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 지하 공간을 보는 순간 나는 마크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분명 나까지 경계하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나는 바로 결론을 내렸다. 나랑 우리 가족만 믿고 숨을 수 있는 진짜 안전지대를, 지금 당장 따로 마련해야 했다. 마크가 골라 산 이 집은 겉으론 주변이 휑해 보여도 결국 고급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단독 저택이었고 이웃도 너무 많아서,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은 도저히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때 문득 한 가지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아빠가 도심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곳에 사 둔, 거대한 공장용 부지.
그 땅을 샀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투자 가치도 없어 보이는 허허벌판을 왜 굳이 사냐고 투덜거렸었다.
하지만 아빠는, 장사를 해도 이익만 쫓을 게 아니라 가끔은 좋은 일도 해야 한다고, 그 땅을 사 주면 이전 공장주가 당장 막막한 사정을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다고 했었다.
그때는 그냥 좋은 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땅이 우리 가족의 목숨줄이 되어 줄지도 모르는 거였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부지 자체도 엄청 넓어서, 마음만 먹으면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를 쌓아 둘 수 있는 곳. 이보다 더 좋은 종말 대비 요새는 없었다.
대략적인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나는 바로 차를 몰아 그 산업 단지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현실은 내 상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부지는 온통 잡초가 무릎까지 자라 있었고, 여기저기 세워진 대형 창고들도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낡아 있었으며, 지붕은 여기저기 새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좀비든 뭐든 한 번 들이닥치기 시작하면 버틸 수가 없었다.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임신 초기라 속도 뒤집어져 위가 들끓는 것 같았고, 입덧까지 겹치니 머리도 지끈거렸다.
이건 더 이상 나 혼자 끙끙대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대로 차를 돌려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단지가 얼마나 초라하든, 내가 어떻게 손봐야 할지 아직 감이 안 잡히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유능한 아빠를 한 명이나 모시고 있으니까.
집에 도착한 나는 한 치의 숨김도 없이,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내가 다시 살아 돌아온 이야기와 곧 좀비 사태가 터질 거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털어놓았다.
처음엔 엄마 아빠 모두 멍하니 나만 바라봤다. 하지만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내가 너무 진지했고, 눈빛도 죽을 만큼 절박했으니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아빠, 엄마, 제발 나 좀 믿어 줘."
나는 간절하게 두 손을 모았다.
저번 생에서 나는 마크에게 속아 이용만 당한 게 아니었다. 그 자식은 아빠가 내 앞으로 넣어 준 신용카드까지 몰래 긁어 우리 집 재산을 죄다 자기 물자로 바꿔 버렸고, 정작 부모님은 도시 안 아파트에 갇힌 채 탈출도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없는 집 안에서 굶주림에 지쳐 서서히 죽어 갔었다. 그 비참한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이번 생에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런 일을 다시 겪게 만들지 않을 거였다.
"그래, 제시카. 우리 불쌍한 딸, 얼마나 무서웠겠어."
엄마는 한눈에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는지 금세 눈가가 붉어졌다. "밥, 당신도 들었지?"
"내가 뭐라 그랬어!"
아빠는 식탁을 한 번 쾅 내려치고는 씩씩대며 소리쳤다. "처음부터 그 마크인가 뭔가 하는 놈, 영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이렇게까지 당하고서야 이 얘길 꺼내는 건 또 뭐야, 응?"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전생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됐어. 밥. 지금 와서 딸 탓해서 뭐 해."
엄마가 서둘러 아빠를 말렸다. "지금 중요한 건 제시카 말부터 믿어 보는 거야. 일단 살아남을 준비부터 해야지, 그게 제일 급해."
엄마 말에 나는 눈가가 뜨겁게 젖어 들었다. 다시 한 번 물어뜯기는 감각이 온몸을 스쳐 지나가며 소름이 돋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공장 부지를 '지하 노아의 방주'로 바꾸자는 계획을 꺼내 들고, 머릿속에 있는 구상을 부모님께 죄다 설명했다.
아빠는 아까까지의 분노를 단숨에 거두고는, 내가 그려 온 대충의 스케치를 받아 유심히 훑어보더니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데이브? 나 밥이야. 이번에 좀 큰 부탁을 해야겠어."
아빠는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보안·건축 회사를 바로 연결했다.
"내 명의로 된 산업 단지가 하나 있는데, 거기를 긴급 리모델링해야 해. 지난번에 말해 줬던 그 '오프 그리드 생존' 컨셉 있지? 그게 지금 내가 필요한 거야. 오늘 안에 현장 한번 볼 수 있겠어?"
잠시 통화음이 들리다가, 아빠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돈 문제는 신경 쓰지 마. 나는 당신네 회사의 품질이랑 속도를 더 크게 보고 있어."
"알겠습니다. 로버트 씨. 한 시간 안에 현장에서 뵙죠."
전화를 끊는 아빠의 얼굴엔 이미 사업가 특유의 집중과 결단력이 깔려 있었다.
역시 수십 년을 시장에서 굴러먹은 베테랑은 달랐다. 인맥도, 실행력도, 여전히 녹슬지 않은 최고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