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저씨 정말 무서워
피비린내를 맛본 윤재욱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강은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가 키스를 하던 도중 여자가 그의 입술을 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신, 간이 점점 커지는 거 아니야?”
윤재욱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내뿜으며 마치 강은채를 한 입에 삼킬 것처럼 노려보았다.
“전 그저 저를 지키려고 했을 뿐이에요. 제가 대표님 뺨을 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세요.”
강은채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그의 직원이기 때문에 업무적으로는 그에게 복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은채는 윤재욱 쪽의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재욱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표님, 경고하는데요. 저를 또다시 함부로 대한다면 바로 그만둘 겁니다. 계약서를 작성했든 말든 전혀 상관 없어요. 그리고 지민이는 제가 데리고 갈 겁니다. 대표님의 교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요.”
강은채는 큰 소리로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아침부터 잔뜩 화가 나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그녀와 윤재욱이 키스하고 포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누구에게 말해도 두 사람은 결백한 사이란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가끔 자신이 닥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녀는 4년 전처럼 그저 막연히 떠나고 싶었다.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힐 때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강은채는 현재 이 직업이 필요했다. 그녀의 능력과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고,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그녀는 아직 어린 아이를 키워야 했고 여동생의 학업과 직업을 찾는 것도 도와줘야 했으며 고모도 연세가 많으신지라 고모의 노후도 책임져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그녀 한 사람 어깨에 달려있는데, 그녀가 어떻게 제멋대로 직장을 관둘수가 있겠는가?
‘강은채, 꼭 버텨야 해. 그러면 언젠가는 반드시 밝은 날이 찾아올 거야.’
강은채는 퇴근 후 바로 아이를 데리러 갔다. 두 아이를 함께 데리고 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집사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강은채는 다시 한 번 윤재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사님한테 말해주세요. 제가 지민이를 데리고 간다고요.”
강은채의 말투는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아침의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내가 당신이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도발적인 말투였다. 윤재욱은 강은채가 얼마나 고집이 센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전 집사님과 함께 할아버지를 뵈러 갈 겁니다. 할아버지를 설득할 자신 있습니다.”
강은채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마치 누구도 그녀를 말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이런 고집마저 없었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시련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라고 잘도 부르는군. 이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윤재욱은 한껏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차갑게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보아하니 이 여자는 정말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것 같군. 지민이한테 접근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할아버지까지 노리는 건가. 정말 쉽지 않아.’
“말 돌리지 마세요. 집사님이 지금 제 옆에 있으니까 집사님이랑 통화하시지 않을 거면 전 지금 당장 할아버지를 뵈러 갈 거예요.”
강은채는 더 이상 이 건방진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차갑고 감정 없는 남자와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자신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마. 당신이 내 여자야 아니면 내 마누라야?”
윤재욱은 여전히 단도직입적으로 대답을 피하며 비아냥거렸다.
‘나를 속이려는 심산이나 본데, 결국에는 누가 속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됐어요. 전 대표님이랑 헛소리를 할 시간이 없어요.”
강은채는 윤재욱에게서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 다른 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윤재욱은 바로 집사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있는 재욱을 바라보자 강은채는 황당하고 화가 치밀었다.
“대표님.”
집사는 윤재욱을 발견하고 서둘러 인사를 했다.
“아빠…”
윤지민은 잔뜩 흥분한 나머지 윤재욱에게로 바로 달려갔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윤재욱은 이번에 처음으로 그를 데리러 유치원에 온 것이었다.
“돌아가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세요. 앞으로 제가 지민이를 하원시키러 오겠다고요.”
말을 하면서도 윤재욱의 감정을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은 강은채에게 꽂혀 있었다.
그는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강은채의 작은 얼굴과 절대 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고집스러운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아침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키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그의 손짓을 보고 몸을 돌려 돌아갔다.
자리를 뜨는 집사와 재욱이 조금 전에 한 말을 듣고 윤지민은 잠시 당황했다.
“아빠, 전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아줌마 집에 가고 싶어요.”
윤지민은 이렇게 말하며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는 눈에 띄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강은채는 윤지민이 공포를 느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따뜻하게 그를 달래주었다.
“말해요. 어떻게 하면 지민이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있죠?”
은채는 아이들 앞에서 크게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 그녀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 집에 가서 얘기해.”
그렇게 재욱은 지민을 데리고 다시 한번 은채의 집으로 찾아갔다.
“제가 요리할 테니까 당신은 아이를 데리고 놀고 있으세요.”
강은채는 요리를 핑계로 재욱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묘한 마력이 있어, 자꾸 그와 가까이 하면 자신도 그처럼 차가워질까 봐 두려웠다.
강은채는 저녁 식사를 뚝딱 완성했다. 오늘은 재욱까지 찾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소보다 저녁을 더 많이 준비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빠, 아줌마 식사하세요.”
지민은 예의 바르게 말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은채가 요리를 하는 동안 재욱은 거실에서 잡지를 보면서 윤지민을 지켜보았었. 지민이는 이곳에서 무척 즐거워했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욱은 그가 자신의 집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식탁에 앉아 있던 지민은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지유와 강은채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 아저씨 밥 드세요.”
지유도 윤지민을 따라 예의 바르게 말했다.
“엄마, 아저씨라는 호칭은 좀 이상해요. 엄마, 아저씨 말고 아빠였으면 훨씬 편했을 거예요.”
지유는 농담을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정말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유야.”
강은채는 지유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순간, 그녀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맞아. 만약 엄마 아빠랑 함께 밥을 먹는다면 우리는 행복한 네 식구였을 거야.”
이번에는 윤지민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 말에 윤재욱은 잠시 멈칫했다.
‘지민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분명히 엄마가 있는데도 왜 강은채가 자기 엄마가 되기를 바라는 걸까?’
보아하니 강은채가 이미 지민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신뢰를 얻은 것 같았다. 만약 강은채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면, 진짜 속게 되는 건 윤재욱, 본인일 것이다.
이런 생각에 윤재욱은 차가운 눈빛으로 강은채를 쏘아보았다.
‘내가 강은채의 술수를 과소평가했나 보군.’
“저를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스스로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를 주지 않으셨잖아요.”
강은채는 그의 눈동자 속의 분노를 느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오히려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듯 당당했다.
윤지민이 하루만이라도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다면 오해를 받아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 있었다.
두 아이 역시 공기 중의 냉기를 느낀 듯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결국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재욱 역시 마음속의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 열심히 식사에만 몰두했다.
그는 강은채의 음식 솜씨가 훌륭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따뜻한 집밥을 그는 19년 동안 먹지 못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직접 그에게 요리해 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윤재욱은 오늘 저녁 한 상 가득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게 눈 감추듯 모두 먹어치웠다.
그가 꽤 만족한 듯 젓가락을 내려놓자, 지유가 서글픈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날 아저씨가 엄마한테 뽀뽀하는 걸 봤었어요. 그래서 전 아저씨가 엄마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요 며칠 보니까 아저씨는 엄마한테 자꾸 화를 내고 있었어요. 우리 엄마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한테 그러면 안 돼요.”
강지유는 밥 먹는 내내 강은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듯한 윤재욱의 표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그래서 지유는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그들이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연 것이다.
“아빠가 아줌마한테 뽀뽀했다고?”
윤지민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는 지유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재욱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빠는 상남자잖아요. 그러니까 아줌마한테 뽀뽀했으면 아줌마를 책임져야 해요.”
윤지민은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는 자기 엄마보다 강은채가 진짜 자기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욱은 차가운 눈빛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 윤지민은 움츠러들며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 전에 소개팅 했다고 했었잖아요. 만약 그 아저씨가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아저씨가 엄마한테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 아저씨한테 시집가요. 그 아저씨가 우리를 보호해 주면 앞으로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거예요.”
윤지민은 윤재욱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유는 강은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아저씨도 아마 속으로 초조해할 거야. 정말 그렇다면 더 이상 엄마한테 무섭게 대하지 않겠지?’
강은채는 두 아이가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윤재욱의 불같은 성질과 강은채를 바라보는 그의 차가운 시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채는 어른들의 문제로 아이들까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지유야, 지민아. 너희는 거실에서 놀고 있어. 엄마는 아저씨한테 할 말이 있어.”
강은채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들을 분리시키며 상황을 진정시켰다. 식탁에는 그녀와 재욱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우선 지유가 한 말에 대해 사과드릴게요.”
강은채는 내면의 모든 감정을 꾹 참으며 마음의 평정심을 찾도록 노력했다. 거실까지 개방된 구조였기 때문에 두 아이가 듣고 있을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여전히 같은 생각이에요. 전 대표님한테 아무런 감정 없습니다. 전 전남편과 이혼할 때 이미 평생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대표님은 아내와 아이가 있는 분이니, 더욱이 제 관심 밖의 사람입니다.”
“지금 나보고 당신 말을 믿으라는 거야? 당신은 이미 지민이를 세뇌시켰어. 그리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했잖아. 할아버지의 마음까지 얻으면 당신 목적은 절반이나 성공을 한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니겠어? 미련한 여자 같으니라고. 다시는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 난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어. 그러니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딱 보면 알 수 있지.”
윤재욱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유의 말이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분노는 바로 그 말 속의 진심 때문이었다.
“전…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대표님께서는 저를 아예 거짓말쟁이로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대표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니 저도 달리 할 말이 없네요. 밥도 다 먹었으니 이제 그만 집에 가세요. 저 같은 사기꾼은 대표님의 고귀한 인격을 더럽힐 뿐이니까요.”
강은채는 확신했다. 자신이 어떻게 하든지 윤재욱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잘 생각해 봐.’
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문에 살짝 기댄 채 눈시울을 붉히며 억울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4년 전, 이시훈에게 사기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분하고 억울하지는 않았었는데… 지금은 좀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날, 뜻밖에도 재욱은 지민을 데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윤지민은 아무런 걱정 없이 강은채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