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배신한 약혼자가 약을 먹인 그날 밤으로 회귀한 문현정은 망설임 없이 그의 둘째 삼촌 백진헌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나를 가져요." 다음 날, 쓰레기 같은 약혼자가 사람들을 데리고 들이닥쳐 현장을 잡아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했지만, 문현정은 오히려 옆방에서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우연이네. 당신들도 여기서 묵었어?" 이번 생에서 문현정은 자신을 짓밟았던 모든 인간을, 하나씩 지옥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제1화
장례식장 안은 숨이 막힐 만큼 적막했다.
커다란 흑백 영정 사진 옆에는 하얀 국화가 눈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고, 그 앞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문현정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무릎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더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문 선생님, 사모님 편히 가십시오."
"사람은 죽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현정 씨, 부디 마음을 추스르세요."
위로의 말들은 두꺼운 유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흐릿하게 울렸다. 문현정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했지만, 마음속은 이미 완전히 말라붙은 것처럼 고요했다.
일주일 전의 그 교통사고는 그녀에게서 가장 사랑하던 부모를 앗아갔고, 동시에 여덟 살 아들 서우까지 데려갔다.
그 사고 이후, 그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유가족께서는 마지막 인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텅 빈 홀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주님, 남편분이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는데 조금 더 기다리실까요?"
문현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마치 끊어진 현처럼 갈라져 있었다.
"괜찮아요. 장례는 예정대로 진행해주세요."
부모는 곧 땅에 묻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 백서진은 사고가 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
더 잔인한 건, 아들 서우의 시신마저 '의학적 필요'라는 명목으로 그가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진실은 더욱 그녀를 무너뜨렸다. 서우의 각막은 백서진의 사생딸에게, 심장은 그의 사생아에게 이식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온전한 모습조차 마지막으로 볼 권리를 빼앗긴 셈이었다.
십 년의 결혼 생활은 완벽한 패배로 끝났다.
더 우스운 건, 그녀의 남편을 빼앗아 간 여자가 다름 아닌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집안 보모의 딸, 박여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힘들 때마다 곁에서 손을 내밀어 주던, 마음을 터놓고 믿었던 제일 친한 친구였다.
세 달 전, 문현정이 직접 남편 백서진과 박여진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제야 모든 게 분명해졌다.
백서진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여진뿐이었다. 자신과의 결혼은 문씨 가문의 정치·경제적 배경과 막대한 자산을 노린 선택에 불과했다.
'아빠, 엄마, 죄송해요. 그때 두 분 말씀을 듣지 않고 끝까지 백서진과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린 걸 정말 후회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꼭 말씀을 들을게요. 다시는 이런 선택 하지 않을게요….'
끝내 감정의 둑이 무너졌다. 그동안 억눌러 왔던 고통과 후회,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쿵.
문현정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세게 내리찧었다. 피가 곧바로 배어 나왔고,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하지만 그 고통은 마음속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어...!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상주님!"
사회자와 직원들이 다가왔을 때, 문현정은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심장은 멈춰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죽었다.
부모의 영정 사진 앞에서, 가장 찬란해야 할 서른의 나이에.
......
문현정이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였다.
"쿵—"
누군가가 그녀를 거칠게 들어 올려 푹신한 침대 위로 내던졌고, 곧이어 크고 묵직한 그림자가 덮쳐 왔다.
"읏...!"
갑작스럽게 짓눌린 무게에 문현정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남자의 체취가 사방을 휘감았고, 거칠고 집요한 입맞춤이 숨을 막히게 파고들었다.
"이거 놔! 누구야?!"
문현정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창밖에서 스며든 희미한 빛에 기대 그녀는 마침내 자신을 누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선이 또렷한 윤곽, 조각처럼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
"백진헌…?"
그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문현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너무도 젊은 얼굴, 익숙하기 짝이 없는 방 안의 배치.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십 년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백서진과 약혼식을 치르던 바로 그날 밤으로.
백진헌은 백서진의 둘째 삼촌이자, 백씨 가문의 미래를 통째로 거머쥔 유일한 후계자였다. 동시에 전생에서 백서진이 무슨 수를 써도 끝내 제거하지 못했던 최대의 적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약혼식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틀렸다.
백진헌은 하루아침에 강간범이 되었고,
그 상대는 다름 아닌 그녀, 백서진의 약혼녀 문현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