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희생양
강은채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고, 되도록 윤재욱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업무 보고도 자신의 비서에게 맡겼다.
“먼저 퇴근하세요. 나머지 자료는 제가 비서실에 제출하겠습니다.”
도예지는 상황 파악이 아주 빨랐다.
“그럼 그래줄래? 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서 먼저 가볼게.”
강은채는 사무실에서 나와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그때, 뜻밖에도 안에서 걸어 나오던 이시훈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시훈은 잔뜩 분노에 찬 눈빛으로 강은채를 응시했지만, 강은채는 그저 담담하게 지나쳤다.
“거기 서. 왜 여기 있는 거야?”
이시훈은 강은채를 불러세웠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회사에서 이시훈과 싸우고 싶지 않았고, 동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강은채.”
이시훈은 주차장까지 쫓아와서야 겨우 강은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시훈. 난 사기꾼이니까 나한테 다시 속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야.”
강은채는 말을 마치고 바로 손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시훈이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대답해. 왜 여기에 있는 거냐니까?”
이시훈은 강은채와 마주친 순간, 화가 잔뜩 치밀어 올라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4년 전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긴 윤 씨 기업이야. 그러니 내가 여기 온 것은 당연히 윤재욱을 속이기 위함이 아니겠어? 전에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깎아내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런 말이 이시훈이 듣고 싶어하는 것이고, 윤재욱이 믿고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남자가 나를 이렇게 보고, 모든 남자가 나를 피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너 미쳤어? 윤재욱은 가정이 있는 사람이야. 네가 쉽게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를 속이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덫에 걸릴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이시훈의 말은 비록 과격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윤재욱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서울시에서 차갑기로 유명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봐주는 법이 없었다. 강은채가 이런 남자를 목표로 삼았으니 불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속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 능력에 달렸어.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러니까 당신은 그저 나한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
강은채는 태연하게 한마디 던졌다. 비록 이시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지만, 그 고통도 이제 참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런 작은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은채야.”
다급한 마음에 이시훈은 예전에 자주 불렀던 호칭을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이시훈,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렇게 부르면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어.”
은채는 이시훈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강은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 4년 전에 내가 널 사랑하는 걸 알면서 왜 나를 속인 거야?”
이시훈은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그녀를 마음 속에서 놓아준 적이 없었다. 그는 매번 강은채를 떠올릴 때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4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다시 한번 이렇게 강은채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녀가 거짓말쟁이일지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예뻤다.
“이시훈, 아직도 내가 당신을 속인 거라고 생각해?”
강은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이 삼각관계에서, 이 사기극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사실 강은채였다. 하지만 우스꽝스럽게도 그녀는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
순간, 이시훈은 할 말을 잃고 잠시 멈칫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새 차 문을 막고 있었던 손도 서서히 힘이 풀렸다.
‘무슨 뜻이지? 그럼 그녀가 사기꾼이 아니란 소리야?’
하지만 그녀가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
강은채는 한숨을 내쉬며 이시훈을 바라본 후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차에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매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시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 표정은 마치 그녀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자신을 차갑게 지켜보는 남자, 그리고 그녀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까지.
강은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가 무엇을 속였고,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렇게 모두가 그녀를 증오하는 걸까.
그녀는 가속 페달을 밟은 후,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멍하니 서있는 이시훈도, 항상 그녀를 노려보는 윤재욱도,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들은 그녀의 천적이었다. 그녀는 평생 남자를 멀리할 거라고 다짐했다.
은채는 그날 이시훈과의 불쾌한 만남 이후, 기분이 극도로 나빠져 있었다.
두 아이에게 저녁을 차려준 후, 그녀는 밥 먹을 기운도 없어 방으로 가서 바로 누워버렸다.
한편, 식탁에서는 두 아이가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었다.
“아줌마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
지민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응. 내 생각엔 아마 아저씨가 엄마를 화나게 한 것 같아.”
지유의 기분도 금세 가라앉았다.
“지유야, 넌 우리 아빠가 좋아?”
윤지민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불쑥 물었다.
“좋아하는데 아저씨는 너무 차가워.”
지유는 사실 재욱을 조금 무서워했다. 만약 그가 조금 더 따뜻했다면 아마 더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줌마가 좋아. 아줌마가 우리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어.”
윤지민은 서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렇게 두 아이가 한창 토론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지유는 잽싸게 문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인터폰 속 윤재욱을 발견하고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엄마는?”
“방에 있어요.”
윤재욱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강은채의 방으로 직행했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쿵하고 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워있던 강은채는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여긴 왜 오셨어요?”
강은채는 모르는 척 묻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윤재욱이 왜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그녀를 모욕하러 왔을 것이다.
“이시훈이랑 무슨 사이야?”
재욱은 은채를 노려보며 마치 바람 피우는 마누라를 추궁하듯 매섭게 물었다.
“다 봤으면서 뭘 또 물어요? 저한테 속은 남자예요.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죠. 저를 어렵게 잡았으니 당연히 또 저를 귀찮게 할 거예요.”
강은채는 자신을 사기꾼인 것처럼 표현했다.
“어떻게 그를 속였는데?”
윤재욱은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꾹 참았다. 그는 강은채의 파렴치함에 분노하고 화를 냈다.
“어떻게 속이긴요. 유혹한 거죠.”
은채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윤재욱과 계속 언쟁을 벌여봤자 그의 화만 돋울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감정에 휘둘려 무슨 일이든 벌인다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그와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재욱이 그녀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은채는 몸을 비틀거리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뭐 하는 거예요?”
“거짓말쟁이라며? 유혹했다며? 그럼 어떻게 유혹했는지 나도 한번 봐야겠어.”
강은채가 다른 남자와 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윤재욱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의 가슴 속에서는 분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윤재욱은 강은채의 팔을 잡고 침대에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강은채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강은채의 몸을 덮쳤다.
“또 무슨 짓이에요? 재밌어요? 이게?”
강은채는 두 손으로 윤재욱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침착하라고 다짐하며, 위험에 처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혼란으로 가득했다.
“당신이 정말 나를 유혹할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봐야겠어.”
윤재욱의 매서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입술은 강은채의 입술을 빼앗았다.
“윽…”
강은채는 반항하기 시작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재욱은 지난번의 경험을 교훈 삼아 강은채에게 물어뜯기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의 혀는 강은채의 따뜻하고 달콤한 입 안을 돌아다녔다.
윤재욱은 매번 강은채를 만날 때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이성을 잃었다.
그는 강은채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원하는 충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익숙하고 담백한 체취를 맡으며, 그녀의 따뜻함을 느끼고, 그녀의 숨결을 들이마시니, 윤재욱은 순간 모든 분노가 싹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윤재욱은 강은채의 입술과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손 역시 점점 통제를 잃고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갔다. 윤재욱의 손이 강은채의 고운 피부 위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런 그의 손을 따라 강은채는 온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이런 설렘은 그녀를 혐오스럽게 하고, 억울하게 만들었다.
4년 전 그 남자를 떠났을 때, 그녀는 평생 그 어떤 남자와도 만나지 않겠다고, 다시는 남자에게 굴욕을 당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미워할 수 없는 남자가 그녀의 맹세를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더욱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자신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윤재욱이 차근차근 계속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윤재욱은 강은채의 입술과 이마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눈가를 스쳐지날 때 알 수 없는 쓴맛과 촉촉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듯 재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강은채의 옷이 여기저기 벗겨져있었다. 그녀는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밖에는 아이들이 있어 그저 혼자 눈물을 훔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문이 닫히는 순간, 침대 옆에 서 있던 윤재욱은 가슴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울음소리는 아주 익숙했다. 너무도 무력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윤재욱은 순간 4년 전 병원에서 처음 봤던 그 여자가 문득 떠올랐다.
‘잠깐만, 병원 공원에서 울부짖던 여자… 강은채?’
그렇다. 그 여자가 바로 강은채였다. 4년 동안 그 초라하고 슬픈 얼굴이 항상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가슴 찢어지는 울음소리도 그의 꿈속에서 한 번씩 떠올랐다.
그래서 윤재욱이 강은채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윤재욱은 화장실 문 앞에 다가서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만 가세요.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누군데요? 당신이 뭔데요? 왜 저한테 이러는 거죠? 그래요, 맞아요. 전 사기꾼이에요. 하지만 당신 돈도 뺏지 않았고, 당신을 갖고 논 것도 아닌데 왜 저를 그렇게 무시하는 거예요? 왜?”
강은채는 눈물을 흘리며 윤재욱을 밀어냈다.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초라해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재욱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입 다물어, 울지 마.”
차가움이 극에 달한 목소리.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과 위로가 담겨 있었다.
“그만 가세요. 이 양아치 같은… 아내도 따로 있으면서 집에 가서 아내한테나 매달릴 것이지 왜 여기로 와서…”
강은채는 윤재욱을 계속 밀쳤다. 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참아왔다. 자기 집에서 자기가 울겠다는데 무엇때문에 그것도 안 된단 말인가?
그녀는 그저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표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본인이 더 화가 나서 그녀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다니… 정말 그녀가 죽어야만 속이 시원하겠다는 건가?
“그만하라고 했을텐데.”
윤재욱은 손을 뻗어 강은채를 품에 안았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꼭 안았다. 4년 전,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그는 공원에서 울고 있던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오늘, 그때 그렇게 울던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은채는 이번에는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자신이 위로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오랫동안, 그녀는 이런 따뜻한 품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강은채는 한참을 울다가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재운은 똑바로 서서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이만 나가세요. 대표님이 제 방에 너무 오래 계셨어요.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강은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여자가 되어줘.”
그때, 윤재욱이 불쑥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