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맞선
윤재욱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비행기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고, 출근 첫날 자신의 차에 타지 않았을 것이며, 심지어 윤지민이랑 놀아준다는 핑계로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재욱의 인내심이 폭발하려는 순간 강은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당신이랑 지내고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당신은 제가 원하는 남자가 아니고, 더군다나 저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남자가 아니란 걸! 당신은 사탄 같아요. 누구도 당신을 속박할 수 없죠, 그러니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윤재욱 씨! 똑똑히 들어요! 이젠 저 당신을 포기할 거예요, 더 이상 꼬시지도 않을 거고, 접근하지도 않을 거니까 우리 계약 해지해요 ! "
강은채는 화가 치밀었다.
윤재욱의 태도를 봐서는 그녀가 의도적으로 꼬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이 없으니 차라리 그의 생각을 인정하고 포기하면 그녀에 대한 오해를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포기 잘했어, 안 그랬으면 너 정말 큰일 날 줄 알아! "
윤재욱은 갑자기 분노에 차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주위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를 탐내고 있는지 강은채는 모를 것이다.
갑자기 그를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니, 그녀의 포기는 그에게 이상한 좌절감을 안겼다.
윤재욱은 아무리 냉혹한 사람이라도,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는 소년같은 마음만은 여전했다.
"저 포기할…"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선을 그으려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강지유가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들어왔다.
"엄마, 수연 이모 전화 왔어, 스피커폰 켰으니까 이제 말해도 돼."
강지유는 늘 철이 든 아이였다.
엄마의 손에 물기가 있는 걸 보고 스스로 스피커폰을 켜고 대신 핸드폰을 들어줬다.
"수연아, 무슨 일 있어?"
"은채야, 너한테 딱 좋은 남자를 한 명 소개해 줄까 해서. 네가 동의한다면 바로 데이트 잡아줄게, 어때?"
강은채가 반응하기도 전에, 윤재욱은 두 사람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강은채는 조금 어색해졌다.
"수연아, 나 돌아온 지 얼마 안 됐고 아이도 딸렸어, 나중에 얘기하자."
"애가 딸린 게 뭐! 그것도 상대방이 알고 있어, 괜찮다던데? 난 그냥 네가 좋은 남자한테 시집갔으면 좋겠어, 그럼 떠날 필요도 없고."
서수연은 강은채가 또다시 떠날까 봐, 일 년 동안 그녀를 붙잡아 둘 이유를 찾지 못할까봐 너무나 조급했다.
"수연아, 나…"
강은채는 무심코 윤재욱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조롱, 분노, 경멸이 가득했다.
순간 강은채는 이번 기회야말로 윤재욱의 경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시간 잡아줘. "
"정말? 시간이랑 장소는 내가 이미 준비해 놓았어, 내일 오전 10시야, 너희 회사 뒤 리미 카페라고 있지? 거기로 제시간에 가면 돼, 그 남자 사진 보내줄게!"
서수연은 흥분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한편, 강은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계속 자신을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고 우기지 않겠지?
"엄마,나 이제 아빠 만나는 거야? 아하! 잘됐어! 나도 아빠가 생겼어, 이젠 친구들이 나한테 다시는 뭐라 하지 않을 거야."
강지유는 핸드폰을 들며 흥분하더니 거실로 달려가 윤지민과 희소식을 나눴다.
하지만 주방은 여전히 저기압이었다.
"나가 있어 줘요, 저녁밥 거의 다 됐어요."
강은채는 몸을 돌려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은 윤재욱의 눈을 피해 계속 저녁 준비에 나섰다.
"나 일 있어, 저녁 늦게 다시 지민이 데리러 올게."
윤재욱의 얼굴은 마치 거미줄로 가득 찬 듯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머지않아 폭풍이 몰아칠 것만 같아 강은채는 더 이상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쾅 닫히는 문소리에 그제야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다음날 10시, 강은채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카페에 도착했다.
원래는 윤재욱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지만, 서수연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진짜로 약속을 잡을 줄은 몰랐다.
서수연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강은채는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했다.
카페에 들어가서 예약한 자리를 찾아 앉아 혼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10분, 20분이 지나자 강은채는 점점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맞선남을 만나면 어색할 테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그 남자를 만난 후에 어설프게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간 서수연이 난처해질 테니까.
시간이 다 되어가도 나타나지 않자, 자리를 뜨려고 하던 순간 한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남자를 보자 강은채는 놀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시훈,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서 이시훈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그를 이렇게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도 네가 올 줄은 몰랐네."
이시훈의 말투에는 경멸이 담겨있었다.
그는 불쾌한 눈빛으로 강은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허…."
이시훈 마음속에서 강은채는 아마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친엄마까지도 저주할 수 있는 못된 사기꾼일 것이다.
강은채는 그의 경멸 어린 눈빛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그가 왜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이해가 되었다.
"미안, 난 바빠서 이만 갈게, 우리 다신 만나지 않은 게 좋겠어, 너한테 또 속을까 봐 무서우니까!"
강은채도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시만, 너 오늘 선보러 온 게 아니라 사기 치러 온 거지?"
이시훈이 강은채를 붙잡으며 점점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목소리가 커졌다.
“맞아. 사기 치러 온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한 번 실패했던 사람한테 두 번 선대진않아.”
강은채는 이시훈이 잡은 손을 세차게 뿌리치며 말했지만, 이시훈은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강은채, 오랫동안 잘 나간 모양인데 남자들 많이 속였겠지? 너 이미 서울을 떠났다면서, 이번에는 누구를 타깃으로 삼은 거야?”
이시훈이 비웃으며 말했지만, 강은채를 만난 순간 다시 가슴 한구석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때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분명히 그녀에게 사기당했을 것이다. 그때 강은채가 사기꾼이 아니었다면 둘이 지금쯤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누구를 속이든 그건 네 알 바 아니야, 아무튼 네가 아니니까, 그깟 돈 신경 쓰지도 않아.”
강은채는 이시훈을 노려보았다.
이시훈은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단정 지으며 비난했지만, 정작 그가 바람을 펴 그녀를 속였던 일은 왜 언급하지 않는 걸까?
"내가 가진 돈이 적었어? 강은채 너 눈이 삐었구나! 이 서울 시내에서 윤재욱을 제외하면 그다음 재력가는 나야, 너 혹시 윤재욱 때문에 돌아온 거 아니겠지?"
이시훈은 비꼬는 듯 말했다.
윤재욱이 어떤 사람인데, 강은채 같은 여자가 접근할 수 있는 레벨은 아니라고!
"그래, 네 말이 맞아! 윤재욱 때문에 돌아온 거야! 어때? 실력은 확실히 윤재욱이랑 비교가 안 되지?"
강은채는 더 이상 해명하기 싫었다.
어차피 마음을 굳힌 사람인데 그대로 놔두고 싶었다.
적어도 자존심만큼은 조금 지키고 싶었다.
다만, 그녀가 발언하는 동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게 윤재욱이 뒤에서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윤재욱은 강은채보다도 더 일찍이 카페에 와 있었다.
왜 왔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홀린 듯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카페에 와 있었다.
하지만 강은채의 솔직한 발언에 그는 오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수확이 적지 않았다.
윤재욱은 차가운 얼굴로, 사람을 쏠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며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강은채! 대체 어쩌자는 거야? 너 재능도 있고, 게다가 미모도 출중하겠다! 충분히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서 잘 살 수 있었잖아! 왜 사기를 쳐! 왜 우릴 우습게 보는 거야!"
이시훈은 버럭 화를 내며 고함을 쳤다.
"이시훈! 네가 날 포기한 순간부터 내 인생은 너랑 상관없어! 내가 뭘 하든 너랑 상관없다고!"
"다신 널 보기 싫으니까, 나중에 또 나를 보면 모른척하고 지나가 줘!"
강은채는 더 이상 말다툼에 얽매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마음 한구석이 아팠지만, 모든 게 과거일 뿐이었다. 지금 와서 뭘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강은채는 분노에 휩싸여 발광하는 이시훈을 뒤로 한 채 옆 테이블을 돌아 카페를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