전국에서 가장 대단한 남자가 남편으로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제멋대로 굴고, 아무리 오만방자해도 뒤에서 그녀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은채는 윤지민이 떠올랐다. 세희가 바로 지민의 엄마였던 건가?
송세희의 오만함, 그녀의 음침하고 불같은 성격을 생각하니 그녀가 지민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다만 불쌍한 건 착하고 똑똑한 지민이었다.
잠깐만…
은채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생각을 멈췄다.
……
역시 그때의 예상대로, 세희는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회사 옥상에서였다.
은채는 세희의 뒤로 다가갔다.
"이젠 당신을 송 여사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세희는 은채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섰고, 말도 없이 바로 은채의 뺨을 때렸다.
은채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세희가 손을 댈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해서 그대로 뺨을 맞고 말았다.
"미쳤어요? 당신이 뭔데 날 때리는 거예요?"
은채는 반격하지 않았지만,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화가 치밀어 송세희를 밀쳤다.
"넌 맞아도 싸. 어제 내가 경고했는데, 오늘 또 내 남편을 유혹해? 네가 뭔데? 네가 내 남편을 유혹할 때 내가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할 줄 알았어?"
세희는 뺨을 한 대 때렸지만, 여전히 마음속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
아침에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장면을 보고 난 후, 은채를 그대로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뺨만 한 대 때린 건 그녀가 참고 또 참은 결과였다.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그럼, 너는? 넌 내 이미 남자 친구를 빼앗지 않았던가? 송세희 씨, 뻔뻔한 말인 걸 알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죠. 만약 그가 네 남편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난 진작에 멀리 피했을 거야, 누구와는 다르게."
은채는 분노에 차서 일부러 세희를 도발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운명의 장난인 것 같았다. 4년 전 송세희는 그녀의 남자를 빼앗았고, 4년 후엔 그녀가 재욱의 침대에 올라탔다.
부부 사이에 끼어드는 건 수치스럽게 느껴졌지만, 송세희의 따귀로 인해 그녀는 몹시 화가 났다.
이 기싸움에서 반드시 한 번은 이겨야 했고, 송세희를 더 화나게 만들어야만 했다.
"뻔뻔하네. 가난해지고 지위도 없어지니까, 이제 이렇게 더러운 짓까지 하는 거야? 강은채, 난 네가 돌아온 목적이 뭔지 진작에 알았어. 똑바로 말하는데 4년 전에도 내가 당신을 이겼고, 지금도 널 두려워하지 않아. 실력 있으면 어디 한번 윤재욱을 빼앗아 봐. 이번엔 네가 이길지 내가 이길지 두고 보자고."
세희는 폭언을 퍼부었다. 은채가 이렇게 뻔뻔해질 줄은 몰랐고, 더 이상 그녀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은채가 재욱을 빼앗아 가는 것을 절대 두고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좋아, 한번 해보자고."
이 순간 은채에게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세희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이 싸움이 정말 시작은 될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천박해."
송세희는 은채를 한 번 노려본 후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
"송세희, 네가 내 뺨을 때린 걸 반드시 돌려줄 거야."
은채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말은 절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음에 돌려줄 따귀는 바로 이시훈을 빼앗아 간 것에 대한 따귀일 것이다.
원래는 예전 일까지 따지고 싶지 않았지만, 송세희가 너무 사람을 무시하니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한편, 시훈은 그 시각 카페에서 서수연과 마주 앉아 있었다.
"수연아, 당시의 일에 대해 넌 진실을 알고 있을 텐데, 더 이상 숨기지 말고 말해줘."
시훈이 수연을 억지로 카페에 데려온 것도 이번이 세 번째였다.
"이시훈, 그 일은 벌써 오래된 일이잖아. 네가 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수연은 진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는 은채의 부탁을 받았지만, 시훈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실을 물어봤다. 그녀는 더 이상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난 그저 진실을 알고 싶어. 진실을 알아야 포기할지 계속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
시훈은 오늘 반드시 수연의 입에서 진실을 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포기? 계속? 무슨 뜻이야?"
수연은 무언가 눈치채고 다시 물었다.
"난 아직도 은채를 사랑해. 계속 사랑해 왔어.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
시훈은 진지하게 말하며, 은채를 계속 사랑해 왔기에 지금까지 다른 여자가 없었고, 지금도 화가 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했다.
"하…."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이시훈, 난 네가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그렇게 사랑했으면 왜 4년 전에는 은채의 해명을 듣지 않았어? 너희 사이의 모든 걸 네가 다 망친 거잖아."
수연은 시훈이 은채를 사랑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4년 전과 완전히 다르다고생각했다. 은채의 집안 문제를 떠나 그녀에게 지금 아이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도 알아. 그땐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어. 하지만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화가 나서 그랬던 거야.”
수연의 말을 들으며, 시훈은 당시의 일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시훈, 나랑 함께 갈 곳이 있어. 가면 너도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