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왔고, 동시에 세상도 끝장으로 향했다.
아침 여섯 시에 엘레나가 먼저 깼고, 커피를 내려 내게 한 잔 건넸다.
일곱 시가 되자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는데 전화가 아니라 은행 알림이었다. 20만 달러 예약이체가 실행됐고 돈은 내 계좌에서 내가 새로 만든 해외 계좌로 빠져나갔지 카를 사촌이 운영한다는 그 건설회사로는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세 분 뒤, 카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잭! 돈 어디 갔어?" 카를 목소리에 공포가 묻어 있었고 "내 사촌이 계좌가 비었다고 하잖아!"라는 말이 덧붙었다.
"지연됐나 보지."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은행 시스템 가끔 맛 가잖아."
"그럴 리가 없어. 내가 확인했는데 이체 자체가 안 걸렸어." 카를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 멈칫했다. "너 어디야. 지금 당장 봐야 돼."
"크리스마스 저녁 먹기로 했잖아."
"저녁은 씨발!" 카를이 소리쳤다.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카를, 오늘 오후 네 시 전까지 마트 가서 물이랑 통조림이랑 약을 사, 있는 대로 다 사서 집에 쌓아. 문창문 잠그고 밖에 나오지 마."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가, 카를이 욕설 섞인 숨을 내뱉었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듣든 말든 네 마음이지."
나는 전화를 끊고 그 번호를 차단했다.
아홉 시쯤, 하늘이 다시 어두워졌다.
먹구름이 낮게 눌러앉았고 일기예보는 폭설이라고 떠들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건 눈이 아니었다.
열 시가 되자 SNS에 영상이 띄엄띄엄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누가 사람을 물어뜯고 경찰이 말리려다 덮쳐지는 장면이었는데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쇼핑하느라 바빠서 그런 걸 '자극적인 영상' 정도로 넘겼다.
두 시 반, 긴급 방송 주파수에 마침내 소리가 잡혔다.
"시작됐네." 내가 중얼거렸다.
오후 세 시 십 분, 카를네 2층 창문이 열렸고 리사가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훑다가 급히 들어가더니 창문이 닫혔다.
세 시 반, 큰길 쪽에서 사이렌이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금방 다른 소리에 묻혔다. 짐승 같은 비명, 유리 깨지는 소리, 자동차 경보음이 한꺼번에 터졌다.
나는 무기 거치대에서 레밍턴 700을 꺼내 소음기를 끼웠고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보려고 들었다.
스코프의 십자선이 거리를 훑었고, 첫 감염자가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순간 나는 전생의 냄새를 다시 맡는 것 같았다.
그놈의 움직임은 녹슨 꼭두각시 같았고, 왼쪽 다리는 허벅지 뿌리부터 협응이 무너져서 무거운 살덩이를 질질 끌며 끊기듯 걸었다. 발걸음마다 아스팔트 위에 검붉고 끈적한 흔적이 늘어났고 사람의 보행 같은 건 이미 버린 채 균형을 잃은 근육이 억지로 몸을 앞으로 밀어붙이는 비틀린 질주만 남아 있었다.
원래는 선명했을 빨간 크리스마스 스웨터는 앞가슴이 시커먼 오물에 흠뻑 젖어 축축하게 들러붙었고 움직일 때마다 젖은 천이 가슴을 탁탁 쳤다.
감염자는 밀러 집 하얀 문 앞에 멈춰 섰다가, 구부정한 상체를 확 젖히고 이마로 문을 들이받았다.
쿵.
두개골이 원목 문짝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유리창 너머로도 희미하게 전해졌고, 첫 충격에 이마가 바로 터져 흐릿하게 뭉개졌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고통 따위는 없다는 듯 같은 동작으로 머리를 문에 계속 박았다.
쿵, 쿵.
검붉은 피와 회백색 죽 같은 게 문에 번져갔고, 밀러 집 커튼이 공포에 떨듯 아주 잠깐 벌어졌다가 번개처럼 닫혔는데 그 미세한 움직임이 문 밖의 '그것'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곧바로 두 번째가 나타났다.
마트 유니폼을 입은 여자였고 얼굴 한쪽이 사라져 잇몸과 광대뼈가 드러난 채 햇빛에 밀랍처럼 창백하게 번들거렸으며, 빈 소매가 덜렁거렸고 다른 손에는 잘려나간 팔 하나를 쥔 채 손가락 관절이 아직도 미세하게 구부러졌다.
세 번째는 덩치 큰 남자였는데 배가 크게 갈라져 어두운 보랏빛 내장이 뒤로 끌리며 도로에 쓸리고 뒤집혀 모래와 오물이 덕지덕지 붙었다.
그다음은 열 번째, 스무 번째…
거리는 더 이상 거리가 아니었고, 끔찍한 것들의 전시장 같은 곳이자 비틀린 지옥의 입구가 됐다.
그것들은 골목마다, 차고마다, 들이받혀 찌그러진 차량 틈마다에서 쏟아져 나왔고, 어떤 놈은 절뚝이며 드러난 정강이뼈가 하얗게 부러져 있었으며, 어떤 놈은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흐느적거렸고, 또 어떤 놈은 아예 아래턱이 통째로 사라져 목구멍이 검은 구멍처럼 뻥 뚫렸는데도 살아 있는 냄새가 나는 쪽을 향해 "허억, 허억" 하는 쉰 울음 같은 소리를 뱉었다.
스코프 너머의 세계와 내가 있는 이곳은, 진짜로 천국과 지옥처럼 갈라져 있었다.
엘레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고 숨이 무거워졌다.
정각 네 시, TV 화면이 갑자기 긴급 속보로 전환됐다.
시장이 화면에 떴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프롬프터를 읽고 있었고 "모든 시민은 즉시 대피하고 문창문을 잠그고… 외출하지 말고… 이건 훈련이 아니며…" 같은 문장이 끊기듯 흘러나왔다.
화면은 곧 시내 항공샷으로 바뀌었고, 거리에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도망치고 그 뒤로 까맣게 몰려든 무리들이 추격했으며, 옆으로 넘어간 버스 한 대에서 불길이 치솟다가 신호가 끊겼다.
네 시 반, 카를네 현관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리사가 휴대폰을 쥔 채 뛰쳐나와 거리 쪽을 보며 두리번거렸고 카를이 뒤에서 리사를 잡아당기며 현관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는 스코프를 들어 배율을 올렸고 리사는 울고 카를은 소리치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리사였다.
전화를 받자 리사가 숨이 찬 목소리로 쏟아냈다.
"잭! 잭 너 어디야? 길에 미친 사람들 천지야! 경찰이 밖에 나가지 말래! 우리 지금…"
"뭐가 필요해?" 내가 물었다.
"너네 집으로 가야 해, 카를이 네가 안전가옥 만들었다고 했어. 주소 알려줘!"
나는 두 초 정도 침묵했다가, 아주 조용히 물었다.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뭐?" 리사가 얼어붙었다가 바로 날을 세웠다. "내가 네 여자친구잖아. 잭, 지금 삐칠 때가 아니야!"
"카를 옆에 있어?"
"있어. 우린 계속 같이 있었고, 우리—" 리사가 말끝을 흐리며 멈칫했다. 자기가 뭘 말했는지 본인도 알아버린 얼굴이었다.
나는 그걸 굳이 짚지 않았고, 목소리만 더 차갑게 만들었다.
"바꿔, 카를한테."
전화기 너머로 잡음이 한 번 훑고 지나가더니 카를 목소리가 들렸다.
"형제, 들어봐, 돈 얘긴 오해였을 수도 있어. 근데 지금은 뭉쳐야 해, 너 어디야. 우리가 갈게."
나는 스코프 속에서 그의 집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걸 보며 말했다.
"작년 추수감사절 기억나?"
십자선이 그의 머리로 옮겨갔다.
"우리 집에서 경기 보면서 네가 그러잖아. 세상이 망하면 서로 지켜주자고."
"당연히 기억하지! 그러니까 지금—"
"그러니까 지금, 너희가 할 일 하나 해."
나는 자세를 다시 잡아 십자선을 현관 쪽으로 옮겼다. "문 열고 나가서 왼쪽으로 돌아. 모퉁이 편의점 앞에 좀비 셋 있어. 그거 죽이고 편의점 안에 의료키트 가져와, 그건 중요한 물자야."
수화기 너머가 완전히 죽었다.
"너 미쳤냐?" 카를 목소리가 갈라졌다. "밖에 괴물 천지인데 우리보고 나가서 죽으라고?"
나는 웃었다.
"집에 있어도 똑같아. 음식 떨어지면 끝이고 문 뚫리면 끝이야. 어차피 죽을 거면 차라리 물자라도 챙겨."
"왜… 왜 이러는 건데?" 카를이 이해 못 하겠다는 숨을 뱉었다.
리사 목소리도 겹쳤다.
"잭,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왜 우리한테 이래?"
"왜냐고?" 나는 웃음을 더 깊게 눌렀다.
"하나는 내 옆에서 총알을 같이 맞던 형제였고, 하나는 내가 다섯 년을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너희는 나를 배신했잖아."
마지막은 거의 고함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고 카를이 충격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네가 하겠다는 투자도 전부 날 속인 거야? 너 사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 처음부터 연기였어."
리사가 울컥 소리쳤다.
"왜? 그냥 우리를 폭로하면 되잖아. 왜 이렇게까지 해, 왜 갑자기 그렇게 냉혈한이 됐어. 잭 너 원래 이렇지 않았잖아!"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포인트야. 너희가 끝까지 이해 못 하고, 이해 못 한 채로 죽는 거, 그 느낌이 필요해."
전생의 나처럼.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카를에게 마지막 선택지를 던졌다.
"카를, 너 군인이었잖아. 길은 두 개밖에 없어. 그냥 앉아서 기다리다 죽든지, 나가서 물자 챙기든지, 자, 뭐 할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