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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이시훈의 의심

강은채는 한동안 멍해졌다. 마치 몇 초 동안 심장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눈물로 흐릿해진 눈빛으로 윤재욱을 바라보며 의아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내연녀는 제 취미가 아니에요.”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 강은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대답에 윤재욱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강은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내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 알아? 내가 너한테 이런 기회를 준 건 너에게 큰 영광이야.”

“전 아마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봐요. 그래서 이번 생에 이런 업보를 받은 거죠. 대표님이 준 영광은 제게 너무 커서 감당할 수가 없네요.”

강은채는 입가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에 눈썹 끝에 있던 머리카락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강은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는 이렇게 위험한 남자와 위험한 관계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기 여자가 되라고? 도대체 왜? ’

강은채는 내연녀라는 직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잘난 체하는 남자에게는 더더욱.

강은채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윤재욱 옆을 스쳐지나가며 화장실을 나섰다.

“내 여자가 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이시훈 때문인가?”

윤재욱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강은채는 발걸음을 멈추고 윤재욱을 등지고 섰다.

“만약 그가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죠. 처음에 그를 속이지 못해서 내심 아쉬웠는데 이번에야 말로 그를 정복할 수 있다면 성취감이 폭발할 것 같아요.”

강은채는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윤재욱의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계속 매달리는 것 역시 정말 싫었다.

‘이렇게 말하면 스스로 포기하겠지.’

한편, 윤지민은 강은채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더 이상 그를 곁에 둘 이유가 없어진 강은채는 지민이를 윤재욱에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민을 떠나보낸 뒤, 은채는 마음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그녀는 행여 윤지민이 가정폭력을 당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 아무리 바빠도 그녀는 보름 동안 직접 윤지민이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치원으로 마중을 나갔었다.

요 며칠간, 재욱도 회사일이 워낙 바빠서 강은채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그 덕분에 강은채는 며칠 동안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좋았던 나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퇴근 후 1층 로비까지 걸어간 강은채는 그녀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이시훈과 또 다시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다음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강은채. 우리 얘기 좀 해.”

이번에는 웬일인지 이시훈의 목소리는 냉소적이지 않았다.

“할 말 없어. 우리는 이미 4년 전에 끝난 사이야.”

강은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꾸 이렇게 그와 엮이는 것이, 그녀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은채야, 난 얘기하고 싶어. 그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어.”

그날 강은채가 했던 말은 그에게 모든 일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요 며칠 이시훈은 서수연을 찾아갔지만 그녀는 그저 은채에게 직접 물어보라고만 했다. 그는 또 송세희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이시훈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왜? 이제와서 진실을 알고 싶어진 거야? 미안. 이젠 의미가 없어졌어.”

그때의 진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강은채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이시훈과 송세희의 배에,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

강은채는 이시훈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이시훈은 포기하지 않고 강은채의 뒤를 따랐다.

1층 로비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시훈은 서둘러 몇 걸음 가로질러 강은채의 앞을 막았다.

“은채야. 그때 일에 대해 묻지 않을게. 하지만… 우리 사이의 일은 아직 정식으로 끝나지 않았어. 오늘은…”

“알았어.”

강은채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확실히 정리하고 싶었다. 당시 그녀는 가장 진실된 감정으로 이시훈을 사랑했기에, 이 관계를 끝맺어야만 과거의 상처와 완전히 작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은채는 전화를 걸어 지유를 안전하게 맡긴 다음 이시훈과 함께 회사 뒤에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말해봐. 간단명료 할수록 좋아.”

강은채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미 지나간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은채야. 그땐 난 정말 널 많이 사랑했어. 그러다가 갑자기 네가 나를 속인 거라는 걸 알게 돼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어. 나한테는 너무 큰 충격이었거든. 그래서…”

이시훈의 생각은 강은채와 완전히 반대였다. 비록 강은채는 그를 속였지만, 비록 그녀가 아주 미웠지만, 그는 여전히 강은채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를 사랑했다고 하지마.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내 변명도 듣지 않고 나한테 그런식으로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았을 거야. 옛날 일은 거론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빨리 이 관계를 끝내고 싶어. 당신이 다시 한번 속지 않도록 말이야.”

강은채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다. 그때의 일은 그녀의 마음에 바늘처럼 박혀 지금까지도 고통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은채야. 나한테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해줄 수 있어? 사실을 알아야 완전히 결말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아.”

이시훈은 여전히 마음속의 의문을 풀려고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 당신이랑 송세희가 저지른 일을 왜 내가 설명해야 해? 이시훈 씨, 진실을 알고 싶으면 송세희에게 가서 물어봐.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반드시 당신에게 알려줄 거야.”

강은채는 이제 더이상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4년 전에 한번 다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일로 자신을 두 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시훈, 우리 사이는 이제 다 끝났어. 앞으로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니, 다시는 내 생활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

말을 마치고, 그녀는 이시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이시훈은 매우 괴로워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계속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의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속인 것이고, 누가 진정 상처받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 당시의 일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들 몇 명뿐이었다. 하지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으니 진실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이시훈은 마지막으로 송세희에게 다시 한번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씨 빌딩 근처 커피숍에 있어. 네가 날 만나러 오지 않으면 난 네 남편을 찾아갈 거야.”

이시훈은 이번에는 송세희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협박했다.

30분 후, 송세희는 어두운 얼굴로 이시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시훈.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우린 4년 전에 이미 끝난 사이인데 나한테 왜 이렇게 매달리는 거지? 우리 남편이 네 회사를 망하게 할까 봐 두렵지 않아?”

송세희의 잔뜩 거들먹거리는 모습에 이시훈은 역겨움을 느꼈다.

지금의 송세희는 그 당시와는 전혀 딴사람이었다. 원래 그녀는 영리하고 사려깊었지만, 송씨 집안으로 들어간 이후로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던 송세희가 아니었다.

게다가 윤재욱과 결혼해 서울 재계의 중심에 선 이후로는, 그녀는 더욱 오만해져서 걸을 때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가슴을 내밀며 마치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시훈은 송세희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송세희. 나도 너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난 그저 4년 전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을 뿐이야. 강은채 어머니가 정말 병이 나서 입원한 거 맞아? 네가 나를 속인 거야, 아니면 강은채야 나를 속인 거야?”

강은채라는 이름을 들은 송세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4년이 지났지만 이시훈은 여전히 강은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강은채가 돌아온 걸 그도 알고 있을 거야. 강은채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서 당시 사건이 알고 싶은 거겠지.’

강은채와 관련된 일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송세희는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절대 이시훈과 강은채가 옛 정을 회복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일은 이미 너한테 분명히 말했어. 또 뭐가 의심이 들어서 그래? 강은채는 애초부터 엄마가 없었어. 너랑 만난 건 오직 네 돈 때문이었지. 강은채가 자기 예쁜 상판대기 하나만 믿고 돈을 갈취한 거라고. 내가 강은채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그녀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핑계로 남자들의 동정을 사려고 했어. 게다가 강은채는 부잣집 아들들만 만나왔고.”

송세희는 그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

이시훈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다시 한번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송세희가 했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해외에서 강은채를 알게 되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친구들은 강은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모두들 그녀가 차갑고 도도하며, 남자의 대시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유학할 때도, 국내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그녀는 쌀쌀맞았다. 그녀는 일반 남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쫓아다녔지만, 그녀는 전부 냉담하게 거절했었다.

이 점에서 송세희가 말한 ‘강은채가 부잣집 아들들만 만난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그러다가 강은채가 갑자기 귀국한 후, 송세희는 곧바로 이시훈을 찾아가 강은채의 계획을 털어놓았고, 아니나 다를까, 강은채는 며칠 후 이시훈에게 어머니가 아프시니 돈이 필요하다고 전화를 하여 이미 그녀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이시훈을 더욱 분노하게 했었다.

사람은 화가 날 때 판단력을 잃기 쉬웠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강은채를 증오했고, 그녀를 사기꾼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강은채의 진실되고 무고한 눈빛을 마주했을 때 이시훈은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지.”

이시훈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송세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내가 너를 속인다고? 이시훈. 너 양심 있니? 그때 내가 너한테 말하지 않았더라면 네 돈은 이미 그 사탄 같은 여자에게 속아 없어졌을 거야. 강은채는 돈 뿐만 아니라 네 감정도 속인 거야. 난 너를 위해서 너한테 알려준 건데 넌 나를 의심하다니… 정말 실망이야.”

송세희는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이시훈을 쳐다봤다.

“송세희. 나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 일은 난 반드시 끝까지 조사할 거야. 도대체 누가 나를 속인 건지 한번 알아보자고.”

이시훈은 강은채의 눈에서 진실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송세희의 눈에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시훈이 떠난 후, 송세희는 혼자 카페에 앉아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맥을 통해 강은채의 거처를 알아냈다.

한편, 강은채는 집에서 서수연에게 자신과 이시훈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은채야. 잔소리 좀 그만해. 이시훈이 나를 찾아와도 난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수연은 소파에 앉아 은채의 잔소리에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응. 되도록이면 말하지 마. 난 더 이상 그런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 걔네가 손을 잡고 나를 모함했어. 그런 사람들은 도덕적 개념이 없으니, 반드시 멀리해야 해.”

강은채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 이시훈과 송세희는 인간쓰레기라는 단어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은채야. 이시훈이 송세희에게 속아 넘어간 걸 수도 있어.”

서수연이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나를 사랑한다면서 다른 사람을 믿고, 나한텐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잖아. 그게 무슨 사랑이야? 그런 남자랑 얽혀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강은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깊은 상처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네 말도 맞지만…”

서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강은채는 문 쪽으로 다가가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송세희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은채 씨, 이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당신이 나올래요 아니면 제가 올라갈까요?”

송세희는 큰소리로 외치며 마치 길거리에서 욕을 퍼붓는 건달처럼 소리를 질렀다.

“송세희?”

서수연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재빨리 문으로 달려가 확인했다.

“진짜 송세희네. 젠장, 무슨 낯짝으로 여기 찾아온 거야? 들어오라 해. 내가 이곳에서 네 발로 기어나가게 만들어 줄 테니까.”

서수연은 화를 참지 못하고 문을 열려 했지만, 강은채가 그녀를 제지했다.

“아이들도 있으니까 신중히 행동해야 해. 네가 지유를 책임지고 있어. 내가 나갔다 올게.”

말을 마치고, 강은채는 바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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