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줌마가 내 엄마였으면…
강은채가 오후 내내 아이들과 놀다가 지유를 데리고 귀가하려고 하자 윤지민은 아쉬워했다.
"아빠, 나 아줌마 집에서 하룻밤만 자도 돼? "
윤재욱한테 조르면서도 윤지민은 가망이 없어 보였는지 불안해했다. 평소 어떤 요구든 윤재욱은 흔쾌히 승낙하지 않았다.
"안 돼! "
"돼! "
윤재욱과 강은채는 거의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다만 한 사람은 희망을 들어주고 한 사람은 희망을 저버렸다.
강은채도 놀랐는지 약간 화난 듯한 윤재욱의 눈빛을 보며 내심 긴장했다. 그러다가 조금 전 치열하게 키스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윤재욱이라는 남자는 위험하고도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그에게 말려들어 갈 것 같은 기운이 돈다.
한눈이라도 더 곁눈질했다간 깊이 빠져들어 갈 것 같았다.
강은채는 급히 눈을 피해 두근거렸던 마음을 억눌렸다.
"당신 맘대로 해요. "
몇 마디 더했다간 또 끼를 부린다고 할까 봐 대충 답했다.
"…. "
윤재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오빠 데리고 우리 집에 오게 해줘요. 한 번만, 네? 아니면 아저씨도 같이 가요."
"강지유! "
강지유가 자발적으로 윤재욱을 요청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강은채는 대뜸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엄마, 아저씨도 하루 동안 우리랑 같이 놀아줬잖아, 저녁밥이라도 아저씨 대접해 줘요."
강지유는 항상 단호했다. 폐를 끼쳤으면 바로 돌려줘야 한다고 엄마가 가르쳐 줬었다는 걸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아저씨도 마침 배고프네? 오늘 저녁밥은 지유 집에서 먹어야겠다."
윤재욱은 놀랍게도 강지유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지유가 실망할까 봐 그런 것도 있었다.
"아빠 최고!"
그의 의외의 승낙에 윤지민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윤재욱은 기사와 비서를 모두 퇴근시키고 나머지 세 사람을 차에 태워 강은채의 아파트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은채는 두 아이와 함께 먼저 올라가고 재욱은 뒤를 따르지 않았다.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지민은 조심스럽게 은채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줌마, 아줌마가 나의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강은채는 놀란 듯이 윤지민을 바라보았다.
"왜?"
"그냥, 아줌마가 좋아요. 저는. "
이유가 무엇인지는 윤지민 자신도 잘 모른다. 단지 아빠가 아줌마 말을 잘 듣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민이는 엄마가 싫으니?"
갑작스러운 아이의 고백에 강은채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어린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엄마는 저를 싫어해요, 같이 놀아주지도 않고 저랑 같이 안 자요. 학교도 데려다주지 않고…. 같이 했던 기억이 별로 없어요."
윤지민은 말하면서도 아쉬운 한숨을 내쉬는데 엄마의 얘기를 꺼내니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지민의 말에 은채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으로 지유를 보았고, 지유 또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오빠가 너무 불쌍해, 나라도 지금부터 오빠한테 잘할 거야."
"그래,지유는 오빠랑 자주 놀아, 그래야 오빠가 외로움을 안 타지."
강은채는 강지유를 달래고 나서 다시 지민에게 말을 돌렸다.
"지민아, 엄마랑 못했던 경험을 아줌마가 다 체험하게 해줄게."
강은채는 부드럽게 윤지민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내심 마음을 졸였다.
불쌍한 아이, 집안이 짱짱해도 무슨 소용이 있어? 엄마 사랑도 못 받고, 아직 이렇게 어린데 벌써부터 이런 고통을 참고 있다니!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강은채는 두 아이를 거실에서 놀게 하고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딩동!
30분 뒤 초인종이 울렸다.
"강지유! 지민아! "
강은채는 주방에서 식재료를 썰면서 두 아이를 향해 문을 열어달라고 하려고 큰 소리로불렀다.
하지만 두 아이는 놀이에 집중했는지 은채의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즐겁게 놀고 있는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강은채는 하는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향해 달려갔다.
"…"
안 봐도 누군지 뻔했다.
문을 열자, 윤재욱이 보였고, 그를 한번 살피고는 다시 부랴부랴 주방에 들어갔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해장국을 살피다가 다시 식재료를 썰기 위해 칼을 들려고 하자 윤재욱이 손목을 잡았다.
"왜 또 그래요? "
강은채는 당황한 듯 되물었다.
"이리 와."
윤재욱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강은채를 의자에 앉혔다.
"손 다쳤는데, 약 바르고 해."
아무렇지 않은 척 뱉은 말이지만 강은채의 마음 한구석이 조금 흔들렸다.
바로 전에 함께 올라오지 않은 건 약을 사러 간 거였구나!
하지만 늘 뼛속까지 차가운 남자가 다친 그녀를 위해 약을 발라주다니!
평소의 단호했던 윤재욱답지 않았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
"…"
윤재욱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강은채를 말렸다.
솜으로 소독제를 적신 후 다친 그녀의 손등에 약을 바르고 조심스럽게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리고서 어디서 구했는지 고무장갑을 꺼내주었다.
"장갑 끼고 해, 아니면 다친 데 감염될 수 있어. "
냉랭하게 말을 다 하고는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강은채는 바로 전에 다정한 윤재욱의 부드러운 모습에 감동하여 한참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뒷모습!
그때 그 사람의 뒷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걸음걸이마저도!
아니야, 아닐 거야.
이 세상에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건 그저 우연일 거야!
강은채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저녁밥 준비에 들어갔다.
"지민아, 혹시 못 먹는 음식이라도 있어?"
강은채는 거실로 나와 윤지민을 향해 물었다.
싫어하는 음식이라도 먹게 될까 봐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해산물 외에 다 먹을 수 있어요. "
윤지민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강은채의 물음에 대답했다.
"해산물? 왜?"
강은채는 갑자기 긴장했다.
"얜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어. "
재욱은 손에 든 신문을 보면서 윤지민 대신 답해주었다.
"..."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다고?
강은채는 놀라며 윤재욱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저도 해산물 못 먹어요. 지민 오빠랑 저 비슷한 게 많네요?"
강은채는 아직 놀란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강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지유의 말에 윤재욱은 신경이 쓰였는지, 신문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강지유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강은채를 보니 그녀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강은채는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주방에 다시 돌아가서도 해산물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확실히 강지유와 윤지민 두 아이가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다.
전에 떠나보냈던 아이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계속 멍때리다가 저녁밥은커녕 그러다 아침밥 먹게 생겼어."
윤재욱의 말이 갑작스레 들리자, 강은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요리 거의 다 됐어요. 잠시만요."
"지유가 나더러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되냐던데?"
아무렇지 않은 척 차갑게 말을 뗀 윤재욱의 말에 강은채는 다시금 놀라움에 빠졌다.
"아니, 무슨….애가 장난친 거예요. "
강은채는 다소 어색하게 말했다.
"내가 거절했어. "
윤재욱은 여전히 차가운 말투였다.
"잘했어요, 거절하길…. "
"나를 원했으면 직접 꼬시지 그랬어, 애까지 이용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
윤재욱의 차가운 얼굴에 한층 더 냉기가 돌면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당신…. "
"그래요, 제가 꼬시려고 했어요. 다시 일자리에 복귀한 것도 당신이 있다길래 회사에 신청한 거예요. 이제 됐어요?"
"…. "
윤재욱의 얼굴이 삽시에 굳어지면서 까마득한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