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직장 내 “나쁜 손”
문아영은 옆에 있던 김한세한테 의문의 눈길을 던졌다. 김한세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최강원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번 프로젝트의 감독인 최고제는 문아영과 김한세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최강원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곧장 일어서서 말했다.
“최 회장님, 이렇게 친히 저녁 식사 자리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귀한 발걸음 하셨네요.”
최강원은 간단히 감독과 악수하며 말했다.
“최 감독님께서 주최한 마련한 자리인데 당연히 와야죠.”
최강원이 제작진들과 한차례 인사를 나눈 후에야 김한세는 문아영을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 비록 저번 둘의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프로젝트를 계속 협력하기로 했으니 예전 감정은 덮어두기로 했다.
김한세는 미소를 띠며 최강원과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젠 문아영의 차례였다.
문아영은 마음을 다잡고 신입답게 가장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최강원에게 인사했다.
“최 회장님, 안녕하세요.”
이영지와 김한세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문아영과 최강원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감독이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보탰다.
“최 회장님, 저번엔 우리 문 작가님이 갑자기 일이 생겨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보니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분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앞으로 이런 미인을 옆에 끼고 일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일할 맛이 납니다.”
감독은 자신이 문아영을 칭찬한다고 생각했지만, 왜인지 최강원의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최강원이 감독을 노려본 이유는 미인을 옆에 끼고 일한다는 감독의 말이 매우 음흉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문아영이 내민 가느다란 손을 가볍게 잡고는 천천히 말했다.
“문 작가님 별명이 얼음 여왕이라고 들었는데, 듣던 대로 손이 정말 차갑네요. 혹시 옷을 너무 얇게 입으신 건 아닌가요?”
문아영은 최강원이 질문을 듣고는 너무 뜬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옷차림에 대해 말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게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손을 재빨리 빼내며 미소를 지었다.
“최 회장님도 정말 농담을 잘하시네요.”
감독이 또 끼어들며 말했다.
“최 회장님, 요즘 젊은 여성들은 다 이렇게 입더라고요. 이 허리 좀 보세요, 정말 날씬하죠?”
감독은 말을 하며 손을 뻗어 문아영의 허리를 만지려고 했다. 문아영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고, 본능적으로 그한테서 한발 물러섰다.
직장 경험이 많지 않은 그녀였지만, 이런 “나쁜 손”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다. 박정인 역시 몇몇 감독, 부감독, 그리고 남자 배우들이 틈이 날 때마다 여배우들한테 추근거린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 같은 신입 작가도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지금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였다.
다행히 그녀가 재빠르게 피했기에 감독의 손이 허리에 닿지는 않았지만, 만약 닿았다면 정말 죽을 듯이 역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쾌하고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고, 감독의 손이 실제로 닿지 않았기 때문에 대놓고 반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감독은 그녀가 피한 것을 보고 잠시 민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을 더 덧붙이기도 전에 위에서 살기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최강원이 차갑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독은 겁을 먹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다.
그때, 김한세가 적절히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
“모두 다 왔으니 이제 앉으실까요?”
김한세 역시 최고제의 행동에 대해 분노와 혐오를 느꼈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아무도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었다.
문아영은 이영지와 함께 앉았고 최고제와는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식사가 시작된 후 남자들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문아영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원래 최 감독을 존경했었고, 오늘 저녁 기회를 빌려 감독과 작품 이야기를 하고 싶었었다. 감독과 작가의 소통은 매우 중요했고 작가가 대본을 쓸 때, 실제 촬영에서 실현 가능한지 감독에게 물어봐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감독이 자신을 모욕한 이후부터, 그녀는 모든 의욕을 잃었다.
오히려 앞으로 이 거지 같은 감독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다만 그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조용히 음식을 먹는 동안, 회전 테이블 위에 소고기나 양고기 요리가 그녀 앞에 다가올 때마다 누군가가 테이블을 회전시켜 요리를 치워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문아영은 고개를 들어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는 최강원을 보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회전 테이블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쳐다보자, 최강원도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번 힐끗 보았다. 문아영은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식사를 이어갔다.
지난번 내가 그를 비꼬았던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네. 내가 소고기와 양고기를 못 먹는 걸 기억하고 있다니.
술을 몇 차례 마시고 난 후, 감독이 갑자기 술잔을 들고 문아영에게 말했다.
“문 작가, 저번 회의 때 빠진 거 말이에요. 물론 사정이 있었겠지만, 오늘 같은 자리에서는 벌주를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감독의 말이 끝나자, 최강원과 김한세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둘의 눈빛에는 은근한 경고와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
감독은 무언가를 감지한 듯 말끝을 흐리며 이 상황을 그냥 어물쩍 지나 보내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문아영이 벌떡 일어나 시원하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가 벌주를 한잔 마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녀는 담담하게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작가로서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잔에 든 술을 단번에 들이켰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듯했다. 그녀의 외모는 여리여리하고 온순해 보여, 술을 잘 마실 것 같은 이미지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망설임 없이 술 한 잔을 그것도 꽤나 호쾌하게 원샷을 해버렸다.
김한세는 문아영을 지그시 쳐다보았고, 최강원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
언제부터 그녀가 술을 마셨던가?
그와 함께한 3년 동안 그녀는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가족 모임에서도 술을 못 마신다며 거절하곤 했던 그녀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서는 거절하지 않고 그냥 마셔버렸지?
게다가 최강원은 잘 알고 있었다. 여자가 술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이면, 일부 남자들이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문아영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금 그녀는 신입 작가에 불과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녀보다 훨씬 더 많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그 누구도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
이번에는 김한세에게 도움을 요청해 술을 대신 마시게 하거나 거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다다음번에는?
매번 다른 사람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기에 그녀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술? 마시면 되지. 뭐가 문제야.’
아무도 문아영의 이 부드럽고 단아한 외모를 보고는 술을 잘 마실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그녀는 술을 꽤나 잘 마셨다.
문아영은 고등학교 때부터 박정인과 절친이었고, 박정인은 얼굴만 예쁘장한 학생이었지만 문아영은 공부, 체육, 예술, 사회봉사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모범생이었다.
이런 모범생이 박정인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그녀 안에도 자유롭고 발칙한 면모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술 마시는 법도 고등학교 때 박정인과 함께 배웠었다. 그리고 마시다 보니 술이 점점 늘어, 지금은 아무리 들이부어도 취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오늘 밤, 감독과 제작진들을 모두 술로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술을 강요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