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박여진은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문현정과 문현정의 어머니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뒤편에 서 있는 백서진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그는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내며 신호를 보냈다.
임영선과 몇몇 하인들은 맨 뒤에 서 있다가, 눈앞의 요염하게 차려입은 여자를 보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평소 얌전하고 조용하던 박여진이라는 사실을 알아봤다.
박여진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머리에 쓰고 있던 토끼 귀 머리띠를 허겁지겁 벗어 던졌고, 몸에 걸친 얇디얇은 실크 잠옷도 급히 그러모았다.
"현정아, 사모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문현정의 어머니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 번 훑어보았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에 머물렀다.
짧고 얇은 실크 잠옷은 아무것도 가리지 못했고, 가슴 앞의 깃털 장식과 뒤에 달린 토끼 꼬리는 숨길 수조차 없었다.
평소 단정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던 모습과는,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와, 엄청 섹시하네."
문현정이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여진이, 남자친구 생겼어? 생긴 줄도 몰랐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절친 맞아?"
"아, 아니야… 남자친구 없어."
박여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고, 당장 바닥으로 꺼지고 싶은 표정이었다.
문현정의 어머니는 얼굴을 굳히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진아, 아직 학생이잖니. 지금은 공부에 더 신경 써야 할 때야."
그제야 임영선은 눈앞의 여자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확실히 알아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진아! 어린 나이에 이런 짓을 하다니, 어젯밤 어디서 어떤 놈이랑 어울린 거야?"
"엄마, 나… 나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임영선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꼴이 이게 뭐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사모님이 얼마나 돈을 들여서 너 공부시켜 주셨는데, 공부는 안 하고 남자 꼬시는 짓이나 배우고 있어?"
겉으로는 분노에 찬 모습이었지만, 임영선의 속마음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이 일로 사모님이 지원을 끊어 버리면, 자신과 딸의 삶은 그 자리에서 끝이었다.
이대로는 안 됐다.
사모님이 마음이 약하다는 걸 알기에, 결국 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찰싹, 찰싹, 찰싹.
임영선의 손바닥이 그대로 박여진의 뺨에 내려꽂혔다.
형식적인 연기가 아니었다. 동정을 사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평소 힘쓰는 일을 해 온 손이었기에 몇 대만에 박여진은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아— 엄마, 아니야!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그만 때려!"
비명은 날카롭게 복도를 울렸다.
그 모습을 본 백서진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말리고 싶었지만, 문현정의 어머니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주먹을 꽉 쥐었고, 핏줄이 선명하게 튀어나왔다.
"그만해요."
문현정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해도 되겠어요."
"여진이도 성인이잖아요.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은 아니에요. 다만 사람은 잘 골라야죠. 이상한 양아치들이랑 어울리지만 않으면 돼요."
그 말에서 분명한 여지를 읽은 임영선은 그제야 손을 멈췄다.
"사모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저희 모녀,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문현정의 어머니는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회사에 가봐야겠네. 커피는 다음에 마시자. 현정아, 여진이 데리고 병원에 가 봐. 맞은 데는 없는지 확인도 하고, 말도 좀 해 주고."
"알겠어요, 엄마."
문현정의 어머니가 하인들을 데리고 자리를 뜨자, 현장의 공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백서진은 더 이상 가식적인 표정을 유지하지 않았다. 얼굴이 단번에 굳더니, 곧장 달려가 바닥에 주저앉은 박여진을 부축했다.
"여진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서진 오빠……."
박여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엾은 얼굴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백서진은 그제야 문현정을 노려보며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문현정, 이제 만족해? 일부러 네 엄마까지 끌고 와서 여진이를 망신 주고, 이렇게 맞게 만들었잖아. 너 진짜 너무하다."
그는 더 이상 연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문현정은 자신을 뼛속까지 사랑하는 여자였고, 언제나 낮은 자세로 매달리며, 자신 앞에서는 자존심 따위도 없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 털어놓는 편이 낫다. 자기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박여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계속 결혼하고 싶다면, 박여진을 자신의 연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문현정은 그의 가면이 완전히 벗겨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속에서 역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전생의 자신이 이런 인간을 위해 가장 사랑했던 가족과 아들까지 잃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말, 눈이 멀어도 단단히 멀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문현정은 일부러 이해하지 못한 척했다.
백서진은 이를 악물고 차갑게 내뱉었다.
"문현정, 똑똑히 들어. 네가 아직도 나랑 결혼하고 싶다면, 반드시 세 가지를 지켜."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세었다.
"첫째, 여진이 학비랑 생활비 계속 대."
"둘째, 여진이한테 포르쉐 파나메라 흰색으로 한 대 사 줘."
"셋째, 나랑 여진이 사이에 절대 간섭하지 마."
그의 눈에 잔혹한 빛이 스쳤다.
"그렇지 않으면 약혼은 취소야. 너는 해람시에서 버림받은 여자, 약혼자에게 차인 웃음거리가 되는 거지."
문현정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백서진의 속이 서늘해졌다.
"웃어? 뭐가 웃겨?"
"네가 말한 거 말이야."
문현정은 또박또박 말했다.
"전부 꿈 깨."
타악.
그녀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약혼반지를 빼내 그대로 그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백서진, 지금 이 순간부터 약혼은 끝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