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왜 자꾸 따라와요?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 강은채는 현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송세희는 문 옆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은채는 송세희를 동네 공원으로 데려갔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지?”
강은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강은채, 혹시 내가 지난번에 경고한 거 잊었니? 이시훈 찾아가서 함부로 말한 거 맞지? 설마 이시훈과 재결합하고 싶은 거야?”
송세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가식적인 얼굴은 보기만 해도 메스꺼웠다.
“그건 나랑 이시훈 사이의 일이니 송세희 넌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지 마시지? 우리가 재결합한다고 해도 너랑은 아무 상관 없잖아? 두 사람 이미 헤어지지 않았나?”
강은채는 굳이 송세희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엇을 하든 그녀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한때 강은채는 송세희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송세희는 그녀의 눈에 길을 지나가는 행인만도 못한 존재였다.
“강은채, 제발 너나 망상하지 마. 네 신분과 지위는 이시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경고하는데, 앞으로 이시훈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널 윤 씨 기업에서 쫓아낼 거니까. 나한테 그 정도 능력은 있거든.”
송세희는 흉악한 표정으로 강은채를 위협하고 있었다.
4년 전의 일이 수면 위에 드러난다면, 송세희의 현재 신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녀는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하하…”
강은채는 비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빨리 나를 쫓아내 봐. 내일이라도 당장 해고시키라고. 그럴 수 있다면 말이야.”
지금의 강은채는 이러한 위협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해고 당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다면 윤재욱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너… 강은채. 난 더 이상 그때의 그 불쌍했던 송세희가 아니야. 널 무너뜨리는 건식은 죽 먹기라고. 그러니까 날 건드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못 볼 꼴을 보게 될 거야.”
송세희는 다시 한 번 악에 받친 목소리로 협박했다. 지금 눈 앞의 송세희는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송세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무슨 일을 하든,그 누구도 나를 바꿀 수 없어.”
말을 마치고, 강은채는 바로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뒤에서는 분노에 찬 송세희의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강은채는 길을 걸어가며 잠시 고개를 저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해외에 유학까지 다녀왔는데도 수준이 이것밖에 되지 않다니.
강은채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네를 한바퀴 돌며 천천히 걸었다.
오늘 하루 이시훈과 송세희에게 번갈아 가며 당한 스트레스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치 바늘로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특히 송세희의 신분이 이렇게 변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비록 이 모든 것이 그녀와 관련이 없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아도, 그녀의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강은채는 생각할수록 답답함이 가라앉지 않아 우연히 지나치던 술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쯤은 술에 취해 자신을 놓아주고 싶었다.
그녀가 바에 앉자 바텐더는 그녀에게 위스키 한 잔을 건네주었다.
강은채는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바텐더가 주는 대로 마셨고, 그 술이 얼마나 독한지,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심란했던 일들을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 잔 한 잔씩 주는대로 마시다가 머리가 어지럽게 핑핑 돌 때가 되어서야, 이만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상 계산을 하려고 보니, 돈도 휴대폰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가 난처해하고 있을 때,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강은채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대표님은 정말 어딜가도 다 계시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대신 계산 좀 해주세요.”
윤재욱을 만나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강은채는 마지못해 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다만 그의 얼굴이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계산은 다 했으니까 따라와.”
윤재욱의 차가운 목소리는 정말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강은채는 점점 취기가 올라왔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녀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다행히 윤재욱이 부축해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만 넘어졌을 것이다.
“하하… 고마워요.”
강은채는 윤재욱의 부축을 받으며 술집을 나섰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는데다 알코올이온몸에 퍼지면서 그녀는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량이 형편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
너무 추워서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려고 하려던 참에 재욱이 입고 있던 그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강은채는 고개를 들어 윤재욱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감사, 감동, 그리고 어리숙한 허당기가 배어있었다.
“고마워요.”
윤재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강은채를 차에 태웠다. 하지만 강은채는 승차를 거부했다.
“잠깐만요. 이대로 집에 갈 수 없어요. 제가 술을 마신 걸 알면 지유가 걱정할 거예요.”
강은채는 무언가를 두리번거리며 길가에 앉았다.
“먼저 가세요. 전 술이 깬 다음에 돌아갈게요.”
강은채는 윤재욱에게 이만 가라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강은채를 두고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윤재욱도 차 문을 닫고 그녀 옆에 걸터앉았다.
강은채는 멀미가 심한 탓에 옆에 윤재욱이 앉아있던 말던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있었다.
“잠깐만, 어깨 좀 빌려주실래요?”
강은채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다 나만 괴롭혀. 왜 나만 괴롭히는 거야? 내가 전생에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했길래…”
“…”
“난 이번 생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안 돼? 제발 아무도 건드리지 마…”
강은채는 누가 들을지 말지 모르는 듯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윤재욱은 잠자코 가만히 강은채의 하소연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하소연보다 더 구슬프고, 상처보다 더 아프게 들려왔다.
윤재욱은 고개를 떨구고 눈썹을 찡그렸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걸까?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거지?’
윤재욱은 한 시간 전, 그는 혼자 차를 몰고 강은채의 집에 갔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정신없는 몰골로 길가를 건너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차의 속도를 늦추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강은채의 뒤를 계속 따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줄곧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걱정거리와 고민이 얼마나 큰지 그때서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윤재욱은 그녀가 술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돈이 없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강은채의 붉어진 얼굴과 거친 숨결을 곁에서 바라보는 윤재욱의 마음은 좀처럼 편치 않았다.
그렇게 재욱이 아무 말 없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저씨, 저 지유에요. 엄마가 외출하셨는데, 휴대폰을 가지고 가지 않아서 엄마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걱정에 가득찬 지유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엄마는 지금 나랑 같이 있어. 지유는 지금 집에 혼자 있는 거야?”
지유에게서 걸려온 전화라는 것을 알고, 그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엄마는 아저씨랑 같이 있으니 그럼 이제 걱정하지 않을 게요. 전 수연이 이모랑 함께 집에 있어요.”
지유의 목소리는 금세 밝아졌고, 그녀는 한껏 기뻐하는 것 같았다.
“옆에 누군가가 같이 있어주면 됐어. 내가 나중에 엄마 집에 데려다 줄게.”
윤재욱은 술에 취한 강은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전 지유가 걱정할까 봐 근심하고 있다던 강은채의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그녀를 조금 늦게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오늘 엄마 생신인데 무섭게 굴지 마세요.”
지유는 오늘 다 같이 엄마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로 했는데 왜 갑자기 엄마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지유는 내심 아저씨와 엄마가 함께 생일을 보내기를 바라며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생일?’
순간, 윤재욱은 머릿속이 한순간에 새하얘졌다.
‘이건 또 무슨 우연의 일치지?’
그가 오늘 강은채를 찾아온 이유는 한가지 또 있었다. 바로 오늘은 강은채와 닮은 ‘그 사람’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생각이 나 강은채를 한 번만이라도 더 보려고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오늘이 강은채의 생일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생일까지 비슷한 두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는 강은채가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를 두 번이나 불러도 반응이 없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차에 태웠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줄 수도, 호텔에 갈수도 없었다. 윤재욱은 결국 그녀를 회사로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강은채를 안은 채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눕혀놓고 막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강은채가 그의 손목을 휙 잡았다.
“가지 마세요. 오늘은 제 생일이니까 12시 넘으면 가세요.”
강은채는 눈을 반쯤 뜬 채 어렴풋이 말했다.
그 바람에 윤재욱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야. 이건 그저 강은채가 술을 많이 마셔서 실수하는 거야. 아니면 혹시 일부러 다 알고 내 약점을 이용해서 나를 꼬시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윤재욱은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강은채가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인정했기에, 사기꾼이라면 그의 약점을 노리고 있는 게 당연할 터였다.
재욱은 은채의 곁에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강은채가 갑자기 두 팔을 뻗어 재욱의 목을 감쌌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거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강은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윤재욱의 목소리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낮고 굵게 떨렸다.
“알아요, 아이도 낳았는데 모를 리 없죠.”
강은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를 여기로 데려온 건 결국 절 원한 거 아니에요? 대표님도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있었겠죠. 제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대표님을 유혹하려는 걸지도 몰라요. 그러니 후회하지 마세요.”
강은채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왜 이렇게 직설적으로 행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윤재욱을 거절한 건 바로 나야.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야? 미쳤어. 미친 게 확실해. 아니면 알코올성 바이러스가 뇌에 침투하여 내 생각을 왜곡시키고 있는 걸까.’
“난 당신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도 왜 나를 유혹하는 거야? 상처받을 사람이 당신이 될까 봐 두렵지 않아?”
윤재욱의 차가운 말에는 욕망이 섞여 있었다. 평소에 한없이 새까맣던 눈동자도 욕망의 불길에 휩싸인 듯 타올랐다.
남녀 간의 이런 게임에서 보통 지는 쪽은 여자였다. 하지만 재욱은 강은채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조차 두렵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녀를 완벽히 정복해 폭발적인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다.
어쩌면 이 게임에서 마지막에 패배하는 족은 강은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가 대표님을 꼬시는 이유는 제가 여자이기 때문이에요. 상처 입는 것에 대해서라면, 전 이미 온갖 상처를 다 겪어봤으니 예전에 겪었던 상처들보다 더 잔인할 수 있을까요?”
강은채의 두 눈이 흐릿해졌다. 조금 전 자신의 대답이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했다. 육체적 갈증 때문인지 그녀는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후회하지 마.”
“대표님도요…”
재욱은 더 이상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입술에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마치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 듯 격렬하게 타올랐다.
서로의 옷은 빠른 속도로 벗겨지고, 피부가 맞닿았다. 마치 오랜만에 서로를 되찾은듯, 그들은 다시금 서로의 익숙함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하나로 맞아떨어지면서, 그들의 몸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