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6년 후, 4월의 청수시.
최하얀은 다리를 포개고 창가의 넓은 창틀에 앉아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교하고도 매혹적인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6년 전보다 훨씬 더 차가운 기색이 더해져 있었다.
"엄마, 청수시 싫어하잖아. 나 때문에 굳이 돌아올 필요 없었어."
작은 손이 최하얀의 희고 긴 다리를 붙잡았다.
맑고 또렷한 그 눈동자는 황경진을 꼭 닮아 있었다.
최하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웃으며 아이의 턱을 살짝 잡아 올렸다.
"엄마가 원해서 돌아온 거야."
아무리 미워해도, 지금까지도 황경진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들 최세원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뚜렷한 치료법을 찾지 못했다.
세원이는 이미 여섯 살이었지만, 몸은 네 살짜리 아이처럼 여리고 작았다.
몇 달 전, 그녀는 청수시에 이 병을 치료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는 전문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만 그는 행적이 불분명해, 찾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예 세원이를 데리고 청수시로 돌아와 정착하기로 했다.
"그럼 엄마 손도 나을 수 있어?"
최세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최하얀의 손을 덮었다.
굳은살이 가득한 손바닥이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윤 아저씨가 그러셨어. 엄마는 최고로 훌륭한 외과 의사고, 음악 천재이기도 하대! 엄마가 켜는 바이올린, 정말 멋지다고!"
최하얀은 손을 들어 세원이의 오똑한 코를 살짝 긁어 주었다.
마음이 저릿했지만,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그녀의 손은 5년 전에 이미 망가져 버렸다.
검지의 힘줄이 끊어져 수술칼은커녕 악기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외과 의사로서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만약 윤태식이 화재 현장에서 그녀를 구해 주지 않았고, 아이도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 사산아는 가짜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최세원은 살아 있었다.
"세원아, 이제 씻으러 가야지."
윤태식이 문 쪽에서 들어오며 말했다.
세원이를 자연스럽게 다른 방으로 보내기 위한 말이었다.
세원이가 나가자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하얀아… 나 원망하지 않아? 내가 사산아를 위조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너희는…"
그와 최하얀은 같은 병원에서 일했던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는 그녀가 겪은 모든 고통을 직접 지켜봤다.
5년 전, 절망에 빠져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었던 최하얀을 그는 불길 속에서 구해 냈다.
그녀는 살 의욕이 전혀 없었고, 무려 석 달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그녀가 다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최세원의 우렁찬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그때, 황경진이 모자를 해칠까 봐 그의 눈과 귀를 속이기 위해 사산아라는 거짓 상황을 만든 것도 윤태식이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황경진은 최하얀의 뱃속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태식아, 난 너한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해."
최하얀은 조용히 말했다.
"네가 이목을 돌려 놓는 사이에 아이를 지켜 줬잖아. 그게 아니었으면… 나랑 세원이는 진작 그 사람 손에 죽었을 거야."
황경진의 이름이 떠오르자 최하얀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그녀는 창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커피색 정장 재킷을 걸쳤다.
작은 체구였지만, 옷을 입자 곧게 선 모습이 또렷해 보였다.
"나 출근해야 해."
그녀는 가방을 들며 말했다.
"태식아, 오늘 세원이 학교 좀 데려다줘."
—
금융 상업지구.
최하얀은 H 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요즘 인터넷 인플루언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회사에 소속된 크리에이터들을 관리하고, 광고나 협찬을 연결해 주는 일이었다.
그녀가 맡은 첫 번째 인플루언서는 오민영이었다.
팔로워가 천만 명에 가까웠고, 연예인 메이크업을 따라 하는 콘텐츠로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격이 워낙 까다롭고 제멋대로라 아무도 그녀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입인 최하얀에게 배정된 것이었다.
최하얀 앞에는 H 엔터테인먼트 총괄 감독 서정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첫 업무를 지시했다.
"오민영 지금 성아트란 분양 행사장에 있어. 오늘 저녁 행사에서 입을 드레스 가져다줘."
최하얀은 지시를 받고 곧바로 행사장으로 향했다.
현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리본과 풍선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고, 직원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흥분이 가득했다.
성아트란은 이번 분양 행사를 위해 무려 2년이나 준비해 왔다고 했다.
그만큼 도시 전체의 관심이 쏠린 행사였다.
최하얀은 방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오민영 씨, 안녕하세요. 새로 배정된 매니저입니다. 저녁 행사 드레스 가져왔습니다."
안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씨, 시끄러워."
여자의 목소리가 휴게실 안에서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더니 오민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최하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가져와? 스케출 망치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최하얀의 두 다리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목소리…
최사랑의 목소리와 너무도 똑같았다.
오민영은 비웃듯 그녀를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있었다.
최하얀은 단정한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깨끗하면서도 어딘가 요염한 분위기가 풍겼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오민영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 봐도 남자들을 홀릴 것 같은, 여우 같은 얼굴이었다.
다음 순간, 오민영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경진 오빠, 요즘 매니저들은 예의도 없나 봐요. 사람을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저 무서워요."
경진 오빠?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너머 벽에 기대 서 있는 긴 그림자가 보였다.
키가 크고 체격이 당당한 남자였다.
짙은 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길게 찢어진 검은 눈을 나른하게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그 눈빛만으로도 압도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남자는 오만할 정도로 눈을 뗄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또렷한 이목구비.
그야말로 신이 신경 써서 빚어낸 사람처럼 보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황경진의 분위기는 훨씬 더 성숙해져 있었다.
동시에 더욱 고귀하고 오만해졌고, 차가운 기운은 마치 방 안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느껴졌다.
최하얀의 다리는 납이라도 달린 듯 무거워졌다.
온몸이 제멋대로 떨리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졌다.
눈앞이 어지러워 별이 번쩍이는 것만 같았다.
지금... 그녀는 황경진을 마주하고 있었다.
6년 전, 자신을 지옥 같은 고통 속에 밀어 넣고 최씨 집안을 완전히 무너뜨린 그 악마를.
온몸의 세포가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최하얀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먼저 행사장 쪽을 도와야 해서요."
두 손을 꽉 쥐었다.
손끝이 살 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았다.
정말 어리석었다.
이렇게 큰 부동산 분양 행사라면 황경진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지난 6년 동안 각종 경제 잡지와 금융지의 표지를 장식해 온 이름이 바로 황경진이었다.
능력이든 수완이든, 그는 6년 전보다 훨씬 더 치밀해졌고 지금은 금융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절대, 절대로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됐다.
"잠깐."
황경진이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곧바로 그녀를 붙잡았다.
"경진 오빠, 왜 그래요?"
오민영은 그의 곁에 꽤 오래 있었던 덕분에 그의 기분 변화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네 일정을 망쳤잖아."
황경진의 차가운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오민영에게 말했다.
"네 새 매니저가 좀 기억에 남을 교훈을 배워야겠지."
그는 무심하게 덧붙였다.
"넌 먼저 나가서 준비해."
"알겠어요. 저 먼저 옷 갈아입고 있을게요. 경진 오빠가 역시 나한테 제일 잘해준다니까. 너무 세게 하진 마요."
오민영은 의미심장한 손길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최하얀을 한 번 노려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최하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그 눈에 띄게 아름다운 얼굴이.
처음 본 순간부터 거슬렸다.
최하얀은 당황한 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 걸음도 채 떼기 전에 몸이 거칠게 끌려 문 안쪽으로 들어갔고, 등이 벽에 세게 부딪혔다.
남자의 거대한 손이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숨이 막혔다.
"뭐야, 안 죽었네?"
황경진의 눈빛은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삼켜 버릴 것처럼 음산하고 잔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